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호]

‘유언비어와 무장폭동’

역사로서의 5·18

김대령씨, 세계기록유산 등재 분석

영화 ‘화려한 휴가’ 거짓 팔아 흥행

광주사태의 진실 재조명을 위한 ‘역사로서의 5.18’이 전4권, 1,560쪽의 방대한 실증자료로 엮어져 5월초에 발매된다. 저자는 재미 사학자인 김대령씨, 출판은 비봉출판사가 맡았다. 비봉출판 박기봉 사장은 이 책이 5.18관련 묻혀진 진실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방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부분을 경제풍월에 제공했다.

묻혀진 진실 재조명의 초석

저자 김대령씨는 프롤로그를 통해 대한민국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사무국장 김효선씨의 권유와 전 육사교수인 정창인 박2013-05-17_184816.jpg 사(한미애국단체연합회장)의 도움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또한 거짓 선전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기록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내용을 읽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집필했다고 한다.

출판을 맡은 비봉출판 박기봉 사장은 서울상대를 나와 증권사 간부로 근무하다 출판인으로 전신하여 국익과 공익을 위한 기획서적을 다수 출판했다. 북한이 공개한 대남공작사를 엮은 ‘북의 지령 따라 움직이는 남쪽 사람들’, ‘붉은 수선화’, ‘통일교향곡’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내놓은 ‘역사로서 5.18’에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광주 청문회에 드러난 5.18 비화, △5.18재판 법리의 모순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전4권 주요목차 별항).

<역사로서의 5.18 전 4권 목차>

<제1권>
제1장 : 유언비어 잔치판
△고의적으로 유포된 박관현 사망설 △헬기 기총사격 유언
비어 △미 항공모함 시민군지원 유언비어 △차명숙과 전옥
주의 화려한 유언비어 가두방송 △유언비어로 모집된 시민


제2장 : 사전준비 폭동인가, 사후 저항운동인가
△1980년 이전 무장봉기준비 △사전 무장봉기 계획입증
5.18기록물 △탈북자와 윤한봉의 일치된 증언 △민중봉기
선동한 5.18설명서 △왕년의 빨치산이 선포한 투쟁선언 전
단 △광주사태에 대한 북한의 입장


제3장 : 날짜별 주요 5.18 사건
△5월 17일 광주사태 전야 △사태의 발단 △화공에 의한 폭력
시위 △차량 돌진에 의한 도시게릴라 방법 △무장시민군의 도
청함락 △뜻밖의 반전 △광주 코뮌 권력을 장악한 무장봉기파
△전원 자폭결의 △새벽의 마지막 전투


<제2권>
제4장 :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
△가짜스님 손성모 간첩과 왕년의 빨치산 스님 △김대중이 간
첩 손성모 북송 △20사단 지프차 탈취시민군 △무기탈취, 무장
봉기 시민군 600명 출현 △불순세력이 있었다는 낌새들 △5.18
광주영웅 대남공작원 장중한 △괴한들이 탈취한 지프차들의
행방 △군경과 시민군 뒤바뀐 제복 △학생 없는 학생시민군 △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낌새와 단서들 △북한방송 청취로 시사
정보 입수한 시민군

제5장 : 시민군과 계엄군, 누가먼저 살았나


제6장 : 시위대와 시민군 사상자 발생원인
△시민위에 떨어진 돌과 화염병 △시민군간의 총격전 △시
민군 운전미숙 사고 △광주교도소 습격 △시민군의 수류탄 폭발

<제3권>
제7장 : 5.18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
△김대중과 정동년의 광주청문회 위증 △국민인식과 다른
5.18재판 판결 △꼼수로 빚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법리 △
내란설과 제3세력 개입설 △박현채의 민관 선동논리 △사
라진 5.18 비밀문서와 보존된 기록들 △1심의 황당한 판단,
2심의 황당한 법리해석

제8장 : 5.18판결과 상반된 사실들

△5.18 이전 성명서 대필한 왕년의 빨치산 △시민군이 최규
하 대통령에 충성하는 세력이었나 △신현확 물러가라는 구호의 꼴불견

제9장 : 5.18 국민결집 판결과 상반된 사실들
△약탈과 도덕성 결여 △무장봉기파와 수습위의 다툼 △무
장시민군을 무서워했던 시민들 △코뮌주의자들과 수습위
간 다툼 △북한지령문처럼 보이는 5.18 성명서 △차량 약탈
한 헌법기관? △경상도 차량 불 지르는 헌법기관? △지역감
정 자극 유언비어

