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프로레슬러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오래 전, 그러니까 90년대 초반, 프로레슬링을 좋아했었다. 아주 열심히, 매주 빼놓지 않고 봤었다. 얼티밋 워리어와 언더테이커의 팬이었다. 그 시절, 내 기억 속 프로레슬링은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근육질의 남자들이 아낌없이 몸을 던지는 한바탕의 퍼포먼스였다. 근육질의 발레였고 피가 낭자하는 서커스였으며 상처와 고통이 수반 된 연극이었다. 그들은 다쳤으며 부러졌고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습관처럼 약물을 사용했다. 어떤 약은 나라가 허락한 약이었지만 어떤 약은 금지된 약물이었다. 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들의 육체엔 여전히 고통이 머물렀기에 약물 또한 은퇴 후의 일상까지 따라갔다. 그들은 약물과용으로 요절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이들이 화려하게 펼쳐 보인 퍼포먼스에 바치는 헌사다. 폭죽 같은 순간을 위해 몸도 영혼도 다 불태운 채 그 생을 너무나 일찍 마감한 이들에게 바치는 레퀴엠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때, 링 위의 화려한 주인공이었던 램은 이제 쉰 줄에 접어든 쇠락한 프로레슬러다. 그는 한 때 프로레슬링 스타였다. 그 절정의 시절 이후 그의 삶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그에겐 아무도 아무 것도 없다. 낡아 빠진 이동식 주택에 살면서 주중에 식료품점에서 일하고 주말엔 변두리의 작은 링에 오른다.

더레슬러 영화 주인공역의 미키루크. (사진=영화 스틸컷)
더레슬러 영화 주인공역의 미키루크. (사진=영화 스틸컷)

시나리오에 입각한 합을 맞춘 액션이어도 액션은 액션이다. 액션의 충격과 고통을 수십 년 감내해낸 몸뚱이엔 퇴역을 앞둔 전함처럼 상흔이 남았다. 근육통은 일상이고 뼈마디가 쑤시는 건 당연하다. 눈에 보이는 자잘한 상처들은 차라리 괜찮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관들은 지쳤다고 아우성을 친다. 의사는 프로레슬링을 감당하기엔 심장이 버틸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없는 살림에도 태닝을 하고 근육을 만들기 위해 값 비싼 스테로이드제를 먹는다. 부르는 곳만 있다면, 언제든, 본명이 아닌 스테이지 네임으로 링 위에서 서기 위해서다.

미키 루크의 영광과 그늘


잠시 곁길로 빠져 이 영화의 주연 배우 미키 루크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울컥했던 건 이 남자 배우를 많이 좋아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월켄처럼 더도 말고 덜도 아닌 그 사람 그 자체, 대체 될 수 없는 배우. 내게 미키 루크는 그런 배우다. <나인 하프 위크>와 <엔젤 하트>, <쟈니 핸섬> 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세련 된 모습도 좋아하지만 <바플라이>에서의 남루하고 비루한 모습도 좋아한다. 그런 그가 권투를 하면서 얼굴이 망가지고 세월의 흐름 앞에서 성형도 하고 보톡스도 맞고 근육도 키운 뒤 이러저러한 인생의 굴곡을 넘어 온 뒤에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더블팀> 같은 액션 영화에 나와 장 클로드 반담의 발차기나 받아주는 모습은 날 슬프게 했다.

그 뒤로도 그는 들어오는 영화는 다 하는 것 같았다. 배역의 크기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맨온파이어>에서는 몇 분 나오지도 않는 변호사 역할까지 했다. 그런 그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나온 영화가 이 영화였다. 이 영화는 한 영화 평론가의 평처럼 그저 한물간 퇴물 프로레슬러를 앞세운 “뒤도 안 돌아보고 울리는 스포츠 신파” 영화가 아니다. 최소한 내겐 그렇다. 이 영화는 내게 미키 루크의 자전적인 영화 같았다. 그 스스로에게 따라주는 마지막 위로주 한 잔 같았다. 그 스스로에게 보내는 독백 같았다. “늙어도 괜찮아. 오래 된 화약도 불꽃을 일으킬 수 있어. 오랜 된 나무도 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어.”라고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의 독백 말이다. 그랬기에 한 명의 팬으로서 이 영화를 담담히 볼 수 없었다.

