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3금(禁)과 명예제도

육사명예 살아있었다

박남수 장군, 부하책임에 자진 전역
19기생 동기 4명, 모교정신 무한신뢰

대한민국 장교가 될수 있는 사관(士官) 생도에게는 엄격한 학칙과 높은 수준의 명예제도가 적용된다. 지난 5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남녀생도간 음주 회식과 성폭행 사건으로 육사의 3금(禁) 규칙과 명예제도(Honor System)가 일반국민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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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위기’에 자진인책 전역 첫사례

사건은 지도교수와 생도들간의 단합대회 모임에서 소주와 맥주를 썩어 마신 폭탄주가 과도했다. 임관시기가 멀지 않은 4학년 남자생도가 2학년 여자생도를 부추기다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엘리트 장교를 양성하는 육사의 3금 교칙은 철저하고 엄격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금혼(禁婚), 금주(禁酒), 금연(禁煙) 등 3금이 사관생도들의 기본이다. 여기에다 거짓말 할수 없고 절도해서는 안되고 시험치면서 컨닝하는 비신사적 행위 등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명예제도가 생명이다.
교내 성폭행이란 3금과 명예제도의 훼손이니 최고의 형벌이 따를수 밖에 없다. 4학년 남자생도는 퇴교되고 이등병이 됐으니 이는 교칙이다. 지도교수들도 엄중한 책임을 지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부하들의 책임을 묻기에 앞서 육사의 명예와 권위인 교장 박남수 장군(중장, 육사 35기)이 육사의 명예를 지키고 군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코자 자진 전역했다. 박장군은 사건의 전모가 언론에 보도된후 계룡대로 조정환 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가 인책 전역을 자청한 것이다. 박장군은 합참 작전기획부장과 수도 방위사령관 등 요직을 거쳐 제50대 육사교장으로 부임한 후 사관생도가 저지른 불명예를 훈육의 책임으로 돌려 물러난 첫 사례를 남긴 것이다.
박장군은 40여년 군인의 길을 마감하면서 ‘육사의 위기’ ‘군의 위기’에 책임을 진다고 말했다.

‘육사정신이 살아 있다’고 안도

시중에서 지켜 보기로는 현장지도교수와 생도대장(준장)이 인책할 사항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교장이 먼저 책임을 자청 함으로써 무너질뻔 했던 육사의 명예추락을 저지할수 있었다.
박장군 전역후에 생도대장은 보직해임 되고 지도교수 7명과 훈육관 2명 등 고급장교 9명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됐으니 엄벌을 받게 됐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육사의 교육 정신은 살아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6·25 전쟁기에 탄생한 육사가 훌륭한 지휘관을 양성하여 명예와 충성으로 나라를 지켜 왔다는 평가를 새삼 받게 됐다.
1960년초에 육사를 졸업한 19기생 출신 4명이 지난 6월 4일 한자리에 모여 50년전 생도시절을 회고했다. 경제풍월 편집위원 박민식 (예)대령이 동기생인 박근 (예)대령, 배인기 (예)소장, 문영표 (예)중령을 초청한 모임이다.
19기생들은 입교당시 교장 이한림 장군(중장, 전 건설부 장관), 김용배 장군(대장, 육참총장), 강영훈 장군(중장, 전 국무총리), 박중윤 장군(소장) 등 네분의 교장 아래 엄중한 훈육을 회고했다. 생도시절 3금과 명예제도는 감히 위반하고자 엄두도 내지 못한 의무이자 신앙이었다. 교장과 교수의 가르침은 헌법이었고 선배생도들의 훈육도 하느님 말씀격이었다.
고의나 실수를 막론하고 위반시에는 최고의 형벌인 퇴교를 각오했다. 19생들의 2년 선배인 이정린 장군(17기)이 ‘명예위원장 생도’로서 사관생도 부적격을 판정하여 퇴교 당하는 생도들을 지켜 봤다.
이정린 장군은 명예제도가 몸에 깊이 배어 보병 37사단장을 거쳐 3사관학교 교장과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후 국방부 차관으로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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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기생들의 모교 명예 무한신뢰

