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림축구(少林足球, Shaolin Soccer, 2001)" 스틸컷.
영화 "소림축구(少林足球, Shaolin Soccer, 2001)" 스틸컷.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주성치를 좋아한다고 하면 대부분 의외라는 반응이다. 이 반응은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씨가 술을 못 마신다고 말할 때마다 상대가 보이는 반응과 닮았기에 그 반응에 이어지는 “술, 엄청 잘 마시게 생겼는데요?”, “아,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와 비슷한 대화도 이어진다. “주성치? 작가님은 그런 코미디는 안 볼 줄 알았는데요?”, “아, 그래요? 좀 심각하게 생겼나요?”

성급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성치 영화는 B급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정작 영화 속 주성치는 B급이 아니다. 오합지졸을 모아 축구 대회에서 우승하고, 사악한 고수를 물리쳐 공동체를 구하는 영웅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결론을 불쑥 내놓자면, 그의 영화, 특히 <소림축구>의 페이소스랄까, 코미디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주성치 감독에 B급 코미디 영화인데 배우 주성치는 천연덕스럽게 영웅의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난 주성치가 이 아이러니와 부조리의 효과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영리하게도 이 효과를 극대화 시킬 안티테제의 필요성도 알고 있었다고 본다.

주성치의 안티테제와 페르소나


오맹달은 그렇게 선택됐다. 주성치는 B급의 완성을 위한 소위 화룡점정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주성치의 페로소나다. 또 주성치의 안티테제다. 그럼 오맹달이 떠안은 안티테제와 페르소나란 뭘까? 우리에게 익숙한 正反合의 논리로 간단히 말하자면 반(反)의 역할이 안티테제다. 페르소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 영화에선, 특히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말의 맥락에서는 감독의 정서와 작품 세계를 대신하며 세상에 드러내어 주는 특정 배우를 일컫는다. 봉준호 감독의 송강호처럼 말이다.

정리하자면, 오맹달은 주성치에게 있어서 이 두 역할을 모두 감당한 배우다. 주성치가 영웅일 때는 소시민으로, 모험의 여정에 발을 들여 놓을 때는 그 모험의 조력자로, 주성치가 코미디를 실현할 때는 그 코미디를 살리는 현실적 존재를 연기 했다. 주성치가 출연하거나 감독한 영화에 출연한 모든 여배우들이 원 없이 망가지면서 주성치와 함께 코미디의 인공미를 구축했다면 오맹달은 그 인공미를 독보이게 하는 일상성을 도맡아 왔다.

영화 소림축구에 출연했던 오맹달(맨 오른쪽)의 모습.
영화 소림축구에 출연했던 오맹달(맨 오른쪽)의 모습.

그렇게 20년 동안, 오맹달은 주성치의 코미디에서 그 코미디에 일상의 빛을 비추는 흔들림 없는 거울, 근거율의 역할을 했다. 희극을 눈부시게 하는 현실의 법과 규칙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야전과 영원>에서 근거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절대적 준거>를, <성스러운 거울>을 상연해야 한다. 개개의 주체를 생산하기 위해서. 그 인형들이 아슬아슬하게나마 살 수 있도록.”이라고. 즉 비정상의 의미는 정상이, 정상의 의미는 비정상이 확보해준다. 주성치 코미디의 구조로 풀어 말하면 맘 편히 망가지며 코미디를 구사하고 그것이 의도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그것을 그것답게 만드는 절대적 기준, 흔들림 없는 정상성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맹달은 이 근거율이 되기 위해 주성치와 함께 한 거의 모든 영화에서 거의 똑같은 모양새로 나온다. 콧수염, 짧은 머리, 한결 같은 체형으로 형성 된 그 변하지 않는 육체의 역할은 정상이라는 기준의 역할, 근거율의 현존(現存)의 자리매김, 그 자체다.

