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평생 딱 한 번 프로야구 경기를 봤고 그 경기에서 본 홈런이 내 인생, 유일한 홈런 장면이다.

쌀쌀했던 알링턴


2017년, 9월 30일, 텍사스의 어머니 집에 도착한지 며칠 후였다. 그날, 텍사스 주 알링턴의 저녁은 쌀쌀했다. 텍사스 주 킬린에서 서너 시간의 드라이브 끝에 도착한 글로브 라이프 파크엔 낮 동안 날카롭게 뜨겁던 햇살이 쌀쌀한 바람에 물러나고 있었다. 빌딩과 빌딩, 집과 집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복잡한 도시 부산에서 엊그제 도착한 40대 남자의 눈에 터무니없이 넓어 보이는 주차장을 한참 걸었다. 화강암으로 된 튼튼한 벽과 그 위로 대성당의 종탑을 닮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두 개를 얹고 있는 파사드가 손님맞이를 했다. 주차장의 넓이를 압도할 만큼 웅장한 파사드는, 어찌 보면 망루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중세 시대 지어진 성채의 성루 같았다.

성문 같은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철골 구조물이 그대로 드러난 회랑이 나타났다. 경기장은 미국 야구 영화와 중계로 봤던 뉴욕 양키즈의 스타디움이나 보스턴 레드삭스의 펜웨이 파크의 전통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2차선 도로보다 넓은 통로 양쪽으로 각종 간식을 파는 매장과 기념품, 유니폼과 모자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계단으로 된 통로를 올라가니 마치 백화점 푸드 코트와 교외에 지어진 아웃렛이 합쳐진 풍경이 펼쳐졌다. 성벽처럼 높은 담장 안엔 촘촘히 네온사인 번쩍이는 옥외광고판들이 붙어 있었다. 경기 시작 전, 초록빛 필드가 보이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스테이크와 피자, 햄버거와 핫도그, 시원한 콜라와 맥주를 마시며 1회 초를 기다리고 있었다.

2014년 4월 2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 500명이 텍사스주 알링턴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열린 텍사스와 필라델피아 경기에서 준비한 피켓을 들고 텍사스의 톱타자 추신수를 응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4년 4월 2일,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 500명이 텍사스주 알링턴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열린 텍사스와 필라델피아 경기에서 준비한 피켓을 들고 텍사스의 톱타자 추신수를 응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의미 없는 경기, 열정적인 관중


의미 없는, 시즌의 잔여 경기였다. 이 경기 며칠 전, 포스트 시즌에 진출 실패가 확정된 텍사스 레인저스는 마지막 홈3연전을 오클랜드 어슬렉티스와 치러야 했다. 새아버진 멀리 한국에서 온 마흔이 넘은 아들을 위해 이 3연전 중 첫 경기를 예약했다. 우린 원정팀의 덕 아웃이 내려다보이는 3루 쪽, 관중석 2층에 앉았다. 몸을 푸는 오클랜드 선수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면 선수들의 문신과 목에 건 목걸이까지 보일 정도였다. 분명 제법 거리가 멀었는데도 잘 보였다. 어머닌 지나가는 맥주 보이를 불렀다. 청년은 병 모양의 알루미늄 캔에 담긴 버드와이저 맥주를 건넸다. 캔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맥주는 그 캔보다 차가웠다. 가을바람이 냉기를 가져가도록 캔을 의자에 한참 꽂아 놨었다.

텍사스 레인져스의 골수팬들이 관중석을 거의 채웠다. 허구한 날 지기만 하는 야쿠르트 스왈로즈 경기를 보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진구 구장을 찾았던 젊은 날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났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 운전하고 왔을 관중들의 표정엔 피곤한 기색대신 설렘과 흥분이 담겨 있었다. 포스트 시즌 탈락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인 건, 팬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경기 초반부터 텍사스 레인져스가 앞서가고 있었다. 그렇게 경기 초반이 지나가고 슬슬 지겨워지는 중반으로 넘어갈 때, 5회인가 6회, 왼쪽 타석에 마흔을 코앞에 둔 텍사스 레인져스의 베테랑 타자가 들어섰다. 초구를 밀어 쳤다. 그렇게 힘들여 친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날아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평범한 플라이 볼이 될 것 같았던 공이 좌중간 펜스를 넘어갔다. 추신수 선수의 2017 시즌, 마지막 경기, 마지막 홈런이었다. 커리어 하이, 스물두 번째 홈런이었다. 2022 시즌, 추신수 선수는 프로야구 커리어 최초 우승을 한국에서 맛봤다. 우승의 꿈을, 조국에서 이룬 것이다. 마이너 리그 시절까지 헤아리면 20년이 넘는 선수 생활 끝에 얻은 값진 우승이다.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가 2017년 9월 29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의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MLB)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경기에서 투런포를 터트리고 있다. 추신수가 이날 한 시즌 개인 최다 타이기록인 22호 홈런을 쏘아 올린 가운데 텍사스는 5-3으로 승리했다. (사진=연합뉴스)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가 2017년 9월 29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의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열린 미국프로야구(MLB)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경기에서 투런포를 터트리고 있다. 추신수가 이날 한 시즌 개인 최다 타이기록인 22호 홈런을 쏘아 올린 가운데 텍사스는 5-3으로 승리했다. (사진=연합뉴스)

