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다이안 레인(Diane Lane). (사진=공식인스타그램)
배우 다이안 레인(Diane Lane). (사진=공식인스타그램)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영화관은 딸 방학 때, 어린이 영화를 보러 갈 때나 간다. 아내하고도, 혼자서도 거의 가질 않는다. 전에도 썼듯이 단관 영화관 시절의 향수가 멀티플렉스로 가는 마음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화 채널은 본다. 채널이 많다보니 이리저리 돌리다보면 저절로 향수에 젖어 채널 고정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도 리모컨을 조용히 테이블에 내려놓게 만드는 영화다.

다이안 레인이 북치고 장구 친 영화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그 유명한 다이안 레인, 감독은 <48시간>, <레드 히트>, <라스트맨 스탠딩>등을 만든 8, 90년대 액션 영화의 거장 월터 힐이다. 참고로 월터 힐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제작과 각본에 참여할 정도로 영화 업계에선 다재다능한 사람인데, 이 월터 힐의 재능이 만개하던 40대 초반, 다이안 레인의 미모가 절정이던, 스무 살이 채 안 됐을 때 만든 영화가 이 영화다. 남자 배우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데다가, 여러 가지 과한 설정, 시대와 도시의 배경의 모호함으로 인해 <북두의 권>같은 만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눈에 띄는 단점과 이렇다 할 장점이 눈에 안 들어와도 이 영화는 끝까지 볼 수 있다. 다이안 레인으로 시작해서 다이안 레인으로 끝나는 덕분이다. 가수로 분한 다이안 레인이 콘서트에서 열창하는 장면이 앞뒤에 배치되어 있는 덕분에 극 중 연극적인 액션 장면과 뻔하디뻔한 이야기조차 폼 나게 기억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단적으로 말하면 리즈 시절의 다이안 레인이, 요즘 청춘들 말로 그야말로 하드 캐리 한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대표작으로 다른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겐 단연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 영화다.

서서히 나이 들어가는 스타


다이안 레인은 책받침 스타였다. 피비 케이츠나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 같은 그런 배우였다는 말이다. 이 말이 배우에겐 칭찬이 아닐 수도 있는데, 소위 연기를 잘하는 배우, 배우가 생업인 사람이라기보다는 외모가 돋보이는 스타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 또한 그녀의 이름만 보고 영화를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녀의 영화 몇 편을 스쳐봤는데, <저지 드레드(1995)>, <언페이스풀(2002)>, <퍼펙트 스톰(2000)>, <맨 오브 스틸(2013)> 등이 TV로 얼핏 본 그녀의 출연작이다.

이 영화 중에서 팬인 나를 제일 실망시켰던 영화는 <맨 오브 스틸>이었다. TV로 처음 보는데, 다이안 레인이 너무 늙게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엔 <퍼펙스 스톰>에서 거의 비중도 없이, 그것도 어부의 평범한 아내의 역할로 나왔을 때도 마음이 착잡했었다. 나의 스타 다이안 레인이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고, 닳고 닳은 청바지에 촌스런 체크 셔츠를 입고 나오다니, 하고 장탄식을 했었다. 그러나 그건 예쁘게 나온 편이었다. 슈퍼맨의 엄마로 나온 다이안 레인은 그냥 미국 중서부 촌구석의 중년 여인 그 자체였다. 심지어 이 엄마 역할이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뒤이은 DC 코믹스의 시리즈인 <저스티스 리그>에도 계속 슈퍼맨 엄마로 나오는 바람에 세월의 흐름에 맞춰 자신의 외모도 더 늙게 바꿔갔다.

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였나요?


이 칼럼을 쓰면서, 그 때의 충격들이 떠올라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스틸 컷을 찾아봤다. 십년 터울로 등장한 그녀는 자연스레 나이를 먹고 있었다. 많은 배우들이 세월과 싸우면서 젊음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동안 그녀는 세월과 동행하는 법을 터득한 느낌이었다. 서른엔 서른답게, 마흔엔 마흔답게, 쉰엔 쉰답게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보여줬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무대 위에서 열창하던 시절의 자신은 저 청춘의 뒤안길에 남겨 놓고 오늘에 충실하며 살고 있었다.

