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야권에서는 포철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장기집권을 배경으로 ‘독야청청’ 식으로 군림하려 드니 ‘손 좀 봐야겠다’는 분노처럼 들렸다.
그러나 맨입으로 호통쳐 봐야 눈도 깜짝 않는 철벽이니 “포철을 여러 번 취재한 선배님이 ‘한 건’만 메모해 주세요” 식이다.
거절할 까닭이 없는 요청이었다. 당시 포철 관련 정치권 루머가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야권 맹장으로 명성 높은 대학 직계 후배에게 여러 건 메모를 건네주면서 감사 결과 보고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가 “곧 박태준 박살 내고 오겠다”며 자신만만하게 포항으로 내려갔다가 얼마 뒤 서울 와 충무로 뒷골목서 한 모금 사면서 “포철은 박태준의 워크화 문화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너무 뜻밖이었다.
그의 극구칭찬 내막을 짐작하면서도 “술 얻어 마시고 돈 봉투 받고 왔소”라고 농을 건넸더니 “포철 건설 과정의 박정희와 박태준을 너무 몰랐다”고 고백했다. 뒷날 정권교체 혼돈 속에 박 회장이 정계로 진출하면서 “포철을 정치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병풍막이 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YS와 DJ 집권시절 포철은 박태준과 박정희 이미지 때문에 정치적 학대를 받았다.
YS는 노태우 시절 3당 합당으로 집권 채비하며 당초 약속한 내각제 포기 각서 뒤집기로 민자당계인 박 회장을 밀어냈다. 그 뒤 세무사찰을 통한 탈세혐의 등으로 압박하자 박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봉투로 매입한 아현동 자택을 매각, 여기저기 기부하고 망명자 신분으로 일본에 은거했다. 이 무렵 조선일보 논설위원 출신 한국논단 이도형 발행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어렵게 박 회장 인터뷰에 성공하여 소식을 알게 됐다.
그해 연말 ‘서울 남대문 경제신문사 배 위원’이란 엉성한 주소로 박태준 회장의 연하장을 받았다. 박 회장 글씨는 명필 수준의 달필이었다. 그로부터 직간접으로 통신하다가 DJ 집권시절에는 국무총리를 맡았으니 명예회복 할 수 있는 경사에 속했다. 그렇지만 DJ 시절도 포철은 상당한 정치적 압력으로 학대받았다.
박 총리는 어느 날 출근길 카 라디오 편에 “막대한 부동산 재산을 차명 관리하고 있다”는 청천벽력 뉴스를 들었다.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DJ 친정체제가 굳혀질 무렵 측근들의 중상모략이 시작된 것이다. 박 총리는 미련 없이 사표 쓰고 DJ의 ‘간곡한 만류’에도 빈손으로 귀가했다.
한참 뒤 월간 '경제풍월(現 이코노미톡뉴스)' 특별인터뷰 간청 끝에 승낙을 받아 한남동 출가한 딸 집에 기거 중인 박 회장을 방문하니 정장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YS와 DJ와 민감한 사안들, JP와 미운 정 고운 정을 거의 다 털어놨다.
경제기자 시절 취재에다 YS와 DJ와의 관계를 합치면 상당한 비화 스토리로 월간지가 팔릴 것 같다는 기분이었다.
자가운전 자동차가 신라호텔을 지나올 무렵, 박 회장께서 전화를 주셔서 받아 보니 “인터뷰 내용 중 코드 1번(YS와 DJ 관계)은 없었던 일로 처리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결국 YS의 비인간적인 모멸, DJ의 야비한 정치 꼼수 등은 언론에 발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박태준 포스코 창업 회장, 전 국무총리 관련 회고 사연이 내 기억 속에 수북이 쌓여 있다. 이를 끄집어 기록할 공간이 없다. 박 회장 말년에 청암회(靑巖會) 회원으로 초청을 받아 별세하실 때까지 종종 뵈었다. 정치권에 진출한 후 측근들, 자민련 시절 국회의원 등 30여 명으로 구성됐다. 비정치인 2명을 청암께서 연필로 적어주셨다고 했다. 매경기자 출신 배 아무개와 육사 19기 출신 육군 대장 김진선이었다. (배병휴의 경제기자 일생 회고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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