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보령제약그룹 김승호 창업주 이야기는 ‘보은(報恩)인생’의 성공사이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산천초목을 못 잊어 보령(保寧)을 옥호로 삼아 명문 제약그룹을 축성했다. 처음엔 종로5가의 보령약국으로 불렸다. 차츰 소문이 들리더니 약품소매상에서 도매상을 거쳐 제약사로 차근차근 발전한 55년사를 기록하면서 ‘작지만 아름답고 강한 기업’으로 불린다.

보령제약 김승호 회장(@1991년). (사진=연합뉴스)
보령제약 김승호 회장(@1991년). (사진=연합뉴스)

종로5가 명당 터 ‘터줏대감’


김 회장의 제약인생은 약학도 공부하지 못한 비전문가로 약국에서 도․소매상과 제약사로 발전하고 숱한 계열사들을 거느린 종합그룹을 구축했으니 사전에 미리 예약된 행로를 밟은 꼴이다.

김 회장은 1932년 1월, 충남 보령군 웅천면에서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팔자로 태어나 일본산 약품명 몇 개나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다닐 때 연령차가 큰 맏형이 면사무소 가까이 약국을 개업하여 일본산 약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중학교는 집안의 권유로 서울 숭문중에 진학하여 약국을 운영하는 6촌형님 댁에 기거했으니 다시 약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숭문고를 졸업할 무렵 6.25가 터져 학병을 지원했다가 도중에 갑종장교로 임관되어 건설공병단에서 중위로 전역했다. 전역 후 몇 갈래 진로를 고심하다가 눈여겨둔 약국을 개업하고 보니 필생의 본업이었다.

종로5가 124번지, 3.5평짜리 가게를 얻고 약사 한분을 초빙 ‘보령약국’을 개업, ‘종로5가 터줏대감’의 길로 들어섰다.

이곳 개업 터가 일제 때는 술 배급소였고, 해방 후에는 문방구점이 문을 열었지만 장사가 안돼 문을 닫고 있었으니 ‘흉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57년 10월, 김 회장이 신혼의 부인과 함께 개업하고 보니 천하의 명당 터였다.

새벽엔 가장 먼저 가게 문을 열고 저녁에는 가장 늦게 닫았다. 손님이 주문한 약품은 ‘없는 것이 없다’는 소문이 날만큼 준비했다. 약국 주인의 친절과 성실도 입소문으로 퍼졌다. 이렇게 손님이 찾아오니 개업 6개월 만에 수지균형을 넘어 흑자를 기록했다. 이 무렵 현역시절 직속상관이던 엄준흠 소령(뒤에 준장 진급)이 찾아와 김 중위의 전역을 만류하고 약국 개업도 반대했던 것을 사과하면서 격려도 해줬다.

알고 보니 약국 터가 조선조 큰선비 이항복 선생이 살던 집 부근이니 분명 명당이다. 더구나 당시 서울시내 최대인 동대문시장이 인접하고 의정부와 동두천 등 서부 북부행 시외버스터미널도 가까이 있어 일 년 내내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또한 휴가 장병들이 부대로 돌아가는 교통길목마저 겹쳐 있었다. 이런저런 사연이 명문 제약그룹 탄생 터를 점지해준 셈이었다.

용각산 히트, 겔포스 신화의 산실


창업주 김 회장의 개업 자본은 근면성실, 정직, 신용이었다. 수많은 약품을 다루는 정확, 꼼꼼한 판매관리는 ‘신경영’에 속했다. 신생 보령약국이 잘 나가고 있을 때 전국의 도매상들이 폐업으로 아우성이었다. 이때 김 회장은 거꾸로 도매상 허가를 얻어 도․소매를 겸업하고 얼마 뒤 정부가 ICA원조자금 배정에 제약업도 포함시키기로 발표하자 제약사로 진출했다.

