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내역 인근 동대. (사진=필자 제공)
월내역 인근 동대. (사진=필자 제공)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울산까지 동해선이 완전 개통 된 덕에 출근길 독서가 가능하다. 부산-울산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외버스에선 그 흔들림과 어두운 조명 때문에 길 위의 한 시간동안 책 한번 못 펼쳐서 아쉬웠는데 다행이다 싶다. 퇴근 후 동해선이 곁에 두는 풍경을 딸에게 자랑했더니 딸도 타보고 싶다고 졸라서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타서, 생전 내릴 일 없을 작은 어촌역인 월내역에 내렸다. 등대 구경을 하고 갈매기와 철새들을 보고나서 카페 한 곳에 들어갔다.

너는 그림을 그려라 애비는 책을 읽을 테니


출발 전 딸과 갈 카페를 검색했다. 작은 어촌에도 몇 곳의 카페가 있었다. 다들 바다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부산 사람은 촌스럽게, 갈매기 몇 마리 날아다니는 바다 풍경에 혹하지 않는다. 딸도 멍하니 바다나 보는 건 체질이 아니어서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없을까 하던 차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카페를 찾았다. 문제는 난 그림 그리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 그렇다고 꼼꼼하게 색을 고르고 칠하는 딸에게 지루하니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하면 모처럼 외출을 망칠 것 같아 내 나름의 대책을 마련했다. 바로 책을 들고 가는 것이다. 그렇게 어촌을 둘러보고, 등대에서 사진 몇 장 찍고 그 카페에 갔다. 모처럼의 나들이니 딸이 먹고 싶어 하는 브라우니를 포함해 음료와 간식을 잔뜩 주문하고 나니 주인장이 이런다. “여기 있는 그림 중 두 장을 고르셔서 색칠하시면 되요.” 책을 가져가길 잘 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솔직히, 겁도 없이 고백하자면, 아내를 따라 카페에 가면 할 게 없다. 언제 카페에 갈지 모르니 책을 챙겨 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모처럼 카페에 갔는데 사람 앞에 앉혀놓고 카페에 비치 된 책을 가져와 읽는 건 매너가 아니지 않나?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사이에 딸이 끼면 그나마 화제를 풍성하니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서로의 다름이 우리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부부나 커플은 연애 초기나 신혼 초에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누리지 못해서 안달일 것이다. 일상도, 여행도 주말도 취미도 함께하고, 동행하고 동반하는 것을 당연시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 아니겠나? 서로 다른 것에 끌려 연애하고 결혼했다면 시간의 쓰임이나 여가의 활용 또한 다른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연인이든 부부든 적당히 거리를 두는 시간을 갖고, 각자의 공간과 여백을 허락하는 것이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연애한 세월까지 합하면 아내와 20년 넘게 지지고 볶았다. 그렇게 함께 부대낀 세월이 좀 되니 “따로 또 같이”를 실천하게 된다. 요즘 아내는 주말이면 발레를 하고, 발레 동료와 차를 마시고 오곤 한다. 오후에는 딸과 함께 가까운 동생 집에 가서 게임을 하기도 한다. 난 그동안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운동을 한다. 종종 혼자 낮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러다 저녁엔 나도 처남 집에 합류해서 함께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온다. 아내는 게임을 같이 하자고 안하고, 나또한 독서를 권하지 않는다. 평일 저녁도 마찬가지다.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하고 나면 아내는 딸과 <모여 봐요. 동물의 숲>을 하거나 TV를 보고, 난 잠시 유튜브로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보고 책을 읽는다. 사람이 나이 든다고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서로의 다른 점을 고쳐서 같아지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각자의 즐거움과 혼자만의 시간을 긍정한다.

아내가 잘 때를 기다린 뒤 늦은 밤이 돼서야 게임을 하는 젊은 게임 마니아들에게는 참 부러운 정경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도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는 이런 따로 있는 시간의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이제 아이가 커서 제 앞가림도 하고 저녁 시간엔 제가 해야 할 숙제도 알아서 하니 이런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또, 저 지지고 볶은 20여년의 세월 끝에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 나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요 가정이 편한 길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별의 예방책


대략 십여 년 전에 일본에선 황혼이혼, 은퇴 이혼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더불어 젖은 낙엽 증후군이라는 말도 함께 나왔는데, 이혼 당할까봐 아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은퇴한 남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우리도 최근 이런 경향이 많이 늘었다. 요즘 쿠킹 클래스에 가면 은퇴한 중년 신사들이 많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 마누라 대신 음식을 해서 뒤늦게 점수를 좀 따거나, 밥 차려 달라는 말이 슬슬 눈치가 보여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도 황혼 이혼이라는 말이 흔해졌다.

난 오은영 박사가 아니니 이 황혼의 이별에 명쾌하고 건전한 예방책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좀 엉뚱하지만 예전에 봤던 미국 드라마 <CSI 라스베가스>의 한 에피소드에서 내 나름의 불량한 답을 건네주려 한다. 이 드라마의 부검의는 이 조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한눈에 봐도 노인이다. 그 노인에게 한 젊은 직원이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한 사람과 오래 결혼생활을 유지했는지를 말이다. 결혼만큼 이혼이 흔한 미국에서 그야말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살고 있는 그 노선배의 비결이 궁금했던 것이다. 비결이 단순했는데 “7년에 한번 씩 따로 휴가를 간다.”였다. 물론 앞뒤의 대사가 더 있었겠지만 이 대사만은 잊혀 지지가 않았다.

간격과 하얀 우울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빈센트의 책 <낭만적 은둔의 역사>에는 ‘하얀 우울’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얀 우울은 정신병적인 검은 우울과는 달리 “자연의 가르침을 느낄 목적으로 한가롭게 은둔하는 것을 뜻”한다. 이 책에선 이렇게 고독의 역사를 19세기의 산책 열풍으로 서장을 연 뒤 혼자만의 여가 활동과 취미를 거쳐 디지털 시대의 고독의 양상과 의미까지 다룬다. 이 책에서 말하듯, 18세기까지 "혼자인 순간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지금 이 고독은 우리 모두의 전유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고독은 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한숨의 여유이자 그 숨을 내쉴 공간과 여정이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선택한 그 시간과 공간은 자기 연민과 궁상, 아무하고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고립감, 외로움으로부터 발생하는 검은 우울과는 다르다. 매일 함께 누울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도 가끔은 이 ‘하얀 우울’이 필요하지 않을까?

특별한 조건의 해안이나 바다에만 있는 녹색 등대와 노란색 등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등대는 흰색과 빨간색이다. 그 색은 바다에 떠다니는 배들을 향해 내는 메시지다. 빨간색 등대는 오른쪽에 장애물이 있으니 내 왼쪽으로, 흰색 등대는 왼쪽에 장애물이 있으니 내 오른쪽으로 오라는 표시다. 밤이면 빨간색 등대는 빨간색 불을, 흰색 등대는 초록색 불을 밝혀 이 메시지를 전달한다. 단순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이 메시지는 두 등대의 간격으로 인해 그 의미를 성취한다. 두 등대의 가치는 그 스스로와 두 등대의 적당한 거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결국 연인과 부부를 포함한 모든 사람간의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가져야 그 구실과 기능이 발휘되고, 또한 오래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당한 거리에서 발생하는 서로에 대한 예의가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존중할 때 더 견고해지는 관계가 있다. 그렇게 종종 서로의 다름과 거리를 허용하기에 오늘 저녁도 원만하게 고요하다. 한 사람은 딸과 수다를 떨며 게임을, 한 사람을 맥주를 홀짝이며 독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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