<소림축구>라는 이상한 이야기


<소림축구>에서 오맹달은 저 변함없는 외모로 축구라는 세계의 근거율을 맡았다. 청춘을 받쳐 배운 쿵푸의 근거율이 전혀 쓸모가 없어, 현실의 근거율에 맞춰 살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근거율, 축구를 가르친다. 그 축구의 세계에서 한 때 황금발이라 불리었으나 그 세계의 규칙을 어기고 실패한 사람이 쿵푸라는 근거율을 끌어들여 다시 그 세계로 들어가 성공한다. 결국 쿵푸도 축구를 만나, 축구도 쿵푸를 만나 서로를 구하는 이상한 이야기가 <소림축구>다.

이 이상한 이야기는 미(美)와 추(醜)가 공존하는 ‘무이’라는 여주인공에 용해되어 함축적으로 보여 진다. 우리 모두 이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무엇이 됐든 하나의 근거율에 의지해 살고 있음을, 그래서 자신을 더 완벽하게 보여줄 다른 세계와 그 세계의 근거율을 만나면 더 나은 자신을 만날 수도 있음을 말이다. 불교적으로 얘기하자면 무문관(無門關)의 가르침과 비슷하지 않을까? 놓으면 죽을 것 같은 절벽에서 손을 떼고 다른 깨달음의 문, 개문(開門)의 가능성을 향해 삶을 던지라는 그 가르침과 말이다. 그래서 좀 더 생각을 밀고 나가면, 궁극적으로 주성치의 <소림 축구>는 근거율, 즉 한 세계의 규칙을 초월할 수 있는 주체의 가능성을 나름의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그렇게 <쿵푸 허슬>로 이어진다.

그러나 <쿵푸허슬>엔 오맹달이 없었다. 이 후, 주성치의 다른 영화에 출연이 논의 됐으나, 오맹달은 작년 이맘때 죽어 아내의 고향인 말레이시아에 묻혔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이 남게 된다. 이제 주성치는 안티테제로 누구를 부를까? <쿵푸허슬> 이후 주성치는 감독과 배우를 겸하지 않고 있다. 감독을 한 영화도 <미인어>와 <신희극지왕>정도다. 혹시 그의 코미디를 완성시켜줄 안티테제를 아직 못 찾은 건 아닐까? <쿵푸허슬>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산 시켜 맡겼던 그 안티테제의 역할을 온 몸으로 지탱해줄 단 한 사람을 아직 못 찾은 건 아닐까?

오맹달의 빈자리


많은 팬과 평론가들은 주성치 연기를 보기 힘든 이유와 그가 제작하거나 감독한 영화가 드문 이유를 그의 밖에서 찾는다. 중국 정치 상황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코로나19나 개인적인 경제 상황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난 주성치가 아직 오맹달과 같은 이를 못 찾아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맹달의 위치에 딱 들어맞는 누군가를 아직 못 찾았기에 그의 예술 세계가 아직 방황 중인 건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최소한 영화에서만큼은 B급은 A급보다 못해서 B급이 아니라 A급이 아니어서 B급이다. 언젠가 이 칼럼에서 다룰 고봉수 사단의 영화나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세상에 꼭 필요한 B급으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킬링타임용이라는 말은 종종 영화의 수준을 비하할 때 쓰이지만 유럽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지루한 영화들의 작품성은 저 수많은 B급과 대조가 있었기에 그나마 눈에 들어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주성치와 오맹달과 같이 대체할 수 없는 존재에게 B급이라는 단어는 계급이나 위계를 나타내는 접미사가 아니라 그저 고유 명사에 불과하다.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저 엄혹한 근거율이라는 법칙, 그 법칙에 의존하는 사회는 그렇게 제 자리에서 역할을 하는 누군가의 수고 때문에 그 기능을 제대로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다 각자의 재주를 찾아 각자의 자리에 들어가 제 역할을 하는 존재다. 한옥의 미학이 결구(結構), 즉 이음과 맞춤에 있듯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 또한 서로의 잘남과 못남의 맞물림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주성치의 영화에서 조연 오맹달의 자리는 그 크기와 상관없이 비어 있다. 그래서 어쩌면 앞으로의 주성치 코미디는 영원히 미완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저 빈자리를 응시하며 오맹달을 추억하는 나 같은 관객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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