제10장 : 중학생 시민군이 헌법기관?
△중고생 봉기위원회 △중고생 청소년시민군 △송정리서
죽은 영암 고등학생 △윤기권의 월북 △고등학생 시민군 △
김효석의 무응답

제11장 : 광주 해방구에 대한 법리해석 문제
△광주해방구 주역 코뮌주의 혁명가들 △코뮌주의자들에
대한 서로 다른 법리잣대 △코뮌주의자들의 민족민주혁명

<제 4권>

제 12장 : 5.18 민족민주에 대한 법리해석 문제
△자유민주 대항마 민족민주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과 광
주운동권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과 북한관계 △5.18의 반
미이념 △북한이 주도하는 통일운동 △왕년의 빨치산 전용
어 △대남공작용어 혁명역량 △북한 공작금 수령한 민족민
주 진영인사들 △김대중 후원자 김일성 △김일성이 문익환
에게 보낸 밀사 △가톨릭 농민회 서경원 간첩사건 △광주사
태 배후 장기표의 여간첩단사건 △김낙중 간첩사건

제13장 : 광주운동권사에 비춰본 5.18
△박현채가 원격조정한 민청학련사건 △인민혁명당과 광
주운동권 △광주일고 동문들의 박정희 암살음모 △황석영
의 북한 5.18영화 ‘ 님을 위한 교향시’ △황석영의 밀입국 배
경 △빨치산과 선후배관계 광주운동권 △에필로그, 부록
1~5, 참고문헌 등

‘화려한 휴가’ 유언비어 팔아 흥행

저자는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실화가 아닌 거짓 선전 유언비어들을 팔아 흥행에 성공했지만 만약 관객들이 이를 사실로 2013-05-17_185325.jpg 받아드린다면 대한민국 국군은 ‘시민학살 기계’로 낙인 찍혀 완전히 명예가 훼손된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5.18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60만쪽에 들어있는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녹취록을 분석하면 5.18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정부와 김대중씨의 ‘거리정치’와의 충돌이며 5.18재판은 시민군의 무장봉기를 정당화시켜 준 판결로서 “거짓이 진실을 지배했다”고 풀이했다. 저자는 지난 “30년 이상 5.18담론들은 실상 보다 허상이 많았기에 역사로서 재조명돼야 한다”고 믿기에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전옥주의 화려한 거짓 가두방송

5.18의 발단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여수 돌산으로 가고 있을 때 누군가 “박관현이 죽었다”고 외친 거짓선전으로부터 시작됐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선동한 말이 광주시내로 퍼지자 사실 확인도 없이 군중들이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을 납치했지만 5.18재판은 그들을 ‘헌정질서 수호행위’로 판단했다.

유언비어의 위력을 확인한 선전조는 5월 19일 전옥주를 데려다가 ‘죽은 학생이 내 동생’이라는 거짓 가두방송을 시켰다. 그녀는 남동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옥주와 박관현은 2013-05-17_185509.jpg 성씨도 달랐다. 그런데도 전옥주의 거짓 가두방송이 광주사태의 쓰나미를 불러왔다. 영화 ‘화려한 휴가’ 속에 전옥주는 정의로운 간호사로 나오지만 말짱 허상이다.

다음날에는 “전남대 총장이 박관현 사망 충격으로 할복자살 했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나오고 ‘전두환 광주 살육작전’,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려 왔다’, ‘최규하 대통령이 사살되었다’는 유언비어로 발전했다.

저자는 이 같은 사실을 들어 유네스코에 등재된 5.18 기록물이 거짓말을 시위 선동도구로 이용한 문화유산이냐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전후배경

저자는 5.18재판이 허상을 숨기기 위해 5.18의 전후관계를 짚어 보지 않고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만을 따져 물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DJ세력과 범 운동권은 5월 20일 총궐기로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신현확 총리에게 19일까지 총사퇴 최후통첩을 보냈다. 최 대통령의 중동순방을 계기로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격하려 했지만 경찰은 무방비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괴한이 버스를 탈취하여 경찰관을 압살, 부상시키자 경찰관들은 혼비백산 했었다.

