나라 안팎의 사회 뉴스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미국에 사는 처제가 고향에 놀러와 삼주 가량 집에 머물렀다. 다시 돌아갈 때쯤, 처제가 사는 도시 인근, 텍사스 주 달라스 근방 소도시의 쇼핑몰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처제와 함께 뉴스를 보며 얘기를 들어보니 한국은 물론이고 전국 단위로 보도되지 않는 총기 사건은 더 많다고 한다. 총기 사건뿐만 아니라 다양한 강력 사건과 이에 따른 흉흉한 소문이 많은지라 미국 사람인 동서조차 아내 혼자 주유소에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딸의 등하교 시간을 챙기고 외출 상황을 챙기는 것도 당연하게 여기고 말이다.

그런 험한 동네에서 온 처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국내 사회 뉴스에도 다양한 사건들이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사과하면 간단히 수습 될 일을 왜 이렇게 키우나 싶은 사건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사건들을 보다보니 ‘아니 이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우리도 총기에 대한 규제가 없으면 미국 못지않게 총기 사건이 나지 않을까, 별 것도 아닌 일에 총부터 들이대는 일이 흔해지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예를 들어 한 카페의 금연 구역에서 담배 피는 사내들에게 알바생이 주의를 줬더니 그 사내들이 화를 내고 마시던 커피를 바닥에 뿌리고 꽁초를 버린 사건과 점포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취객을 보고 주의를 줬더니 칼을 들고 점포에 들어와 죽이겠다는 소동이 있다. 주차 해 놓은 차에 어린 아이가 빗자루를 따위로 흠집을 냈다고 경비실에서 전화가 왔기에 적당히 훈계하고 보내라 했더니 나중에 그 엄마라는 사람이 와서 왜 우리 애 혼내서 기를 죽이냐고 따져서 수리비 청구서를 보냈다는 기막힌 이야기도 있고, 무인점포에서 주전부리를 훔쳐 먹은 초등학생들의 신상을 점포 앞에 붙여 공개하여 동네를 술렁이게 한 사건도 있다. 이런 사건사고를 보고 듣다 보면 다들 화를 주체 못하고 사는 것 같다. 다들 왜 그러는 걸까?

(칼리그래피=이톡뉴스)
(칼리그래피=이톡뉴스)

 

'나'만 생각하다 놓친 가치


앞서 다른 기자의 <정체성 수업>의 책 리뷰에서도 언급됐듯이 자존감에 관한 책이 많다. 나를 위로하고 나를 찾고 자존감을 세우라고 한다. 남에게 상처 받지 말고 자신의 마음부터 지키고 챙기라고 조언하는 책도 많고 험한 세상에서 나를 위로하고 나부터 먼저 돌보고 살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책도 많다. 육아 분야로 눈을 돌리면 아이의 기를 살리는 법, 기죽지 않고 당당한 아이로 키우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도 있다. 아이의 자존감을 세우고 기를 세우고 세상에 맞설 수 있는 당당한 아이로 키우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어쩐지 “나”와 “내 자식”과 더불어 사는 “우리”에 대한, “모두” 함께 더불어 잘 사는 법에 관한 책은 보기 어렵다. 뭔가 균형이 깨진 기분이다.

함께 어우러져 살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 중 하나가 배려다. 배려(配慮)의 사전적인 뜻은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다. 한자를 뜯어보면 그 의미가 더 깊게 전달된다. 앞의 배(配)자는 “나누다.”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그 전에 “아내”, “짝짓다.”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쓰는 “배우자”나 “배필”, “교배”에도 이 한자가 쓰인다. 뒤의 “려”자는 “생각하다.”라는 뜻이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당연히 앞의 한자인 “배”자다. 앞의 이 단어로 인해 배려라는 단어가 더 깊게 와 닿기 때문이다.