영화 '쟈니 핸섬(Johnny Handsome, 1990)'에서의 미키 루크(오른쪽). (사진=스틸컷)
영화 '쟈니 핸섬(Johnny Handsome, 1990)'에서의 미키 루크(오른쪽). (사진=스틸컷)

이 영화와 이 영화를 선택하기까지의 미키 루크의 삶을 떠 올리며,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을 떠 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 자신이 맘에 안 든다고 내 삶을, 나 자신을 없앨 수는 없다. 나이가 들어 노쇠해진 내 자신이 싫다고 나 자신을 버릴 수는 없다. 지금의 내 직업이나 내 가족이나 내가 눈 떠 맞이한 오늘은 대체로 내가 삶의 여정에서 선택한 순간들의 결과로 인한 것이다. 물론 낳아주는 부모나 태어나는 사회나 국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일단 세상에 나와서 사는 동안엔 우리에겐 선택의 순간과 그 여지가 있었기에, A가 아닌 B를 선택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살았을지도 모른다. 직업도 친구도 배우자도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다른 선택을 한 나 자신이 다른 세상, 즉 평행 우주의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 지금, 여기, 나뿐이다. 내가 내 자신을 포기하는 순간 난 사라진다. 그러나 세상은 남아 있다. 잘 돌아간다. 결국 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 또한 존재하기 위해선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지금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난파선처럼 끌고 가면서 내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다.

철인 3종을 닮은 인생


삶은 철인3종과 비슷하다. 철인 3종 경기의 중계를 보는 사람은 그 지루함 속에 감춰진 고통과 찰나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 모든 철인은 세 가지 종목에서 전력을 다한다. 심장과 폐의 아우성을 다독이며 차가운 물속을 헤쳐 나가고 허벅지의 비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탄 후엔 지친 몸뚱이를 채찍질하며 지면을 차고 나간다. 구경꾼은 그 고통과 괴로움을 모른다. 그렇기에 승리의 기쁨과 완주의 환희 또한 오롯이 선수의 몫이다.

더 레슬러 스틸컷.
더 레슬러 스틸컷.

삶도 마찬가지다. 하루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말했듯이 “살아간다는 것은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이다. 이 장기전에서 승리는 둘째 치고, 이 승부 자체를 버텨내기 위해서는, 하루키의 말을 빌리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철인 3종 경기 선수가 자신이 잘하는 종목만 잘해서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는 것처럼, 물속에서도 물 밖에서도, 두 발로도 두 바퀴로도 앞으로 잘 나가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육체의 안과 밖, 영혼의 안과 밖의 조화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타인의 삶은 멀리서 보면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연민의 대상이다. 모두들 각자의 여정에서 만나는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내며 묵묵히 살아간다. 때론 아프고 때론 즐겁다.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내가 원하는 내가 오늘의 나는 아니어도 별 수 없다. 아직 삶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고 날 원하는 사각의 링과 날 부르는 조악한 무대가 있다면 올라가야 한다. 내일 출근할 곳이 있다면 일어나 가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른의 삶이란 결국 자기 결정에 책임지는 삶이다. 그 결과로 인하여 거울 속의 남루한 나를 마주할지라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삶이다. 성공도 실패도 스스로 결정했기에 그 영광도 후회도 자기 선에서 끝내는 삶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에게 의지하는 누군가의 삶을, 오늘 내가 책임지겠다고 결심한 누군가의 삶을, 내 1인분의 삶조차 버겁고, 그래서 그럴 능력이 부족해도 힘이 닿는 한 책임지는 삶이다. 두 비루하고 남루한 삶을 보며 우리가 배워야할 건 어쩌면 이러한 삶의 자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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