그날 저녁 시위대 본부차량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민청협’의 사주를 받던 유시민은 청와대로 밀고 들어가자고 했고 심재철은 시위대의 해산을 주장했다.

1974년 국가전복을 음모했던 민청학련은 빨치산 출신 박현채가 원격조정 했으며 이 사건 관련자들이 ‘민청협’으로 다시 모여 이날 시위대를 원격 조정했던 것이다. DJ는 1980년 4월 이 민청협을 끌어안아 간부들에게 유급 홍위병 역할을 맡겨 가두시위를 주도케 했으며 이 무렵 차기집권용 예비내각까지 구성했었다.

이 같은 배경 속에 5월 20일 총궐기를 계획하고 있을 때 5월 15일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버스를 탈취하여 남대문경찰서 저지선을 돌파하여 시위대가 서울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 버스 탈취 폭도가 탈북자들의 증언과 체포간첩들의 심문결과 북한군 특수부대원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건을 운동권 용어로는 국가전복의 기회를 놓친 회군이라는 뜻으로 ‘서울역 회군’이라고 표현한다.

내무부장관, ‘군 개입 불가피’ 보고

이를 계기로 내무부가 치안유지에 한계를 느껴 심재철에게 전화로 시위대의 해산을 호소했고 김종환 내무부장관이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 “경찰로서는 더 이상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니 군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요청했다. 이어 신 총리가 중동에서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5월 17일 심야에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했다는 요지가 ‘5.18의 전후관계’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 같은 사태발전에 따른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쿠데타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5.18 재판이 시민군의 무장봉기를 정당화시켜 주기위해 계엄확대를 쿠데타로 해석할 수밖에 없어 ‘최규하 물러가라’고 외친 시민군을 마치 ‘최규하 수호세력’이라고 억지 판단한 꼴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5.18 시민군이 오히려 유신헌법 수호세력이 아니냐는 말이다.

당시 DJ 지지세력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유신헌법에 따라 선출된 ‘유신잔당’으로 개헌을 주도할 자격이 없고 타도의 대상이라고 보고 민중봉기를 통한 정권교체를 목표했다. 1979년 이슬람 과격파가 이란의 팔래비 왕정을 전복시킨 호메이니의 혁명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른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법적 근거가 전무하다고 해석한다. 5.18 재단 설립자인 윤한봉은 자신이 무장봉기를 총지휘했다고 주장하지만 행동대장일 뿐 배후세력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 배후에는 왕년의 빨치산 세력이 따로 있었다고 보기에 5.18 주동자들의 이념운동도 시민군 전체의 이념이 아니었다. 무장 시민군의 다수는 외지인들이었다.

광주시민도 모르는 외지인 5~600명

저자는 5.18 기록물 자체가 시민군 주동자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사상이나 이념이 없었음을 입증한 기록이라고 해석한다. 일부 불순세력 외의 시민군들은 이념집단이 아니었으며 배후세력에 원격조정 됐다고 본 것이다. 이념집단이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 ‘민족민주’, ‘인민민주’ 사상을 말한다.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주창한 사회민주주의를 ‘민족민주’라고 불렀다. 1980년 5월 8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선포할 때의 ‘민족민주화’가 바로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를 뜻한다.

5월 21일, 전남도청 광장에 모인 인산인해는 광주시민이 아닌 탈취한 차량으로 광주 외곽에서 실어온 사람들이다. 도청 주변 시민들은 피난을 가거나 대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

이날 오전 8시 낫으로 무장한 세력이 20사단 지프 14대를 탈취하고 9시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수백 대의 차량을 탈취했다. 그들의 일부는 38개 무기고를 털고 나머지 일부는 광주 외곽주민들을 실어 날랐다. 그들의 행동은 일사불란했고 전광석화 식이었다.