그렇게 나이 든 내 스타의 사진을 보다보니, 마치 사진 속의 다이안 레인이 묻는 것 같다. “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였나요?”하고 말이다. 난 “글쎄요.”하고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 그때 좋았었지.”하는 시절이 생각이 안 났다. 결국 지금이 제일 좋은가보다 하고 스스로 설득해버렸다.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나니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그 유명한 대사가 생각났다. 대사의 상황은 이렇다. 강백호가 산왕고와의 시합에서 코트 밖으로 나가는 루즈볼을 잡기 위해 몸을 던진 뒤 등 부상을 입고 교체 당한다. 경기에 뛸 수 없는 상황, 강백호는 다시 코트로 나가고 싶지만 KFC 치킨 영감님을 닮은 감독이 말린다. 그 때 강백호가 감독님한테 이런 말을 한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영화 언페이스풀(Unfaithful, 2002) 스틸컷.
영화 언페이스풀(Unfaithful, 2002) 스틸컷.

다이안 레인은 80년대와 90년대, 즉 여배우로서 가장 아름다운 이삼십 대, 그래서 대부분의 여배우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기엔 평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역할의 비중도 크지 않았고 연기력 또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평단의 주목을 받은 건 2002년 <언페이스풀>로였는데, 그녀 나이 마흔을 코앞에 뒀을 때였다. 이 영화로 뉴욕비평가 협회와 전미비평가 협회의 여우주연상을 받고,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러나 그 이후, 그녀가 큰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적은 없다. 그저 그 뒤로도 그녀는 나이에 걸 맞는 배역을 맡으며 묵묵히 연기가 생업인 배우로 살아가고 있다.

나잇값과 리즈시절


그녀는 그야말로 제대로 나잇값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잇값은 영어로 “Act of your age.”다. 미국인들은 종종 “not your shoe size.”를 함께 붙여, “어이 나잇값 좀 해, 네 신발 사이즈가 나이라고 착각하지 말고.”하고 말한다고 한다. 때로는 그 반대로 “Act of your shoe size, not your age.”하고 말하는데,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마음만은 청춘” 쯤으로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철없는 놈이 안 늙어.”하며 남자들이 할아버지가 된 뒤에도 천지분간 못하며 젊은 시절처럼 사는 친구를 걱정 반, 부러움 반 섞어 말할 때 쓰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겠다.

다이안 레인은 저 두 종류의 영어 표현에 딱 들어맞게 사는 듯하다. 외모는 나이에 맞게 흘러가도록 놔두었지만 연기와 역할에 대한 도전 정신과 열정은 더 뜨겁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열정이 있다면, 나이가 들수록 업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고 깊어진다면 할머니가 돼서도 연기를 하고 있는 다이안 레인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한 장면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묵묵히 연기 장인의 길을 걸어, 결국엔 대가가 된 그녀를, <미나리>로 황혼의 전성기를 맞은 윤여정 선생님의 미국 버전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 흰머리가 대화의 화제가 될 때마다, 감독은 “마, 그냥 놔두소. 그게 작가님 카리스마 아닝교.”하곤 한다. 물론 나도 내 흰머리를 좋아하고 나이 드는 걸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이제 막 십대로 접어든 딸이 혹여나 애비의 흰머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마음이 쓰일 뿐이다. 정말 두려워하는 건 더 이상 글이 안 써지는 것이다. 그보다 더 두려워하는 건 더 좋은 글을 쓰겠다는 열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현재 내 꼴은 에누리 없이 나잇값을 하고 있겠지만, 열정만은 딸의 나이처럼 어리게 유지하려 한다. 다이안 레인처럼, 윤여정 선생님처럼, 최근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은 오영수 선생님처럼 세월의 흐름은 받아들이되 열정의 불씨는 더 크게 지피며 살려한다. 또 누가 아는가? 내 리즈 시절이 좀 더디게 오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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