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머니볼(Moneyball, 2011)" 스틸컷.
영화 "머니볼(Moneyball, 2011)" 스틸컷.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연말연시, 어김없이 신년운세를 봤다. 거래하는 은행 사이트마다 이런 정보를 제공해주니, 두세 개 은행 사이트를 점집 순례하듯 돌아가며 봤다. 자료의 수집과 분석이 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광고와 PR 분야 종사자가 신년운세 잘 나왔다고 애처럼 좋아하는 꼬락서니를 보다보니, 숫자와 자료만으로는 인생을 다 알 수 없고, 그렇다고 온전히 운에만 맡길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인생이란 결국 그 간극 사이에 가로 놓인 미로를 헤쳐 나가는 것임을 깨우쳐주는 영화 한편이 생각났다.

가난한 구단의 생존법


<머니볼>은 일전에 칼럼에서 다뤘던 <드래프트 데이>처럼 스포츠 영화지만 스포츠 장면이 별로 안 나오는, 선수가 주인공이 아닌 단장이 주인공인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연고지의 인구가 작아서 소위 스몰 마켓으로 분류 되는 곳에 둥지를 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Oakland Athletics) 야구단의 이야기다. 이런 팀들의 운영은 뻔하다. 주로 어린 유망주를 잘 키워서 명문 팀에 비싸게 팔아 구단을 운영한다. 오클랜드 야구단 또한 그렇게 운영 됐다. 인구가 적은 연고지, 작은 구장, 한정 된 예산, 노후 된 시설을 운명처럼 껴안은 채 한 시즌, 한 시즌 운영해 왔다.

물론 좋은 시절도 있었다. 70년대엔 3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적도 있다. 2001년 시즌도 괜찮았다. 그 덕분에 팀의 주축 선수들이 다른 팀들의 관심을 받게 되고 단장은 팀 사정상 그 선수들을 비싼 값에 팔게 된다. 이후 통계 전문가를 기용하여 팔아버린 선수들의 공백을 메울 여러 선수들과 계약해서 2002 시즌을 운영한다. 물론 영화는 실화여서 여느 스포츠 영화처럼 그 시즌에 우승을 하거나 하진 않는다. 시즌 후반부 거짓말 같은 20연승을 달려 지구 우승을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선 그보다 더 거짓말처럼 탈락한다.

영화
영화 "머니볼(Moneyball, 2011)" 스틸컷.

숨겨진 인생의 비밀


얼핏 보면 효율적 구단운영의 새바람을 몰고 온, 통계로 무장한 선구자의 전기영화 같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며 은근히 전하는 인생의 비밀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가치가 있다.”아닐까? 스타 선수를 팔아치워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데려온 선수들의 면면을 보자. 데이빗 저스티스는 한물간 베테랑이다. 스캇 해티버그는 부상을 당해 더 이상 2루 송구를 할 수 없어 은퇴의 기로에 섰던 포수였고, 제레미 지암비는 문란한 사생활 문제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선수였다. 채드 브래드퍼드는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기피하던 언더핸드 투수였다. 그러나 빌리 빈은 이 선수들을 요긴하게 써 먹는다. 데이빗 저스티스에게는 팀의 리더를 맡겼고, 스캇 해티버그와 제레미 지암비에게는 누구보다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한 출루율을 맡겼다. 브래드퍼드에게는, 역설적으로 폼이 드물어 상대할 기회가 적은 유형의 투수였기에 경기 중간에 나와 상대 타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중간 계투를 맡겼다.

이 영화엔 이보다 더 큰 인생의 비밀이 있다. 바로 야구도, 인생도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출루율의 공백을 메우고, 중간 계투를 해줄 투수를 찾아내고, 좋은 감독과 베테랑의 조화로 시즌 말미 기적의 20연승을 달렸지만, 거기까지였다. 뭘 잘 못 한 건 없다. 상대가 잘 했고, 몇 게임 졌을 뿐이다. 원래 야구도 인생도 허구연 해설자 말처럼, 그렇게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다.

