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산에 오르는 사람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페이스북 친구인 최근영 씨를 잘 모른다. 만난 적도 없고 정확한 직업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건, 이 글을 쓰고 고치는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울산의 어느 산을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는 것뿐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아낸 근영씨의 파편적인 정보는 이렇다. 태풍 마이삭 이후부터 울산의 천마산을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plogging)을 해 왔고, 이 활동에 지역민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최근에는 일종의 지역의 환경운동으로 자리 잡게 됐다는 것 정도다.

내가 이 운동의 근본적 목적을 선명하게 느끼고, 더 나아가 환경 운동의 근본적 소명이 뭔지 생각해 보게 된 건, 어느 날 근영씨가 페이스 북에 올린 꼬막 껍데기 사진과 양념으로 곁들인 아주 가벼운 농담 같은 글 때문이었다.

"산에서 꼬막을 줍는 이유는 수 천 수 만 년이 지나고 '남산(솔마루길)이 예전에 바다였다'라고 기록될까봐." 사진과 글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산꼭대기까지 꼬막을 싸들고 가서 먹고 그 껍데기를 훌쩍 버리고 오는 사람도, 매일 산을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줍는 근영씨만한 의지가 필요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문구를 반복해서 읽다보니 묘한 묵직함이 전해졌다. 흔히 이 지구를 다음 세대에게 잠시 빌려 쓴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고 보는 고향의 풍경을 최대한 보존해서 후대에 전해주는 것이 지역 환경 운동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몇 년 전 보았던 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몇 몇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영화
영화 "내일(Demain, Tomorrow, 2015)" 포스터.

다음 세대를 위한 실천들


다큐멘터리 영화 <내일(DEMAIN, 프랑스영화)>은 인류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류의 멸망에 관한 영화는 아주 많다. 이런 영화들은 주로 기상이변이나 바이러스, 외계 생명체, 전쟁, 좀비 등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전설이다.>,<월드워Z>, <28일 후> 같은 영화들이 이런 종류의 영화들인데, 이런 영화들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라고 한다. 이런 영화의 이야기 중심은 종말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과 그들의 생지옥 같은 지구에서의 생존 투쟁에 있다. 그러다보니 지구와 인류가 막장에 다다르게 된 원인에 대해선 서두에 짧게 얘기하고, 바로 살아남은 자의 서사로 넘어간다. 결국 인류의 종말이 텍스트에 갇혀 오프닝 크레딧 같은 취급을 당해 버리고, 관객은 종말에 관한 영화를 그리 많이 보면서도 스스로의 종말에 대해 상상하거나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내일>의 초반부, 영국의 환경 활동가 롭 홉킨스가 지적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영화 속 공포는 바이러스에 감염 된 좀비와 생존자의 투쟁이나, 재난 속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류의 사투로 유발되다보니, 당연히 인류의 종말과 그 원인이 현실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말이 텍스트에 갇혀 버렸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가상의 공포가 현실의 공포를 은폐하고, 가상의 종말이 현실의 그 가능성을 덮는다.

정말 인류에게 기후변화나 기상 이변으로 인한 종말이 올까? 난 그쪽으론 문외한이고 솔직히 말하면 관심이 없다. 그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분리배출을 충실히 하는 평범한 아저씨에 불과하다. 반면 영화 속에는 나와 달리 이 공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뭔가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디트로이트에서는 빈민가의 빈집과 비어버린 공장과 창고를 활용해 도시 농업을 한다.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채소와 과일과 같은 좋은 먹거리를 먹게 해서 패스트푸드의 길들임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비만 문제 해결에 도전한다. 더불어 경제적 재활과 도시재생도 도모한다.

영국의 토트모든에선 곳곳의 빈 땅에 채소를 심었다. 이 또한 아이들에게 좋은 먹거리를 먹이려는 프로젝트이자 공동체 커뮤니케이션의 색다른 시도다. 이 마을 곳곳에 다양한 베리 종류와 허브들, 과실수, 옥수수 등을 심어서 아이들에게 직접 수확하고 맛보게 한다. 어떤 작물이 어떤 시기에 맛이 있고, 자라는 과정 속에서 언제부터 먹을 수 있는지 체감케 하는 것이다.