반면에 광주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외지에서 나타난 5~600명이 도청 함락을 지원한 후 5월 26일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연 그들이 누구였을까 의문이다. 저자는 어느 누가 중학생을 시민군 특공대로 조직할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광주 학생운동권의 상징인 박현채가 바로 중학생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름이 공개된 윤상원, 정상용 등 주동자는 코뮌주의자로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반국가세력이라는 판결을 받았는데도 5.18 재판이 그들을 헌정질서 수호세력으로 판결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5.18 재판이 진압군은 국헌문란집단, 시민군은 헌정수호기관으로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실상 진압군 가운데 한 명도 국정문관 목적이 없었고 시민군 가운데 한 명도 헌법수호 목적을 말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DJ와 빨치산 출신 박현채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1980년 봄의 가두시위와 DJ관계를 다시 한 번 소상히 설명했다.

1980년 3월 1일 시국사범들이 복적 되자 DJ는 장남 김홍일을 시켜 사조직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를 급조하여 기존 민청협, 국민연합과 함께 전위조직으로 가동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복적생협의회 조직을 통해 총학생회를 장악했다. 복적생 장기표, 조성우, 심재권, 이현배 등이 간부직을 맡은 국민연합 사무국이 이들을 지휘했다. 사무국장 장기표가 시위계획을 DJ에게 보고하며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홍위병 역할을 했다.

이들 복적생 중심의 DJ사조직이 비운동권 교수들의 퇴진시위를 벌이고 어용교수로 낙인찍었다. 전남대는 정동년이 퇴직교수를 결정하는 ‘교수 살생부’를 작성했다. 정동년의 전력으로 보면 박현채의 원격조정이 보인다. 1980년 봄 대학 총학생회의 성명서가 획일적인 빨치산 논조로서 박현채가 작성했다.

박현채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배후였으며 DJ는 1978년 ‘민청협’으로 개칭한 후 이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YS편에는 한 명도 가담하지 않았다. DJ가 신민당 대신에 민청협과 손잡고 ‘거리정치’에 나선 배경이었다.

DJ가 YS와 결별하고 거리정치에 나선 것은 그에게 문익환과 박현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현채는 DJ의 성명서 담당비서이자 경제스승이었다. 박의 ‘민족경제론’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을 결사반대하는 논리다. 민청협의 이데올로기도 박의 이념 그대로이다. DJ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도 박이 대필했다. DJ가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 건설 등 조국근대화 프로젝트를 반대한 것도 박현채의 영향이다.

‘민족경제론’은 운동권 양성 교재로서 북한식 경제체제가 박정희의 산업화 모델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정치적으로는 ‘민족민주’로서 여기에서 ‘주사파’가 나와 북의 세습체제에 충성하는 것이다.

윤한봉도 수수께끼 구술 녹취록

광주운동권의 요람이자 뿌리는 1960년대 후반 통혁당 간첩단 조직이 침투하여 장악한 써클 ‘광랑’(光郞)이다. 이를 통해 양성된 운동권이 1974년 봄 민청학련 사건을 겪은 후 10.26으로 무장봉기 적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막상 5.18이 개시되자 윤한봉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다. 누가 누군지 모르는 시민군이 등장하자 윤은 ‘큰일났다’고 말하고 그의 여동생을 애인처럼 변장하여 도망쳤다. 그러니까 광주운동권도 모르는 무장세력을 5.18 재판이 헌법수호 세력으로 둔갑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윤한봉은 생전 구술 녹취록에서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사건은 사학자들이 연구할 몫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사망 1년전 그의 증언이 5.18 재판의 법리를 뒤집어 놨다고 저자는 비판했다.

또한 저자는 무기를 탈취한 괴한들이 광주시민이 아닌 외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강조한다.

5월 20일, 북한 방송이 광주사태를 생중계 하면서 ‘봉기군’이란 용어를 사용한 후 시민군이 등장했다. 그들은 매복하고 있다가 20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프 14대를 탈취하고 아세아자동차에서 차량 60대를 탈취했지만 결코 오합지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과연 그들의 정체는 누구일까. 당시 이름이 공개된 광주사태 공작 간첩 손성모는 스님으로 위장하여 활동했고 왕년의 빨치산들도 광주로 몰려들었다. 간첩 손성모는 2001년 DJ가 북으로 송환했다.

월남참전용사 김 기자의 애국헌신

저자는 ‘역사로서의 5.18’을 집필하도록 용기를 준 김동문 기자의 애국적 헌신을 특기했다. 당시 전남매일 제2사회부 차장으로 나주지사에 근무한 김 기자는 월남전 참전 용사로서 시민군의 나주 공작을 막아낸 영웅으로 묘사된다.