인생도 야구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인해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안 될 수 있음을, 역설적이게도 세이버 매트릭스라는 야구 통계 기법을 팀 운영에 도입한 빌리 빈 단장이 몸소 보여준다. 그는 자기가 경기를 보면 진다는 징크스 때문에 단 한 번도 팀의 홈경기를 구장에서 직관하지 않는다. 손수 차를 몰고 나가 텅 빈 부두에서 보거나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며 본다. 심지어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기에 간만에 큰 맘 먹고 몰래 직관하지만, 점수 차가 좁혀지자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기도 한다.

모든 선수들이 빌리 빈 단장과 같다. 비시즌, 열심히 동계 훈련을 하고 몸을 만들어 다음 시즌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내지만 시즌 내내, 게임 하나하나 치를 때마다 지키는 징크스가 있다.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에도, 타석에 들어서도 사소한 루틴을 지킨다. 라파엘 나달의 물병 놓기와 서브 전의 그 동작들의 연쇄처럼 말이다. 그걸 하지 않는다고 게임이 잘 풀리거나 안 풀리거나 하지 않는 다는 걸, 그것들이 게임의 직접적인 요소가 아님을 그들도 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이 게임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통제함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그것들을 해야만 한다. 철저한 준비와 기묘한 징크스의 동거, 야구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새해를 맞이하거나 나이의 앞자리 수가 바뀌는 인생의 전환점에는 여러 다짐을 하곤 한다. 원대한 목표를 정하고 최적의 대안을 찾아 놀라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수립 된 계획을 실천하는 건 쉽지 않다. 설령 계획을 빠짐없이 실천하더라도 원하던 목표 달성에 실패하기도 한다. 예측하지 못했고,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거짓말 같은 20연승도, 가을 야구 탈락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성공이 온전히 내 준비와 재주에만 달린 것이 아니듯 실패도 온전히 내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열심히 준비해도 면접에 떨어지고, 완벽해 보이는 프로젝트도 밀릴 수 있다. 물론 그때, 그 회사에 들어갈 실력이 안 돼서, 능력이 모자라서 취업이 안 됐을 수도 있다. 상대방 프로젝트가 더 뛰어나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냥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었거나, 프로젝트 발표 일에 상대방 프로젝트 발표자가 유독 컨디션이 좋아서 안 됐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 절실히 필요한 인재이지만 아직 그 회사가 당신을 못 찾았을 수도 있고, 당신이 그 회사를 못 만났을 수도 있다. 잠시 서랍 속에 묻혀뒀던 프로젝트가 얼마 후엔 시기와 상황이 맞아 떨어져 팀과 회사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떤 일에 도전하기 위해 오래 준비하고 실행 한 후엔, 성공의 예감에 들뜨지도 말고 실패의 불안에 잠 못 이룰 필요도 없지 않을까?

올 해의 봉우리를 올라갈 뿐


이렇게 무책임하게 써 놓으면, “그럼 적당히 노력하고 결과는 운에 맡긴 채 때와 사람을 기다리라는 거냐? 네가 동남풍을 기다리는 제갈공명이냐?”하는 반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무책임하게 반론하자면,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다. 선수 시절 촉망 받던 빌리 빈은 메이저리그에 문턱에도 못 가보고, 구단 프런트의 길로 들어선 후 단장이 됐다. 그 때의 최선의 선택이 오늘의 최고의 결과를 보장해주지도 않고, 그때의 최악의 선택이 오늘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게 야구고, 인생이다.

흰머리가 늘고, 나이가 들수록, 그 덕에 인생의 비밀에 조금 더 다가갈수록 김민기 선생님의 <봉우리>가 더 깊게 들린다. 내가 아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올랐지만, 올라보니 그 봉우리는 그저 작은 고갯마루였고, 길은 다른 봉우리로 계속 이어진다는 그 노래 말이다. 봉우리 같은 하루하루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우리에게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위로한다.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하고. 이 노래, 올 한 해, 각종 통계에 자신의 육감을 얹혀 선택한, 그 당면한 생의 봉우리를 묵묵히 오를 무명의 동지들과 함께 들으려한다.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들을이에게, 이런 말을 추신처럼 덧붙인다. 20연승 같은 기적의 스토리가 멈췄다고 실망할 것 없다고, 시즌도 인생도 계속 된다고, 산에 오르면 그때서야 비로소 산맥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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