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기장에 있는 부산과학관으로 별을 보러 갔다. 세 살 때부터 딸의 친구였던 지유와 딸을 데리고 아내의 직장이 있는 장산까지 지하철로 이동했다. 평생 딱 한번 지하철을 타 본 지유는 지하철을 타고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설레었다. 지하철을 타자 가만히 앉아 있던 딸이 핑크색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읽는 “척”을 했다. 아마 아직 글이 많은 책은 읽기 꺼려하는 지유 앞에서 젠 척 하고 싶었으리라. 난, 친구를 옆에 두고 새삼 무슨 책이냐고 가볍게 타박한 뒤 책을 다시 집어넣게 했다. 딸은 지유와 소곤거리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 옆에 멀뚱히 앉아있자니 심심했다. 딸이 집어넣은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물론 영화로도 봤지만 이 글은 책을 읽고 난 뒤 쓴 글이니 엄밀히 말하면 책의 위로라 불러야 하나?

팀 버튼 감독의
팀 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 2010)" 스틸 컷.

누가 더 이상한가?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한데 버무렸다. 여기에 팀 버튼 특유의 세계관을 양념으로 넣어서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 이야기>인지, <이상한 나라의 팀 버튼 이야기>인지 모를 영화를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내용은 대충 책과 비슷하다. 한 소녀가 토끼를 쫓다가 도착한 이상한 나라에서 겪는 이야기다. 차이가 있다면 팀 버튼의 이야기에선 이상한 나라로 가기 전의 이야기가 더 이상할 뿐. 아직 소녀로 남고 싶은 앨리스에게 어른들은 그들의 거래를 위한 정략결혼을 강제한다. 또 결혼의 전단계인 약혼식과 파티를 위해 어른의 옷차림과 예의를 강요한다. 그 예의와 격식을 차린 파티에서 앨리스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다 갑자기 나타난 토끼를 쫓아 사라진다.

영화 속 앨리스는 어른의 사회에선 가장 이상한 존재다. 물론 앨리스에겐 오히려 어른의 세상이 이상한 나라지만. 팀 버튼은 원작에 은밀히 숨겨져 있던 이 은유를 영화 초반에 제시한 뒤, 그 뒷이야기와 한데 엮어 강렬한 메시지로 만들어 관객에게 내던진다. 그 메시지 안엔 연쇄 된 질문이 담겨 있다. 사회에서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그것은 어떤 힘으로 가능한지. 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성의 획득은 필연적이어야만 하고 또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지. 그것을 획득하지 못한 존재는 영원히 이상한 존재나 미숙한 어린이와 같은 존재로 살 수 밖에 없는 건지. 그런 비정상적인 존재는 사회로부터 차별받거나 의문의 대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건지. 그래서 세상이 어른이 됐냐고 물을 때마다 자신이 누구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로 살 수밖에 없는지 다그치듯 묻는다.

어른 맞춤의 시도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로 나가는 출구에 자신의 몸을 맞추기 위해 애쓴다. 몸이 커지는 약을 먹고, 작아지는 과자를 먹는다. 그러나 그 몸의 크기는 늘 입구보다 작아지거나 커져서 입구를 나오기까지 적잖은 고생을 한다. 몸의 크기가 들쑥날쑥하기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앨리스가 여러 차례 몸의 크기를 바꿀 때마다 주변의 사물이나 인물보다 크거나 작다. 도대체 왜 앨리스는 작거나 큰 걸까? 딱 맞출 수는 없었던 걸까? 딸을 키우면서 저 은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또 종종 집 주변에서 마주치는 여중생들을 보면서,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감독의 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아이들은 금방 큰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 밖에 안 된 딸도 150이 가깝다. 몸은 어른 같아지고 배운 것도 그럭저럭 많은 덕에 세상 이치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면 아이들은 “이상한” 어른의 세계에 자신을 억지로 꿰어 맞추기 위해 어른 흉내를 낸다. 치마를 줄이고 화장을 하고 담배를 핀다. 무리에 끼기 위해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배우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한다. 우리 때도 그랬고 지금은 더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어른 흉내를 내기 시작하면서 아이다움과 나다움은 사라진다.

