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업(Up)'을 생각하는 이유

영화 업(Up, 2009)
영화 업(Up, 2009)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애니메이션 <업>을 소재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사람은 흔들리며 사는 존재고, 그것이 사람다움을 만드는 것이라고 썼었다. 요즘 이 애니메이션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검도 도장 승합차에서 내린, 곰돌이 푸우와 몸매가 비슷한 꼬마가 스마트 폰에 고개를 처박고 나와 딸 쪽으로 걸어왔다. 한마디 했다. "고개 들고 앞을 봐라." 아이는 고개를 들고 걸어갔다.

이 아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언젠가 말했듯, 울산의 작업실에 가는 날과 오전 일찍 중요한 미팅이 잡힌 날을 제외하곤 지난 4년여 동안 딸의 등하굣길을 동행했다. 1학년 때의 등하굣길엔 그런 아이들이 안 보였는데 해가 지날수록 스마트 폰에 시선을 꽂아둔 채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그 사이 숏 폼 영상을 보여주는 플랫폼이 많이 늘어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또 게임을 접하는 나이가 점점 더 어려져서 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앞을 보지 않고 걷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이와 등하교를 하며 스마트 폰에 고개를 박고 걷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까지, 아니 내려서도 스마트 폰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걱정을 한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지성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문제까지 다다르는 것은 아닐까? 짧은 영상에 길들여져서 뇌의 지구력과 생각하는 힘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업>에 나오는 우주선 속 지구인처럼 그 육체 또한 힘이 떨어지고 비대해져서, 결국엔 기계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말고는, 스스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로 퇴화하는 건 아닐까?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곤 한다. <업>에 나오는 비대해진 퇴화 된 몸뚱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이유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디 애들뿐인가. 앞서 말했듯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나뿐이다. 부산 시내의 지하철은 물론이고 벡스코역에서 태화강역까지, 동해선을 타고 가는 50분 동안 책을 읽는 사람은 대체로 나 하나뿐이다. 한 달에 한번쯤 책을 읽는 다른 사람을 보는데, 생각보다 반가움이 크다. 그 사람이 무협지를 읽든, 만화책을 읽든, 불경이나 성경을 읽든 여하간 활자를 읽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주책없이 반가움이 앞선다.

다들 알다시피, 내가 책을 읽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본다. 뉴스로 보고 현재 서울로 장기출장 가 있는 처남한테 말을 들어보니 서울 및 수도권 지하철을 타고 오가는 이들에겐 책을 읽을 만한 공간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 같다. 솔직히 책을 펼 공간이 없을 만큼 빡빡한 지하철이라면 스마트 폰을 꺼내어 볼 공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는 부산의 지하철은 솔직히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여유가 있다. 오전 시간엔 앉을 자리도 있고, 저녁 여덟시만 되도 좌석이 남아돈다. 동해선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책을 펼 공간적 여유가 없어 부득이하게 스마트 폰을 볼 수밖에 없다는 건 납득이 안 간다.

수련, 단련, 공부


스마트 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어이없는 뉴스가 시선을 끌었다. 웹툰 작가 사인회가 예정됐던 서울의 한 카페 측이 예약 오류에 대해 트위터 사과문을 올리며 사용한 “심심한 사과 말씀드린다.”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일부 네티즌이 이 사과문을 놓고 “심심한 사과라니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무슨 심심한 사과?”라고 댓글을 단 것이다. 카페 측이 올린 ‘심심하다’(甚深하다·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의 뜻을 ‘지루하다’는 동음이의어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예전에 사흘을 사일과 혼동하고 금일을 금요일로 착각했다는 뉴스에 버금가는 뉴스였다. 이런 뉴스의 반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칼리그래피=이톡뉴스)
(칼리그래피=이톡뉴스)

예전에 김용옥 선생님이 한 강의에서 "공부와 쿵푸는 한자가 같다. 몸을 단련하는 것과 이성과 지성을 단련하는 것은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대뜸 열 번 가량 푸쉬 업을 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쿵푸(功夫)의 한자는 한국에서 말하는 공부(工夫)와 그 한자는 다르나 의미는 같다. 중국에선 무술은 물론이고 모든 숙달된 기술을 칭할 때, 앞의 쿵푸를 쓴다고 한다. 쿵푸에 이런 두 가지 의미가 담긴 것이라면, 분명 요즘엔 그 두 가지 쿵푸의 수련이 부족한 것이 분명하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한쪽만 발달 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육체와 정신 모두 정체되어 있거나, 심지어 퇴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 딸이 두 개의 의미를 가진 공부와 쿵후, 양쪽 모두를 수련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에게 엄격하길 바란다. 우리의 뇌도, 몸도 하나뿐이어서 사는 내내 가꾸고 지켜야 하고 그건 일종의 주체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일전에도 말했지만, 딸하고 많이 걷는다. 등하교는 물론이고 지하철 한 코스정도는 당연히 걸어가야 하는 거리로 인식시켰다. 운동은 취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인간인 이상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 시간을 들이는 것을, 독서와 공부에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깝지 않은 것처럼 절대로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 독서와 운동을 통해 시간을 들여야만, 그것도 아주 긴 시간을 들여야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려하고 있다. 음악 줄넘기의 일부 고난도 동작은 몇 주 만에 되곤 하기에, 딸은 이미 그것을 절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소룡 쿵후 모습. (사진=인스타그램)
이소룡 쿵후 모습. (사진=인스타그램)

 

문해력은 문제의 일부일지도


고미숙 선생이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에서 읽기와 쓰기가 동시적이라고 말한 것처럼 두 개의 공부/쿵푸 또한 그렇게 서로 연동된다. 문해력은 문제의 일부일지 모른다. 이 시대를 사는 어떤 이들에겐 육체와 정신이 생을 헤쳐 가는 도구로 인식되지 못하여, 그것을 수련하는데 게을리 한 결과 이런 해프닝 같은 뉴스가 생산됐는지도 모른다.

걷는 인간, 사유하는 존재는 결국 같은 모양새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고 가는 존재다. 전망과 사색을 하며 앞에 놓인 길을 모색하며 나아가는 인간이다. 한자를 보면 사색과 모색의 색은 같다. 사색의 사는 생각할 사(思)이고 찾을 색(索)이다. 모색의 모(摸)는 손을 내밀어 더듬어 찾고 가늠하고 그것을 그러쥔다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사색은 모색의 전 단계가 될 터이고, 결국 사색이 없는 인간은 모색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색만 하고 모색하지 않는 인간은 어떤 것도 손에 쥘 수 없을지 모른다. 결국 지적인 진보든 육체적 진보든 한번 뿐인 삶을 소중하게 여겨 오늘 몸과 머리를 움직이는 사람만이 이뤄낼 것이다. 그 진보를 위해, 김용옥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상투적인 말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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