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바퀴하나 더 달게…’ 애원
창업주 학산 김철호 이야기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이 1969년에 라이센스 방식으로 생산한 세바퀴 소형화물차 ‘삼륜용달T-600’(제작년도 1969년, 전장 3295㎜, 중량 520㎏). 이 화물차는 기름이 적게 드는 경제적인 차로 크게 환영받았으며, 69-74년간 7742대가 생산되었다. 2001년 6월 사진. (사진=연합뉴스)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이 1969년에 라이센스 방식으로 생산한 세바퀴 소형화물차 ‘삼륜용달T-600’(제작년도 1969년, 전장 3295㎜, 중량 520㎏). 이 화물차는 기름이 적게 드는 경제적인 차로 크게 환영받았으며, 69-74년간 7742대가 생산되었다. 2001년 6월 사진. (사진=연합뉴스)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1970년 자동차 국산화 초기, 일부 경제기자들 사이에 “강자에게 쫓기는 약자인 기아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담합했던 사실을 고백한다.

당시 토종이자 전형적인 민족기업형인 기아산업이 국산화에 가장 앞서가고 있는데도 주무부인 상공부가 무시하고 푸대접하는 꼴로 비쳤다. 아마도 현대-포드, 새한-GM, 아시아-피아트 등 외래 브랜드를 업고 주무부 로비에 나선 자동차 회사들은 외세의 엄호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2017년 8월 21일, 광주광역시청 1층 시민숲에서 열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사진전에  1973년식 브리사 택시가 전시돼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2017년 8월 21일, 광주광역시청 1층 시민숲에서 열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사진전에 1973년식 브리사 택시가 전시돼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발 바퀴하나 더 달게…’ 애원


기아산업의 고독한 투쟁이 경제기자들 눈에 애처롭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기아는 두 바퀴 자전거로 출발하여 세 바퀴 3륜 자동차까지는 쉽게 갔지만 4바퀴 승용차는 10년 공들여 가장 먼저 국산 모델을 개발했지만 정부의 제조 허가를 받지 못했다. 여기에 힘 있는 경쟁사들의 압력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기아인들이 늘 상공부를 찾아와 “제발 바퀴 하나만 더 달게 해 줍소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비쳤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일까.

1974년 식목일 무렵 기아차 첫 국산 모델로 개발한 승용차 브리사(Brisa)의 시판 허가를 받아낼 수 있는 황금기회가 절로 찾아왔다. 수원에서 식목일 행사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기아차 소하리공장을 급히 방문했다. 아마도 급한 용변 때문이었을 것이다.

1966년 4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기아산업 시흥공장을 시찰중인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1966년 4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기아산업 시흥공장을 시찰중인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이날 근무 책임자인 김선홍 상무가 경비실의 급보를 받고 작업복 차림으로 내려가니 대통령이 공장 내부를 둘러보다가 현장에 보존되어 있는 ‘브리사’를 보고 “웬 차냐”고 물었다. 이에 김 상무가 “국내 첫 국산화 모델이나 아직 정부의 제조 허가를 받지 못해 시판을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이 김정렴 실장한테 “웬 까닭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자 그로부터 6개월 뒤 허가가 나와 불티나게 팔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기아의 시련과 고통은 반복된 운명이었다. 10.26 국변으로 박 대통령이 서거한 후 국보위가 중화학공업 과잉 투자를 조정하면서 자동차 업계의 통폐합 작업으로 기아는 승용차 부문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대신 승합차 하나만 남겨 ‘봉고신화’라는 이름으로 겨우 생존할 수 있었다.

국보위의 강제 투자조정은 ‘반시장’으로 성공하기 어려웠다. 기아가 승용차 시장에서 추방된 지 6년 만에 통합계획이 백지화 되어 다시 새로운 승용차 모델 ‘프라이드’로 재기했다. 봉고승합차 후속 모델로 ‘베스타’도 인기였다. 그로부터 기아자동차의 진로가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굴곡과 고비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창업주 김철호 회장이 지병으로 투병하며 1973년 6월에 완공한 소하리공장은 연산 2만5천대 규모에 불과했다. 이에 1984년 들어 아산만 산업기지에 100만평 규모의 부지를 어렵게 확보하여 종합 자동차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수도권정비위원회가 인접 군사용 시설 등을 이유로 공장입지 허가를 몇 차례나 보류시켰다.

