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1960년대) 대학진학 문제가 제기됐을 때 등록금 걱정 없는 육사에 지원하겠다는 생각으로 신체검사 기준을 알아보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대를 이어야 할 외동 자식이 군인이 되겠다는 말이냐”고 호통쳐서 포기했다. 

그 대신 어느 대학이든 사학과를 선택하겠다고 궁리하고 있을 때 당시 야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준비 중인 우돈규 변호사가 아버님을 찾아뵙고 “형님, 외 아드님은 제가 책임질 테니 정치학을 공부시키세요”라고 당부했다.
우 변호사가 종전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 아버님께서 조마면 담당 면책을 맡은 인연으로 친숙하게 왕래하는 사이였다. 이 때문에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교주이고 유진오(兪鎭傲) 박사가 총장이신 고려대학교 정외과를 지원하게 됐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 민족의 정서를 노래한 청록파 시인 조지훈(본명 동탁) 은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웠고 독학으로 혜화전문학교를 마쳤다. 1939년 「고풍의상」 「승무」, 40년 「봉황수」로 「문장」지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사진=연합뉴스)
청록파 시인 조지훈. 민족의 정서를 노래한 청록파 시인 조지훈(본명 동탁) 은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웠고 독학으로 혜화전문학교를 마쳤다. 1939년 「고풍의상」 「승무」, 40년 「봉황수」로 「문장」지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사진=연합뉴스)

입학 직후 수강 신청 때는 집안 형님이신 배병창 국어 선생님(김천고)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은 시인 조지훈 교수의 교양과목이 눈에 띄어 즉각 신청했다. 배병창 선생님은 1959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을 계기로 조지훈 교수님과 교우 관계가 깊어졌다.

조 교수님의 강의는 인기 만점으로 수강생이 넘쳤다. 강의실 앞 좌석은 여학생들이 빽빽하게 차지하고 남학생들은 뒷자리를 채웠지만 좌석이 모자라 후미는 서서 강의를 듣는 기이한 광경이 연출됐다. 당시 조 교수님께서 갈색 두루마기에 고무신 신고 올백 헤어스타일로 첫 강의를 시작하던 날, 핀 마이크의 목청이 워낙 커서 석탑 본관 넓은 강의실 바닥과 천장까지 쾅쾅 울린 기억이 새롭다.

첫 강의 머리에 교수님은 칠판에다 내 이름은 “조동탁(趙東卓)”이오 라고 큼직하게 써 놓고는 “왜 조지훈(趙芝薰)으로 불리는가요”라고 스스로 자문자답하듯 소개했다.

“오늘 같은 4월 쌀쌀한 날씨에 온돌방 아랫목에 앉아 막걸리 몇 사발 마시면 뭣이 훈훈하게 녹아내려 ‘조지훈’이 됐지요”라는 말씀이다. 고교 시절 모두가 천하의 대시인으로 존경, 추앙해온 교수님께서 음담패설을 하시려나 싶어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교수님은 웃지도 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강의를 진행하여 금방 시간을 훌쩍 넘겼다.

위스키 시험장의 음주특강과 문학지망 여대생


강의 끝자락에는 “술 생각나는 학생은 신설동 로터리 위스키 시험장으로 오세요”라고 일러 주셨다. 실제로 몇 명이 술집으로 찾아가니 교수님은 벌써 문학지망 여대생 여러 가운데에 앉아 ‘음주특강’하고 있었다. 옆 좌석에 앉아 살짝 들으니 교수님과 여대생들은 오래전부터 대화가 깊은 사이였다.
이승만 대통령 흉상이 새겨진 100환 동전 한 닢에 국산 위스키 한 잔이었다. 우리가 겨우 두 잔을 홀짝 마시고 우두커니 지켜보니 교수님이 동전 몇 닢씩 보내주어 더 마실 수 있었다. 이어 2~3차는 청계천 변에 무수히 많은 이동식 포장마차로 진출하여 역시 여대생들과 함께 해삼, 멍게를 안주로 막걸릿잔을 주고받았다. 여기서도 교수님의 배려로 막걸리를 얻어 마시다가 통금이 걱정되어 좀 일찍 버스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반면에 교수님과 여대생들은 계속 ‘음주특강’에 취해 통금을 어겨 끝내 자택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돈암동 가는 길 여관방에 투숙한 날이 많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로부터 대학 졸업 후 전방 군 복무 2년 마치고 신문기자가 되어 1960년 4월 ‘4월 고대 혁명’ 취재차 모교를 방문하니 교수님은 벌써 오래전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이다. 아마도 ‘그때 그 시절’ 문학지망 여대생들의 극성으로 1년 내내 과음을 되풀이한 탓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지금껏 모교 교정에는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活火山)이여…’라는 교수님의 ‘4·18 기념’ 시탑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위스키 시험장과 청계천 변 포장마차를 순회한 문학 지망생들은 모두 유명 여류작가가 되어 많은 작품을 신문에 발표했다. 당시 교수님으로부터 술을 얻어 마신 우리네는 지조론(志操論)에 관해 질문했다가 “기생이나 정치인들에게서 지조를 찾지 말라”는 당부를 들은 기억이 있다. 당시 자유당 말기로 매일같이 신문에는 정치인들의 변절과 타락상이 보도되어 정치인들의 지조가 마치 기생에 비유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한편 조 시인 집안의 지조와 절개는 선대로부터 대물림되어온 ‘반 벼슬’ 선비정신이었다. 선친 조헌영(趙憲永) 님은 동경 유학한 수재로 민선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부의장으로 활약하다 6·25때 납북되고 말았다. 평양에서는 얼마 뒤 김일성의 남침 전쟁이 패배로 끝난 후 남로당계와 월북자, 납북자 등이 무더기로 숙청될 때 조헌영 님도 ‘나쁜 성분’으로 분류되어 처형 대상이었다. 그러나 동경 유학 시절 친구인 창녕 만석꾼이자 김정일의 애첩 성혜림의 부친 성유경(成有慶)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김일성의 막내딸 성혜림은 이미 딸을 출산한 유부녀였지만 김정일의 눈에 띄어 강제 이혼 후 김일성의 후계로 지목된 김정일과 동거하면서 폐족으로 몰리고 있던 성씨 가족들이 김정일의 저택에 입주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이때 성유경 씨가 친구 조헌영을 자주 불러 노후를 함께 보냈다고 한다. 조지훈 부친 조헌영 님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장인이기도 했다. 성유경 씨의 장남 성일기 씨는 6·25 직전 모스크바 유학 목적으로 미리 월북했지만 유격대 투쟁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특수훈련을 거쳐 김일성의 남침 직전에 강원도 산악지대로 침투했다가 6·25 전쟁이 정전될 때까지 동해안 유격대 사령부 참모장으로 ‘신출귀몰’하다가 체포됐지만 끝나 살아남아 지금도 서울 서대문구 연신내에서 80대 노후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회고록 '배병휴 경제기자 일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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