당시 시민군이 해남, 진도, 목포로 진격할 때 나주공략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1975년 4월 월남 공화국의 붕괴와 같은 사태로 발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 기자는 나주에 주둔중인 예비군대대와 함께 시민군 진입을 막아내어 시민군들이 광주로 돌아갈 때 송정리 다리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광주 ‘해방구’가 고립상태로 무장봉기가 크게 확산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었다.

당시 김동문 기자는 “유신 언론인 집이냐”는 불순 협박전화를 받고 예비군대대로 피신했다. 반면에 나주군수는 금성산 정상에 있는 대공포 진지로 피신했다.

김 기자가 예비군대대로 피신했을 때 대대장 정모 소령은 “무장폭도가 300m 앞 마을 어귀에까지 도달했다”면서 불안한 모습이었다. 이에 김 기자는 “군인의 임무는 부대의 사수”라고 말하고 “나주에 남아있는 유일한 부대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당시 대대의 현역병은 16명, 예비군을 합쳐도 60명에 불과했다. 무기는 소총이 전부이고 탄약과 식량도 바닥이었다. 사정이 어려운 점을 확인한 김 기자가 “월남전 참전동지로서 나와 운명을 함께 합시다”라고 정 소령을 격려했다.

무장 시민군 차량에서 공포탄을 발사하는 위급상황에서 김 기자는 벗은 지 14년만에 군복으로 갈아입고 현역들과 함께 뜬눈으로 부대를 지켰다. 상급부대와 끊어졌던 통신이 무선으로 간신히 연결되어 식량을 요청했더니 헬기가 날라 왔지만 시민군의 위협으로 착륙이 어려웠다.

김 기자가 기지를 발휘하여 침낭 속의 흰 천을 뜯어내 착륙지점을 표시했더니 헬기가 M60 기관총과 실탄상자만 내려놓고 돌아갔다. 정 소령이 다시 본대와 교신으로 “부대의 사수가 어렵다, 폭도들이 공격해 온다”고 다급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발포 절대 불가”라고만 지시하니 고립무원 지경이었다.

고립무원 지경에서 대한민국 사수

다음날 나주군청 내무과장이 새로운 유언비어들을 전화로 알려왔다.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가 광주를 떠나 나주로 진격한다”, “광주에서는 수만 명이 학살됐다”, “광주 금남로에 탱크가 출현하여 학살을 자행한다” 등등.

김 기자는 이 같은 소문들이 모두 악성 유언비어라고 일축하고 “진압군 300명이 곧 투입된다”고 역선전하여 시민군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얼마 뒤 군청으로부터 시민수습대책위를 구성하여 시민군과 협상할 테니 진압군의 진입을 유보시킬 수 있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대대가 이를 수락한 후 시민방문객을 맞기 위해 정문에 M60 기관총을 설치하고 담장 철조망 1m 간격으로 거총자세의 병사들을 배치했다.

시민대표 5명이 방문하자 수습대책위가 시민군에게 탈취한 총기류를 반납하고 귀향을 설득토록 요청했다. 그 뒤 영산포 예비군이 시민군차량 수십 대가 나주로 진입코자 재집결한다고 알려왔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정 소령이 현역 16명과 함께 최후 방어선으로 출동했다. 김 기자는 조금 뒤 단신으로 뒤따라 나주 전신전화국의 협조로 확성기를 설치하여 시민군에게 말했다.

“곧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한다. 무기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여기는 나주지역 계엄본부다”라고 반복했다. 읍내 예비군과 주민들이 시민군의 동향을 제보해 오기도 했다. 이때 무장버스 1대가 저지선을 돌파하여 100m 앞에 정지했다.

확성기를 통해 “모두 손들고 나오라”고 하니 학생시민군이 17명이었다. M1소총과 빵과 라면도 실려 있었다. 고교생 시민군은 “아저씨들이 타라고 해서 버스에 탔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시민들에게 “체포된 17명의 무장폭도는 안전하게 보호되어 있다”고 알려주었다. 곧이어 시민대표 6명이 부대를 방문하여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무장 시민군에 의한 나주 함락 기도는 저지됐다. 저자는 김 기자의 용맹정신으로 나주를 넘어 대한민국을 사수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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