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jamin Disraeli(1804 ~ 1881)
디즈레일리 생애의 시련과 그 극복

1878년 수상당시의 벤자민 디즈레일리. (사진=위키피디아)
1878년 수상당시의 벤자민 디즈레일리. (사진=위키피디아)

[이동희 오성연구소 이사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우리의 민주시민사회에서 미래의 다양한 꿈을 품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또는 아직도 70여 년 동안 그대로 남아있는 휴전선에서 군대복무를 하고 있는 영원한 공인들에게 그리고 실제로 한국 정치현실에서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도 내가 존경하는 정치가의 한 인생교훈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하면 우리조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앞으로 위대한 정치가가 많이 배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명재상 벤자민 디즈레일리(Bebjamin Disraeli)를 소개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영국, 신사 정치의 멋을 찾아서〉라는 1993년도 나의 학술적인 영국순례의 기행문을 발췌하여 게재하고자 한다. (기자주)

디즈레일리 생애의 시련과 그 극복


영국의 전성기인 19세기 빅토리아(Victoria) 여왕시대에 디즈레일리는 오늘날의 대영제국을 창건하고, 그야말로 해가지지 않는 국위를 세계에 떨치게 한 정치가였다. 그렇다고 그는 순풍에 돛을 단 행운의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39년 동안의 정치생활 중에서 32년 동안을 가시방석 같은 야당의 의자에만 앉아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비운의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던가?.

겨우 늙어서 70세를 전후하여 2회에 걸쳐 7년 동안 집권여당의 재상이 되었지만 오늘날의 영국과 보수당에 그처럼 새로운 정치이념을 불어넣은 정치가도 드물었다. 그에 대한 흥미의 절반은 그의 정치적인 맞수인 자유당의 그래드스톤(Gladstone)의 존재에도 있었다.

그는 영국 최대의 평민이고 민중정치가로서 당대의 민권운동에 존경받아온 웅변가였고, 종교가이기도 하였다. 옥스퍼드(Oxford)출신의 부잣집 아들로 정가의 총아로 각광을 받으며 일찍부터 오랜 집권을 한 행운의 정치가였다.

반면 디즈레일리는 아주 보수적인 영국의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부르주아나 귀족도 아닌 출신으로 그 사회에서는 도저히 정치가가 될 수가 없었던 조건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입신출신담은 마치 동양의 삼국지보다도 흥미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1864년 5월에 우연히도 이 두 사람은 토론 중에서 미래의 영국에 대한 비전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디즈레일리가 원대한 꿈같이 제창한대영제국론이라면, 그래드스톤은 그 당시 혁명적인 '일반보통선거론'이었다. 이 양대 지도이념이 그 후 100년 앞을 뚫어보면서 근대적인 영국의 양당제도와 정치의 틀을 만들고 서로 정권을 교체하면서 영국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정치제도를 세계에 수출하였던 것이다.

첫째, 그는 영국에서 한낱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소설가 출신이었다. 다만 아버지가 그를 기독교신자로 개종 해주었고, 그래서 겨우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원래 그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장사꾼이었으나 그의 부친은 상업과는 거리가 먼 독서만 평생 하다가 인생을 마친 문인이었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가 아들 디즈레일리를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시켰을 것이다.

둘째, 그는 그 당시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 출신이 아니면 명함도 낼 수 없는 학벌정치에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중태라는 학력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식학벌은 없었지만 집안분위기에서 독자적인 독서로서 당대의 의회토론에서 그의 해박한 지식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후에 드디어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 대학의 존경도 남달리 많이 받았다.

셋째, 그는 돈이 없었다. 그 시대의 정치는 부자놀음의 하나였다. 오히려 돈을 쓰기위한 정치의 멋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영국정치계에서 그는 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8만 파운드 빚 때문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빚쟁이에게 졸리고 평생을 지내면서도 오히려 그 빚쟁이들에게 늘 "자네가 없었으면 나도 편안하게 글도 안 쓰고 게을러졌을 것 일세!"라고 오히려 감사했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전화 한통화로 스웨즈(Suez) 운하를 매입할 정도로 경제계에서도 엄청난 자본 동원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인도를 영국 연방영토로 집어넣어서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의 여 황제로 만들고 …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요새말로 이권과 부를 얻을 수 있었던 기회와 힘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빚을 끝내 못 갚고 수상 직에서 물러나고 은퇴를 했으며 런던에 집 한 칸이 없었다.

필자(이동휘) 주요 경력

육사11기,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장(준장)
前 서경대학교 석좌교수, 前 청주서원대학교 총장, 前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총장
現 오성(五成)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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