“배”자에는 정성스럽게 술독을 관리하는 아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알다시피 술을 담그고 나서 잘 못 관리하면 시어 버린다. 그래서 한 집의 술맛이 좋다는 것은 그 집의 살림을 맡아하는 아내가 그 살림을 두루, 꼼꼼히 살핀다는 의미가 된다. 장맛을 매년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내의 이런 보살핌은 가족 구성원의 안녕을 위해서다. 나의 노력이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하고, 나의 마음 씀이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아닌 남을 생각하는 것, 심지어 나보다 우선하여 생각하는 것, 더 나아가 그 생각을 바탕으로 남을 위하는 것, 그것이 배려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인후초등학교 인근 상가건물에 난 통로. 이 상가를 운영하는 박주현 씨가 임대 수익을 포기하고 동네 어린이들을 위한 통학로를 내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인후초등학교 인근 상가건물에 난 통로. 이 상가를 운영하는 박주현 씨가 임대 수익을 포기하고 동네 어린이들을 위한 통학로를 내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배려'가 현상이 되기 위한 조건들


4월 초에 이런 뉴스를 봤다. 전주에서 과일 가게를 하는 건물주가 건물 한 가운데 길을 내어 인근 초등학생들을 위한 안전한 통학로로 만들었다는 뉴스다. 더 받을 수 있는 월세를 포기하고 길을 냈다. 건물 안에 길이 있다 보니 아이들이 오가면 오갈수록 그 길의 훼손은 불 보듯 뻔하다. 실제로 건물주는 주기적으로 그 길을 보수하고 있다. 이런 배려에 주변 이웃들도 감사해 하고 있다.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배려가 대중적 실천이 되려면 배려에 대한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 아내의 여러 수고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매 순간 감사의 표현을 할 때 아내가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타인의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면 배려는 어느 순간 멈추게 된다. 영화 <부당거래>에 나온 대사처럼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 때문에 호의와 배려는 멈춰지거나, 심지어 그 호의와 배려에 값이 매겨질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조건은 사과와 반성이다. 앞서 말한 사건들은 이런 사과와 반성이 기반이 된 대화만 오고 갔어도 사건이 안 될 수도 있었다. 나보다 어린 친구가 나와서 담배를 피우라 마라 했다고 기분 나빠 하기 전에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자성과 반성이 우선되면 즉각 사과가 나오게 되어 있다. 아이의 장난으로 자동차의 흠집이 났으면 사과를 먼저하고 빈말이라도 보상할 수 있는 방법과 비용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면 적당한 선에서 수습됐을 일이다. 술김에 잠시 높아졌던 목소리에 대해 사과를 하거나 이런저런 속상한 일이 있어 대화가 잠시 격해졌다고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으면 칼이 등장하는 사건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내 자존심과 내 기분만 생각하지 않고 내 잘 못과 그 잘 못으로 인해 타자와 공동체가 입었거나 입었을지도 모를 피해에 대해 인식하고 사과를 먼저 하면 기분 좋게 끝날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내 주장과 자존심만 세워서는 타자와 공존할 수 없다. 최근 들어 배제의 공간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 공존의 불가능성을 인식한 자영업자들의 고육지책일지 모른다. 노 키즈 존은 이미 흔해졌고 특정 스터디 카페의 경우엔 노 중학생 존으로 운영되고 있다. 민폐 커플을 막기 위한 노 커플 존으로 운영하는 카페도 있고 카페에서 공부하는 카공족을 사절하는 노카공존도 등장했다. 최근엔 노 시니어 존도 많아지고 있다. 배제의 공간이 많아진다는 건 타협과 상호 이해, 이를 바탕으로 한 공존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다. 아니, 아예 그 과정의 불편함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배제의 결정을 비판하기 전에 생각해봐야 한다. 내 자존심, 내 감정, 내 생각, 내 마음을 지키고, 우리 아이 기를 죽이지 않고 당당하게 키우겠다고, 나이와 지위에 맞게 대접받겠다고 공동의 공간에서 내 말과 생각을 굽히지 않아서 그 공간을 투쟁의 장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배제의 공간 대신 공존의 공간이 더 늘어나기 위해선, 지금 배려가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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