매물로 나온 중소 제약사를 1964년에 인수하여 경영해 보니 첫해에 순이익 7만 원을 기록했으니 할만 했다. 이에 힘입어 1967년 4월, 약국을 ‘보령제약’으로 개칭하고 성수동에 반듯한 생산공장을 완공하니 가내 수공업에서 현대적 공장 생산체제에 들어섰다.

김 회장은 제약이라면 생약이 으뜸 아니냐고 더듬어 보니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세대가 명약으로 꼽는 ‘용각산’이 생각났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기술제휴를 제안했지만 140년 역사의 일본 명문이 이제 갓 출범한 신생 무명 제약사의 손을 잡아줄 턱이 없었다. 이에 김 회장이 물러서지 않고 끈기와 집념으로 교섭하자 마침내 파트너로 인정되어 1966년 12월, 첫 국산 용각산이 탄생했다.

그러나 첫 야심작은 실패였다. 일본기술과 원료 그대로 제조했지만 용각산을 아는 사람들이 ‘이거 아니야’라고 거부했다. 포장과 외양이 달랐다. 일제는 원형의 알루미늄 곽이었지만 국산은 사각형 종이갑으로 첫 눈에 ‘이거 아니야’라고들 했다. 이에 전량 5만 갑을 회수하고 일제와 모양과 포장을 동일하게 만들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때는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신념아래 새벽부터 통금직전까지 중노동 하던 시절이라 ‘가래, 기침, 성대 보호에 용각산’이란 선전 한마디로 큰 시장이 활짝 열렸다.

금방 용각산이 인기 아나운서와 성우들의 필수품으로 지명됐다. 매일 분필가루를 마시는 교사들, 온종일 먼지 길을 달리는 운전기사들, 담배연기 속에 일하는 애연가 등의 인기도 폭발했다.

용각산 대히트 소식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심장약 구심, 어린이 만병통치약 ‘기응환’ 등이 자진해서 기술제휴를 제안해 왔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김 회장이 구라파 시장개척에 나섰다가 프랑스 비오테락스의 위장약 ‘겔포스’ 제휴에 어렵게 성공했다. 이른바 ‘겔포스’ 신화였다. 1975년, 겔포스 발매 4년 만에 10억대 판매고를 올렸으니 신화로 불릴만 했다. 당시 MBC 인기 수사반장 탤런트 조경환을 모델로 한 ‘겔포스로 위장병 잡혔어’ 광고가 빅히트 상징이었다.

이 무렵 보령제약의 성장사는 중단 없는 전진이었다. 날로 매출이 늘어 성수동 공장으로 감당을 못해 1974년 안양에 대규모 제약공장을 준공, ‘겔포스 신화의 산실’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러나 1977년 7월, 상상할 수 없는 폭우가 안양공장을 순식간에 흙탕물로 뒤덮어 겔포스 원료와 제품을 앗아갔다.

겔포스 신화의 중단이었다. 그러나 4개월의 공백만으로 다시 회생했다. 정부가 수해복구를 지원하고 각계각층에서 일손과 물자를 지원함으로써 단기간에 폭우참사를 복구할 수 있었다. 이때 김 회장은 ‘공존공영의 정신’을 배웠다고 한다. 국가와 사회의 고마움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다시 한번 확립했다는 소감이다.

안양공장 피해복구를 계기로 보령제약의 사운은 다시 활기를 띄었으니 ‘전화위복의 계기’였다. 보령은 1977년 9월 본사를 원남동 그룹사옥으로 옮기고 ‘국민신약’을 목표로 각종 신약개발에 전력투구하고 독자기술에 의한 항생제 개발에도 성공함으로써 합성기술의 역수출 시대를 열었다.

보령제약그룹 사운이 절정기를 맞은 시기에 첫 약국 개업 동지였던 부인이 별세했다. 김 회장은 아들이 없는 대신에 두 딸을 훌륭하게 교육했다. 장녀 김은선에게 그룹 회장, 차녀 김은정 사장에게 계열사 경영을 맡기고 명예회장으로 노후를 보낸다. (2013.8 경제풍월 창간 14주년 기념, 제4회 한국의 기업가정신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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