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세계경영
DJ 시절 해외유랑 5.8년 후 ‘황혼 귀국’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나의 경제기자 출발시점부터 수출스타로 대한민국 성공 브랜드로 꼽힌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에 관한 이야기가 겹겹으로 쌓였다. 그는 ‘박정희 수출입국’ 시대가 요구한 ‘성공모델’로서 ‘수출에 미친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일시 추락한 IMF 구제금융 시기를 맞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집권한 후 순식간에 그룹 해체, 파리 망명, 대우노조의 체포조 파견 보도 등 온갖 수모를 다 겪다가 몇 가지 곡절 끝에 2005년 어느 날 ‘70년대 수출노인’ 신분으로 귀국한 것이다. 이때 출판사 이지북(ez-Book)이 긴급 원고 청탁으로 ‘신문배달원에서 세계 최고 경영자까지’의 ‘김우중’을 발행했다. 조동성 교수, 작가 이문열, 경총 부회장 조남홍 씨 등과 함께 경제기자로 필자가 참여했다.

우리를 서글프게 만든 ‘황혼의 귀가’


필자는 해외 유랑 5년 8개월 만에 병색이 완연한 노인으로 귀국한 김 회장을 ‘우리를 서글프게 만드는 황혼 귀가’로 표현했다. 그 사이 몇 차례나 귀국하고 싶다는 뜻을 은밀히 전달했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정권 차원에서 귀국을 막았다가 뒤늦게 ‘중죄인 혐의’ 그대로 입국을 허용한 것이다. 이 때문인지 그가 입국한 인천공항은 포토라인이 무너진 채 온갖 고함소리와 몸싸움의 난장판, 꼴불견이었다.

김 회장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면서 시대를 앞서나가다가 천문학적인 분식회계, 은행 대출사기, 거액의 비자금 조성 혐의를 받았으니 경악할 지경이다. 대강 짚어보면 그는 5대주 6대양을 종횡무진하며 대한민국 수출입국 깃발을 세우다가 불청객 IMF를 맞고 보니 시대를 앞서간 선수(先手) 경영이 바로 패착으로 돌아온 꼴이었다.

김 회장은 DJ정권 출범에 상당한 헌금으로 공헌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김우중 리스트’설이 파다했고 정계 실력자가 “잠시만 해외로 나가 있으라”고 주문했다는 설도 있었다. 그렇지만 오랜 해외 유랑 끝에 귀국한 김 회장은 1.5평 독방에 수감되어 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다.

그 사이 이미 김 회장 스타일의 대우인과 대우 브랜드가 살아 있는 대우건설, 대우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대우인터내셔널 등은 이미 세계화의 우량기업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우 출신 386 운동권 그룹이 ‘김우중, 대우그룹, 한국경제’ 포럼을 개최하여 대우와 김 회장의 공과를 토론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김 회장이 조성했다는 엄청난 비자금은 정․관계 로비용으로 쓰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DJ 집권 시절 권력 내부에 많은 공범자들이 포진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지만 “대우그룹 해체에도 이들이 도움을 주기 보다는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가해자 역할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이 있다.

반면에 김 회장의 귀국은 “중죄인 혐의로 벌 받기 위해 자수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재계가 정치권에 헌금하고 비자금으로 로비해야만 했던 것은 시장 상인들이 조폭에게 신변안전을 위해 상납하는 것과 유사한 성격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 회장이 벌 받기를 각오하고 자수 귀국했다면 앞으로 수사와 재판 과정을 통해 세칭 ‘김우중 리스트’의 폭로를 두려워 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실로 DJ는 집권 초기에 김 회장을 적극 신임하여 전경련 회장을 맡게 했지만 얼마 뒤 토사구팽(兎死狗烹) 시킨 꼴이었다.

김우중 회장의 시대를 앞지른 ‘ 세계경영’ - 전용기에서 내려 생산 현 장으로 달려가는 당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김우중 회장의 시대를 앞지른 ‘ 세계경영’ - 전용기에서 내려 생산 현 장으로 달려가는 당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연중 일하는 취미, 특기가 목적인 총수


김우중은 수출 제일주의 시대가 낳은 영웅으로 총사령관격인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순간적인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시장과 상품을 개발하며 동시다발적으로 행동력을 보여준 천성의 세일즈맨이었다.