꿈 속의 목소리를 따라


<꿈의 구장>은 1919년 MLB 역사상 가장 큰 승부조작 사건인 블랙삭스 스캔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영구 제명 된 선수들이 유령으로 나타다 꿈의 구장에서 야구를 한다는 내용이다. 평범한 농장주 레이는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옥수수 밭을 갈아엎는다. 야구장을 지으면 그가 온다는 데, 온다는 사람이 누군지, 언제 오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어놓고 나니 메이저 리그 역사에서 사라진 전설적 선수가 옥수수 밭 저편에 스윽 나타난다. 혼자 나타났던 그 선수가 다음엔 다른 선수들도 데려온다. 여기서 계시가 끝나면 다행인데, 이젠 은둔의 작가를 찾아 그와 함께 한 경기만 하고 사라진 선수를 찾아오라고 한다. 그렇게 돌아온 꿈의 구장, 더 신비로운 일들이 이어진다.

이 영화의 핵심 설정은 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다. 옥수수 밭 한가운데 있는 야구장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전설들이 펼치는 야구는 아무나 볼 수 없다. 꿈을 꾸는 사람에겐 그 꿈이 선명하지만 아무리 선명한 꿈이라 해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녹음과 녹화를 반복하면 훼손되는 아날로그 시대의 음악과 영상처럼 꿈 또한 말해지는 순간 풍화 된다. 이 영화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현실에도, 꿈에도 그 나름의 규칙이 있다.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사람에겐 현실의 규칙이 장애가 된다. 현실의 규칙에 충실한 사람은 야구 규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꿈의 규칙이 낯설다. 둘 사이엔 결국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간극을 인정하지 않으면 거기서 소통은 끝난다. 현실의 규칙에 충실히 사는 사람에겐 그 규칙에 아랑곳하지 않고 꿈을 꾸는 이가 철이 없어 보일 테고, 광대한 옥수수 밭에 야구장을 만드는 것처럼 현실 속에 꿈의 규칙이 꽃 피울 자리를 마련하려는 꿈꾸는 이에겐 그 사람이 현실에 눈이 먼 사람 같을 것이다.

꿈의 구장(Field Of Dreams, 1989) 스틸컷.
꿈의 구장(Field Of Dreams, 1989) 스틸컷.

 

현실적인 조언, 꿈의 공동묘지


추신수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꿈을 꾸며 오랫동안 마이너리그에 머물 때, 이제 그 꿈을 접고 한국에 들어가서 야구하라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우승의 꿈을 이루기 위해 현역 생활을 이어가려 할 때, 할 만큼 했으니 다른 인생을 살아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 그런 말을 하면서 현실적인 조언이라고 첨언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의 꿈이 가진 무게와 깊이를 다 알지 못한다. 게다가 꿈을 포기한 자에게 평생 따라다니는 후회 또한 그들의 몫이 아니다. 그런 “현실적인” 사람들 때문에 죽은 꿈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는 꿈의 공동묘지일지도.

살아 있는 꿈은 여기가 천국입니까(is this Heaven?)라고 묻는 영화 속 대사처럼, 꿈이 이뤄진 순간은 천국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 천국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의 마음에 이미 도래해 있는지도 모른다. 20년의 선수 생활 동안 꿈꾸던 우승을 드디어 이뤄낸 추신수 선수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더불어, 내가 실제로 본 유일한 홈런 장면, 평생을 간직할 그 장면을 남겨준 것에 대한 감사함도.

2021년 8월 13일, 실제로 메이저리그 경기가 이 필드에서 열렸다. 그 스캔들의 당사자였던 두 팀, 뉴욕 양키즈와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경기였다. 물론, 당연하게도 초록색 필드 위로 흰 색 셔츠를 입은 케빈 코스트너가 옥수수 밭에서 걸어 나왔고, 그 뒤를 따라 선수들도 옥수수 밭에서 유령처럼 나타났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이 경기를 위해 8천 석의 좌석을 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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