이게 이상한 나라의 규칙이다. 어른이 된 후에도 다른 누군가를 흉내 내며 살다가 결국 자기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다리가 침대 밖으로 나오면 자르고, 모자라면 늘였던 신화 속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이야기처럼, 그렇게 사회의 기준에 자신을 끼어 맞춰가며 산다. 그렇게 살다 노년이 되서야 다시 나다움, 아이다움을 회복한다. 남에 눈치 안보고 꽃무늬 셔츠를 입고, 화사한 바지를 입는다. 사회에서 물러나고 아이처럼 신체가 다시 작아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서야 우린 비로소 저 냉혹한 침대의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사진=필자 제공)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


한 사회의 요구에 딱 맞아 떨어지는 어른이 되는 건 어렵다. 그러나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어른들은 잘 맞춰 살아가는 것 같다. 아이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성인이 된 어른은 하고 싶은 걸 다하면 사는 완성 된 존재로 보인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대우 받는 것 같다. 시간과 장소와 사회에 적합한, “애들은 몰라도 돼.”와 같은 말을 안 듣는 사람 같다. 나이만 먹으면 저런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아니 나이를 먹는 것 자체가 완성 된 인격을 보장해주는 것만 같기에 어서 빨리 어른이 됐으면 한다.

반면 이미 어른이 된 어른은 어른이 됐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래서 <어린왕자> 속 행성들의 주인처럼 살아간다. 왕, 허영심이 많은 신사, 술꾼, 사업가, 장사꾼처럼. 자기가 집착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어른으로 보일 길이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놓질 못한다. 술 취하는 것이 부끄럽고,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다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주정뱅이의 딜레마와 같은, 그런 딜레마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어린왕자>에선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고 했지만-돌아보니 순전히 나다웠던 순간은 어린 시절뿐이었음을 불현 듯 깨달은 어른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넌 누구니?


평생 서툴다. 어린 시절에도 서툴지만 어른이 돼서도 서툴다. 그래서 불안하다. 삶도, 이 순간도 한번 뿐이니, 그 지나치는 어느 순간, 어느 공간, 어느 사람에게 내가 적절한 존재였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평생 우리는 모든 게 딱 맞아 떨어지는 마술 같은 순간을 기대하며 사는 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좀처럼, 아니 절대로 오지 않기에, 이 영화와 책 속에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사는지 모른다. “넌 누구니?”

우린 저 질문의 답을 모른다. 인생의 비밀을 다 알 것 같은 노년이 되도 마지막까지 남게 되는 질문이 “난 누구인가?”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우린 다들 뭔가 하고 있지만 정작 이 뭔가를 통해 구축하려는 나와 내가 만든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지 못한다. 나다움을 잃어버린 뒤 얻은 뭔가로 우린 내가 누구인지 겨우 말하려 하는지 모른다. “이상한 나라의 나”로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 이 대사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인 척해 봐야 소용없어! 품위 있는 한 사람이 되기에도 부족할 판에!" 어린 앨리스가 스스로에 보내는 이 호통은 어쩌면 루이스 캐럴이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고민하기 전에 품위 있는, 아니 제대로 된 나 자신이 되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뒤이어, 나 자신이 되는 여정엔 끝이 없다고, 다른 대사를 통해 말한다. "넌 틀림없이 어딘가에 도착하게 돼 있어. 걸을 만치 걸으면 말이지". 걸을 만치 걷는다는 건 어느 정도일까?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나를 만날 만큼 산다는 건 어느 정도의 세월을 말하는 걸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영화 속 하얀 여왕의 대사처럼 그 인생 여정의 모든 결정은 “남들에게 떠밀려 결정해선 안”된다.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싸울 땐 너 혼자일 테니까.”말이다. 혼자의 힘으로 인생을 후회 없이 싸워나갈 힘을 가진 사람만 어른으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일까? 루이스 캐럴도, 팀 버튼도 수수께끼만 잔뜩 남기고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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