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년간 존속한 독립언론

 

'권력'의 속성에 대해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부패와 권력 남용에 관해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중국이라는 당시 거대한 나라의 관제 영향도 있었지만, 권력이라는 힘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이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음을 역사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는 오롯이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도 주어진 권력이 절대권력이 될 수 없도록 견제하는 제도와 수단은 존재해 왔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보다 좀 더 체계적이고 권력이 절대권력이 되지 못하게끔 하는 정치적 제도와 기구가 잘 발달해왔다. 이에 이코노미톡뉴스는 2020년 8월 올해로 창간 21주년을 맞아 권력을 감시했던 한국언론의 태동을 권력감시 즉, '관리(공무원) 감찰'에서부터 절대자(통치자)의 감시까지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살펴보려 한다. (편집인주)

KBS 드라마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 스틸 컷.

[안경하 기자·배만섭 기자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국가적인 시스템을 갖춘 체제 속에서 권력을 감시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척도 중에 하나는 독립성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문제다.

과거 세계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거대 권력은 대부분 왕권이었다. 군주 밑에 존재했던 신하는 군주에 비해서 상대적 다수의 속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군주를 견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과거 삼국시대부터 왕이나 백관(지금의 공무원)을 감시하는 기구가 있었으나 가히 독립적이진 못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왕과 권력을 견제·감찰하는 독립된 기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기원 이전부터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에서 아테네보다도 이른 세월에 왕과 권력을 감시하는 독립적인 감찰을 한 집정관 체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민주정이 아닌 과두정이지만 왕을 견제함에 있어 독립성은 민주주의로 발전한 아테나보단 빨랐다.

사간원(司諫院), '왕을 바로 잡다'


간쟁(諫諍)이라 함은, 군주의 언행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이를 지적하고 바로 잡는 일이다. 이러한 간쟁을 주요 업무로 한 곳이 조선시대 '사간원'의 역할이었다. 지금의 언론에 해당된다.

간쟁의 역할에는 사헌부도 있었다. 사헌부는 본래 관리들의 행태에 대한 감사 및 탄핵  업무가 주 업무지만, 왕에 대한 비판과 지적의 역할도 겸했다. 조선의 언론 3사(三司)중의 하나인 홍문관(弘文館은 왕의 자문역할을 담당했다.

언론 3사는 독립적이나 신하들이 왕을 견제하는 장치로서의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시되었다. 

사간원과 사헌부의 소속의 관리 임명은 서경(署經)을 통해 이루어진다. 왕이 지정한 후보자들 중에서 엄격한 심사, 지금의 청문회,를 통해 사간원과 사헌부 소속 대간(臺諫)의 서명을 거친 후에 최종 임명된다. 군주가 추천한 후보자는 해당 관리의 본가 및 외가의 4대 조상의 행적까지 조사해 오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과할지라도 사헌부가 거절하면 왕은 이를 따라야 했다.

이러한 임명 절차에 있어, 조선의 사간원과 사헌부는 왕으로부터는 독립적이라 칭할 수 있다. 하지만 서경제도를 거쳐야되는 조선의 모든 관리 임명 절차는 조선보다 고려 시대가 오히려 군주의 임명권에 더 많이 견제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서는 5품 이하의 고위 관직의 임명에서만 서경을 거쳤으나, 고려 시대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든 관리의 임명에서 대간의 동의가 필수였다.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사진=이코노미톡뉴스DB)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사진=이코노미톡뉴스DB)

사헌부 폐한 연산군·부임 불능할 뻔한 이순신


방탕한 생활을 했던 연산군은 성균관 폐지에 이어 왕에게 직언을 했던 사간원도 폐지했다. 1506년 4월 11일이다.

최측근이었던 궁궐 내관 김처선의 폭정을 금지하려는 간언에 직접 칼로 그의 양 팔을 절단해 죽여버리기 까지도 했을 정도로 연산군은 폭정을 일삼았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사간원은 부활하였다. 이후 사간원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 소속의 도찰원으로 개편되면서 소멸했다. 사간원은 1402년(태종 2년)에 태어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기 까지 492년간 존속한 것이다.

1590년(선조 23년), 유성룡은 종3품의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이순신을 천거했으나 사간원은 10급 승진이 무리하다고 간언해 철회되었다. 바로 이어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로도 천거되었으나 이 또한 사간원이 거부해 개정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나이는 46세였다.

1591년, 유성룡은 사간원의 반대를 회피하기 위해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바로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의 임명을 천거했다. 선조는 사간원의 반대표를 2번이나 뿌리치고 이를 승인했다.

정리하자면, 조선의 사간원은 조정에 속했지만 왕으로부터는 독립적 활동을 보장받았으며, 5품 이하 고위 관직을 왕이 임명하기 위해서는 사간원의 서명을 통과해야 했을 정도로 막강한 언론 파워와 직언을 서슴치 않은 언론 자유가 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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