두 지역의 노력은 공동체 복원과 환경 운동이면서 동시에 음식 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실천이기도 하다. 식재료 교육은 농작물 품종의 다양성 유지를 위해서도, 민속학과 인류학적 맥락에서도 꼭 필요하다. 먹거리에 관한 정보의 축적, 이에 대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학습은 일종의 문화유산의 전달이다. 된장, 고추장 담그는 법, 술 담그는 법과 거기에 들어가는 식재료를 기억하고 다룰 줄 아는 법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거대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같은 계절, 같은 풍경, 같은 입맛


조만간 이런 노력이 우리에게도 절실해지지 않을까? 작물 북방한계성은 더 위로 올라갔다. 내가 사는 부산 인근 지역에선 열대 과일을 키우는 농장도 흔하다. 심지어 경남 산청에선 바나나도 키운다. 이런 뉴스를 보다보면 내게 기억된 봄날의 풍경과 봄날의 입맛을 내 딸도 누릴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내가 추억하는 부산 어느 골목의 여름 풍경과 내 딸의 그 골목 풍경에는 다른 꽃이 피어있진 않을까? 우리가 3월에 벚꽃을 보고 가을엔 단풍을 보는 당연한 축복을, 동해에서 잡은 명태로 만든 생태탕에 한 그릇에 담긴 이 땅과 바다의 축복을 내 딸도 누리고 살 수 있을까? 내 딸이 그 축복을 못 누린다면 그건 누구 탓일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 끝에 환경 운동의 절실함과 명분이 내 현실로 와 닿았다.

환경운동은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온 이 국토와 고향의 풍경을 어떻게든 지켜내어 다음 세대에게 건네주려는 노력의 하나 아닐까? 이를 통해 지금 우리의 삶과 후손들의 삶이 같은 모양새로 살게 하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문화인류학적 유산을 지켜내는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이, 무더위를 조심하라는 안전안내문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플로깅을 하며 산을 오르내리는 최근영씨와 그 일행의 행동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천하는 사람이 지켜내는 고향 풍경


난 근영씨와 이웃의 실천이 유난스럽고 글로벌한 그레타 툰베리의 퍼포먼스보다 훨씬 더 지구 환경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제트 여객기로 불러 모은 영국의 노련한 선원들을 대동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겠다며 태양광 요트로 대서양을 횡단한 그 위선의 항해와, 유엔에서의 연설이 지구 환경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난 모르겠다. 덕분에 그녀가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이 됐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퍼포먼스가 같은 해 있었던 홍콩 민주화 운동보다 더 가치 있는지, 난 모르겠다.

그린피스가 북극곰 뱃지와 맞바꾼 후원금으로 북극곰을 몇 마리나 살렸는지는 몰라도 딸이 미래에 먹을 생태탕에 들어갈 동해의 명태를 복원하는 건 강원도에 있는 수산자원센터라는 건 안다. 어렵게 부활한 명태가 계속 동해에 머물 수 있게, 우리의 바다를 깨끗이 만드는 건 박카스 광고에 나온 다이버 부부 문수정, 김용규씨나, 며칠 전 다큐멘터리에 나온 디프다제주와 같은, 고향의 바다와 내가 사랑하는 바다 속을 청소하고 아끼는 평범한 사람들의 실천이라는 건 안다.

오늘도 근영씨의 페이스북엔 언제 어느 산에서 청소합니다, 하는 글이 올라왔다. 근영씨는 누가 오고, 몇 명이 오는지는 모르지만 올라간다. 근영씨가 그곳에 가면 약속하지 않은 이웃이 온다. 그들은 함께 산에 오르내리면서 쓰레기를 줍고 헤어진다. 깃발도 없고, 슬로건도 없다. 조직도 없고, 규칙도 없다. 단지 사랑하는 고향의 풍경, 지키고 싶은 고향의 풍경이 있을 뿐이다. 그 실천이 오늘 우리가 본 풍경을 다음 세대도 볼 수 있게 할 것이라,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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