3저 호황이 곧 다가오고 있는 시기로 제조업 공장 확장이 시각을 다투고 있는 시기였다.

어느 날 청와대가 기업인들을 초청하여 기아 김선홍 회장이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하며 “각하, 자동차 수출 공장 확장이 시급하오나 수도권정비위가 공장입지 허가를 보류시켜 애로가 많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이에 전 대통령이 “수출용 공장 건설은 급한 것 아닙니까. 내 머리털이라도 뽑아 가발 수출을 해야 할 판국인데 보다시피 내겐 뽑을 머리카락이 없으니…”라고 한바탕 좌중을 웃긴 다음 옆에 있는 김재익 경제수석한테 “여보, 수출용 공장 건설한다는데 좀 알아보시오”라고 지시하여 수도권정비위의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아가 죽다가 살아난 이야기가 ‘아직 갈 길이 멀다’라는 제목의 김선홍 회장을 만난 이야기다. (1993.5, 매경출판) 당시 기아산업은 드물게 종업원이 주인이었다. 봉고신화 당시 창업자 직계가 소유한 지분은 고작 2.73%인 반면에 종업원 지분은 9.27%, 김선홍 회장 지분도 0.06%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지분구조는 창업주인 김철호 회장의 구상이자 기아정신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기아는 끝내 종업원 주인회사로 영속하지 못하고 그 뒤 몇 고비를 거쳐 현대차 계열로 편입되어 팔자를 고치면서 창업주 인맥은 사라지고 말았다.

1962년 8월 15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에게 기아산업 김철호 사장이 리어카 500대를 기증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2년 8월 15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에게 기아산업 김철호 사장이 리어카 500대를 기증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창업주 학산 김철호 이야기


기아차 창업주인 학산(鶴山) 김철호(金喆浩)는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망한 1905년 1월,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학산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3.1 만세운동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김철호 소년은 일제의 식민지 어린 백성으로 진로가 막막해지자 궁리 끝에 일본 오사카로 밀항하는 길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막노동으로 전전하다 어느 철공소 견습공으로 채용되니 적성에 딱 맞았다. 배우지 않고도 손재주가 뛰어났으니 고용주가 각별히 신뢰하여 지배인으로 발탁됐으니 출세였다. 그러나 동향 출신 독립투사 한분을 숨겨주다가 들통이 나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그 사이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볼트, 너트를 생산하는 삼화제작소를 설립, 자립의 길을 개척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갑자기 전쟁기운이 돌면서 군수산업이 번창했다. 이때 삼화제작소도 덩달아 호황을 맞아 직원 수가 200명으로 불어나 24시간 풀가동하기에 이르렀다.

얼마 뒤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니 곧 태평양전쟁이었다. 이때 일제가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삼화제작소도 군수용 선박부품을 생산하는 군수산업으로 편입됐다.

이렇게 사업 규모가 확장되고 있었지만 김철호의 사업 안목은 종전 뒤의 ‘평화산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필생의 사업 종목인 자전거 산업을 계획하여 동생 김명호에게 맡겼다. 자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국내에서 자전거를 생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에 삼화제작 사업을 대강 정리하여 단신 귀국했다.

한창 젊은 39세의 청년 나이에 백만장자 부자로 돌아왔으니 금의환향이었다. 곧바로 일본서부터 준비한 자전거 생산을 위해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당시 서울(경성)인구 95만 명에 전차와 인력거가 주요 수송수단이고 자전거는 겨우 300여대에 불과했다. 얼마 뒤 8.15로 일제가 도망가니 인력거가 사라지고 대신에 ‘역마차’ 200여대가 출현했지만 자전거 수요가 폭발할 참이었다. 김철호의 사업 안목이 적중했지만 곧이어 6.25전쟁이 터지니 경성정공 사업의 끝장이었다.