이날 육사의 3금과 명예제도가 모교의 상징과 명예라고 굳게 믿는 이들 19기생들은 모두 베트남 참전 전투 중대장으로 무공을 세우고 고급 지휘관으로 전역했다. 박민식 대령은 ‘정글전의 영웅’으로 선정됐고 박근 대령은 1사단 대대장 시절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응징작전시 해당 지역에서 활동한 후 사단작전참모(사단장 전두환 소장)를 역임했다.
배인기 소장은 정보통으로 이태리 주재 무관 보좌관, 일본주재 무관을 거쳐 전역한후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 1인 시위로 친북, 종북 세력 타도를 외치고 문영표 중령은 함경도 출신의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간첩들과 격투를 벌여 체포한 전공을 많이 세웠고 국내 최고의 경비업체를 경영했다.
이들 동기생들은 각자 사회활동을 따로 하면서 정기적으로 만나 고급장교로서 아직도 현역과 같은 심정으로 국가안보를 걱정한다. 북의 미사일과 핵개발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전작권 전환과 한미연합사 해체방침을 예정대로 추진하려는데 우려를 표시하고 일반국민들과 언론의 안보 불감증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들은 육사교육 과정 4년이 자신들에게 확고한 국가관과 충성심을 심어주어 일생 군인정신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바로 젊은 생도시절의 3금제도와 명예제도의 신앙 때문이라는 말이다.

6·25 전시하에 미육사제도 도입

육군사관학교는 6·25 전쟁이 계속되던 1952년 1월 진해에서 개교됐다가 서울 태릉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당시 미 8군 사령관 밴프리트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과 긴밀히 협조하여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원하면서 정예간부 양성기관으로 육사설립을 지원했다.
당시 전시상황이 급박하여 미국의 웨스트포인트 교육과정과 훈육제도를 그대로 도입했다. 마침 밴프리트 장군의 사위 2명이 웨스트포인트에 중령과 소령으로 근무하고 있어 그로부터 많은 자료와 자문을 받았다. 이때 4년간의 내무생활 규칙과 3금제도 및 명예제도를 도입하여 엄격한 훈육을 육사의 전통으로 확립시켰다.
특히 사관생도에게 품위와 절제를 강요하는 명예제도는 교칙에 의한 필수덕목으로 습성과 생활화를 체득시켰다. 도중에 특별한 예외사항으로 절차를 거쳐 불명예로 퇴교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4년과정을 거쳐 임관한 육사출신들은 모교의 3금제도와 명예제도는 영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3금 가운데 금주(禁酒) 부문에서 ‘특별한 경우’에 ;약간음주‘를 허용한 것이 탈이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1968년에는 훈육관이 주관하는 행사의 경우 일부 음주를 허용했고 1974년에는 학교장이나 생도대장 승인하의 가벼운 음주를 허용했다가 2002년에도 금주규제를 다소 완화 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약간음주’ 허용에다 1998년 이후 여자생도가 입학하면서 남녀공학으로 남녀생도가 접촉할 기회가 생겨 성폭행이라는 불상사가 생겼다는 해석이다.

여자생도 입학허용은 옳았다

3군 사관학교에 여자생도 입학을 허용하는 제도 개선시에도 논란이 많았다. 김영삼 대통령정부의 행정쇄신위원회(위원장 박동서)가 개선 방안을 심의할 때 국방부와 3군 사관학교 당국이 강력 반대했다.
사관생도 교육과정의 강훈(强訓) 교과와 여자생도들의 기숙시설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유로 반대했었다. 이에대해 행정쇄신위원들은 여성계의 강력한 의사와 여성특유의 집념과 강한 모성을 바탕으로 훌흉한 장교가 양성될수 있다는 논리로 이를 관철할수 있었다. 그뒤 실제로 3군 사관학교에 여생도가 입학하여 남생도 보다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졸업하고 각급 초급장교 보직에 잘 적응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다만 이번 육사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고는 예외적인 ‘돌발실수’로 끝나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생도가 어울리게 되면 불상사가 생길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소홀했던 지도교수의 큰 책임이 육사 전체의 불명예로 확산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국의 웨스트포인트가 아메리카 합중국의 정신을 대변하듯 육사의 교육정신이 대한민국의 국토수호 정신으로 더욱 계승 발전돼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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