1970년대 초반 상공부 장관실에서 만날 수 있었던 김우중은 감청색 양복에 검은테 안경을 쓴 젊은이로 ‘한성실업’인지 ‘대우실업’인지 수출 담장자로 행세했다. 당시 수출장관 면담자가 줄을 서고 있었지만 장관이 새파란 귀공자 스타일의 김우중을 환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장관이 매달 수출실적에 목을 매달고 있을 때 새로운 시장과 수출실적을 들고 오는 그가 바로 귀빈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김우중이 해외를 다녀오면 경제기자들이 몰려가 취재 경쟁을 벌였다. 그의 세일즈 성과가 바로 경제면의 중요 기사였다. 그가 시대와 세월의 형벌을 받아 오랜 해외 유랑 끝에 “나라와 국민에게 사과하고 벌 받기 위해 귀국했다”고 했으니 1970년 이래 신화를 창조한 ‘젊은이들 우상’의 몰락을 보는 울적한 심정이었다.

필자의 소감으론 김우중은 연중 일이 취미이고 재미이자 목적이었다. 골프는 안 배우고 술도 못 배웠다. 서울역 건너편 대우센터의 김 회장 집무실은 금탑산업훈장에 이어 1억불탑, 3억불탑, 5억불탑 등 수출입국 훈장 진열대였다.

당시 상훈법상 수출유공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이 금탑산업훈장이었다. 총수출이 1억불을 넘고 매년 몇 배씩 늘어나니 달랑 금탑 하나로 ‘수출애국’을 달랠 수 없었다. 이에 상공부 박필수 상역차관보(장관 역임)가 한국정밀기기센터(FIC)에 의뢰하여 영구불변의 특수강을 소재로 ‘억불탑’을 제정했다. 정밀도 1천분의 1밀리로 가공한 억불탑은 매년 커져 종합무역상사들의 상 타기 경쟁을 촉발시킨 효과가 있었다.

대우는 섬유를 기반으로 종합무역상사가 됐지만 김 회장의 경영력이 평가되면서 부실기업이 생기고 산업구조조정 정책이 나올 때마다 국가 차원에서 맡기는 방식으로 자동차, 기계, 조선, 중공업 등에 진출하여 5대 그룹에 올라섰다. 새한자동차를 인수했을 때 “섬유 쿼터나 처리하던 대우가 자동차를 어찌 경영하느냐”는 질책이 나왔다. 이때 김 회장은 부평 자동차공장에서 침식하며 몇 달 만에 거의 ‘자동차 전문인’ 학습을 끝낸 모습으로 경제기자들을 만났다.

옥포조선소를 인수하여 대우조선으로 개편할 때도 거제조선소에서 침식하며 조선을 익혀 자신만만하게 경제기자들을 현장으로 초청했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기업인수 확대 경영으로 몸집을 키우던 대우가 대한전선의 가전사업부를 인수, LG그룹의 금성사와 삼성그룹의 삼선전자와 경쟁하겠다고 나섰다.

이때 “젊은 창업자가 겁도 없이 아무데나 무임승차 하려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어느 날 김 회장이 전자업계를 취재하던 필자를 불러 갔더니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전선 경영정상화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인수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방금 삼성그룹의 호암선생(이병철 회장)께도 인수 배경을 설명 드리고 양해를 구했다”면서 “앞으로 가전 3사의 경쟁을 통한 발전을 적극 보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수출 100억 달성 기념식 및 수출의 날 유공자 포상 시상식에서 김우중 대우회장과 박정희 대통령. (1977년 12월 22일
수출 100억 달성 기념식 및 수출의 날 유공자 포상 시상식에서 김우중 대우회장과 박정희 대통령. (1977년 12월 22일

시대를 앞지른 ‘세계경영’의 울분


김우중 신화의 대미는 ‘세계경영’으로 글로벌 경영에서 대한민국의 한 단계 성숙을 제시하려는 메시지였다. 이 무렵 한국의 경제성장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점차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 징후를 띠고 있었다. 국내 유명 기업인이 해외로 나가면 최상급 귀빈대우를 받았지만 국내로 귀국하면 거의 죄인 취급 상황이었다.