기아산업 주식회사가 자전거를 생산하고 있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기아산업 주식회사가 자전거를 생산하고 있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피난수도서 3000리호 자전거 생산


부산으로 피난하여 영도다리 부근에 다시 자전거 사업을 재건하면서 기아산업(起亞産業)으로 간판을 바꿨다. ‘아시아를 일으켜 세계로 뻗는다’는 대망을 담은 작명이었다. 사업 종목도 주력 자전거 외에 자동차도 추가했으니 바로 오늘의 기아자동차의 모태가 피난길에 태어난 셈이다.

기아인 김철호의 집념은 전쟁 통에도 중단이 없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기아가 3000리호 자전거 12대를 생산하니 절망의 피난 수도에서 나온 희망의 빅뉴스였다. 전쟁을 지휘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기아공장을 방문하여 “우리 자전거 3000리호로 3천리 방방곡곡을 달리라”고 격려했다.

그 뒤 9.28 수복으로 상경하여 친분 두터운 대한전선 설경동 회장의 시흥공장 인접에 1만2천 평의 큰 땅을 마련했으니 자전거뿐만 아니라 자동차 생산의 착수였다.

우선 두 바퀴 자전거에 이어 세 바퀴 3륜차 생산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혼다기연의 기술도입에 합의하고 4바퀴 자동차 생산을 설계했다. 이를 위해 대졸생 공채시험으로 서울공대 출신 김선홍 사원을 채용하고 간부 후보로 대한조선공사 김명기 과장을 스카우트 했다.

자동차 생산을 독촉하는 분위기가 다가왔다.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창경원 산업박람회에 국산차 모델이 첫 선을 보였다. 미군용 지프 엔진에다 각종 노후부품들을 모아 조립한 ‘시발차’였다. 하동환 자동차제작소와 김창원의 신진공업이 선수를 친 것이다.

김철호의 자동차 산업은 촌각을 다투는 심정이었지만 불운이 겹쳤다. 4.19 학생혁명에 이어 5.16 군사혁명이 겹쳐 자전거 사업이 부도나 산은 관리로 넘어가고 말았다. 혁명정부의 부정축재자 처리 지침에 따라 거액의 벌금까지 부과됐다.

김철호는 자신의 태생이 잡초인생으로 온갖 풍상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좌절은 없고 도피도 없다고 다짐했다. “실패도 기회”라고 말하고 “공든 탑은 무너지는 법 없다”고 선언했다.

자전거 사업 부도에 대해 전 사원 앞에 사과하고 모두가 합심하여 재건하자고 호소했다. 5.16 직후 감원선풍 속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면서 한명도 감원이 없었다. 바로 학산 김철호의 기업정신의 골격이었다.

기아의 자동차 산업은 그 뒤 5.16 정부의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에 편승하여 1962년 10월 자동차 제작 허가로 재기했다. 창업주 김철호는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1단계 준공식을 병상에서 지켜본 후 얼마 뒤 별세했다.

기아 김선홍 회장이 1992년 10월 21일, 미 자동차 기술협회 주관 92 컨버전스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기아 김선홍 회장이 1992년 10월 21일, 미 자동차 기술협회 주관 92 컨버전스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선홍, 아직 갈 길이 멀다


김철호 창업주 이야기는 기아 김선홍 회장을 만난 이야기 속에 나온다. (배병휴 지음, 매경출판 1993.6)

김철호 창업정신 계승자인 김선홍 회장은 기아 공채생으로 1980년 초 기아차가 도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 봉고 신화로 기아를 구출한 경영인으로 평가된다.

이 책 속에 기아 창업 이후 숱한 고비를 겪어온 과정이 질긴 생명을 살아온 기아 이야기로 펼쳐진다. (회고록 '배병휴 경제기자 일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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