김우중 회장의 경우 냉전체제 붕괴 후 러시아나 동구권을 방문하면 국가 원수급 예우를 받는다는 사실이 전해왔다. 바로 김 회장의 ‘세계경영’ 성과라고 해석되었다.

그러더니 IMF가 오면서 김우중의 세계경영이 잘못됐다는 소문이 나왔다. 재벌개혁에 대해 김우중이 부정적이라는 지적과 함께 전경련 회장직을 맡은 후 정부 방침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DJ 권력 안팎에서 나온 모양이다. DJ정권 재벌개혁 사령탑인 이헌재 금감위원장 입에서 이와 비슷한 말이 나왔다. 이 위원장은 김우중의 경기고 후배로 한때 대우그룹에 근무하여 사석에서는 김우중을 형님이라고 호칭했었다.

그런데도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서 김우중 퇴진론을 그가 먼저 꺼내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때 김우중은 다소나마 명예롭게 퇴진하는 방안을 찾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이헌재가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배경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김우중이 이헌재의 공개 퇴진 압력을 받고 주변을 정리할 시간으로 정부와 채권단이 허용한 기간이 겨우 6개월이었다.

이 기간 내에 대우의 유동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김우중의 사재는 처분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대우경영이 정상화 되더라도 김우중은 완전 퇴진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김우중은 철저히 실패한 재벌총수로 내부 결론을 미리 내린 것이다. 그룹의 총부채 60조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해외에서 따로 빌린 돈이 100억 불을 넘는다고 했다. 이 같은 나쁜 소문이 급속 확산되면서 채권 금융기관이 신규 여신은 고사하고 만기 연장마저 거부했다.

1995-04-03, 한·불가리아 정상 만찬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김우중 전 회장과 악수 중이다. (사진=국가기록원)
1995-04-03, 한·불가리아 정상 만찬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김우중 전 회장과 악수 중이다. (사진=국가기록원)

‘김우중 신화’의 실패이자 ‘우리 시대의 실패’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우중을 취재했던 그때 그 시절의 경제기자로서 그를 어떻게 기록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우인들은 김우중이 DJ정권 하에 몰락하여 해외로 떠난 후 절망 속에 노무현의 참여정부를 맞았지만 그의 사면이나 부활을 기대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대우건설을 연간 1,600억 원의 흑자경영으로 전환시킨 남상국 사장이 임기 만료를 앞두고 노 대통령에게 연임 로비를 했다는 혐의로 자살하고 말았다.

노무현이 TV 회견을 통해 “공부 많이 하고 출세한 양반이…” 연임 로비했느냐고 비난했으니 남 사장이 울분을 못 이겨 한강에 투신한 것이다. 그렇지만 ‘김우중 없는 대우인들’은 그냥 죽을 수가 없었다. ‘김우중 정신’ ‘대우 정신’으로 울분을 토해냈다.

종합무역상사 ㈜대우는 대우인터내셔널과 대우건설로 분할되어 새롭게 출발했다. 대우중공업, 대우조선, 대우전자, 대우자동차도 워크아웃 운명을 거쳐 우량기업으로 매각 절차를 기다렸다. 이때쯤 되어 김우중에 대한 원성도 완화되고 그는 어찌됐던 한국과 한국인의 팔자를 고친 ‘수출스타’로 예우돼야 한다는 지적이 슬금슬금 퍼져 나왔다.

1970년대 수출입국 정책을 지휘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사람들’도 함께 회상되었다. 100억불 수출의 이낙선, 장예준 장관, 심의환 차관(뒤에 총무처 장관) 배상욱 차관(뒤에 체신부 장관) 등도 오랜 긴장과 과로의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당시 상역차관보 박필수(뒤에 상공부 장관), 유각종(동자부 차관), 노진식 상역국장 등도 모처럼 퇴임 후 영동고속도로 나들이 때 버스사고로 가고 말았다.

또 대우그룹의 수출 공적을 헤아려 보니 이우복, 홍성부, 최명걸, 윤영석, 이경훈, 김태구 등 대우인들과의 미운 정, 고운 정이 생각난다.

(말하기 어려운 고민 또는 우울감을 느끼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으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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