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漢文學)의 대가(大家)
관료로서의 생애… 영의정으로 서거

[최종인 칼럼 @이코노미톡뉴스(이톡뉴스)] 조선이 개국한 지 2백년이 지나면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문화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라는 걸출한 학자가 배출되어 성리학은 완숙단계에 접어들고, 두 분의 이론은 그들의 제자들에 이어지면서 심학(心學)의 체계가 이루어지고 예학(禮學)으로 더욱 심화되어 발전되었다. 그러나 학문의 분화와 전개는 동시에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당파의 형성을 초래하였고 때때로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으로 치닫기도 하였다. 선조에서 광해군을 거쳐 인조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꽃은 만발하면서도 왜란과 호란 그리고 인조반정이라는 정변으로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 시대에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등장하는데 한문학에서도 당대를 풍미한 문장가로서 이른바 월상계택(月象谿澤)을 후세 사람들은 꼽는다. 네 사람의 아호 머리글자를 따서 합쳐 일컫는 말로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상촌(象村) 신흠(申欽), 계곡(谿谷) 장유(張維), 택당(澤堂) 이식(李植)을 일컫는데, 그중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은 신흠의 활동을 조명해 본다.

▲ 상촌(象村) 신흠(申欽) 묘소 전경. <사진@광주시청>
한문학(漢文學)의 대가(大家)

일찍이 7세에 부모를 잃은 신흠은 어린 시절을 외할아버지 송기수의 집에서 자란다. 한성판윤을 지낸 외가에는 책이 많아 공부하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송기수와 이제민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벼슬하기 전부터 글 솜씨가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벼슬에 나아가서는 간결한 성품과 빼어난 문장으로 선조 임금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맡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文運)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편·저서로는 상촌집(象村集)과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낙민루기(樂民樓記)·고려태사장절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公忠節碑文)·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을 상징하는 대표적 시문집으로서 상촌집은 죽은 지 2년 후인 1600년(인조8)에 그의 아들 신익성이 22권으로 발간하였다. 이 문집의 특징은 그가 살았던 선조~인조연간에 점철된 왜란과 호란 그리고 당쟁이 빚은 기축옥사와 광해군의 난정 및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의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그간의 활동경륜과 문학·학술·사상·도덕과 공업(功業)이 담겨져 있으며, 정치·외교·군사에 관한 중요한 사료도 포함하고 있다. 

관료로서의 생애… 영의정으로 서거
▲ 상촌 신흠 신도비. <사진@광주시청>

약관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사랑으로 있을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신흠은 율곡을 탄핵하는 것을 보고 ‘이이(李珥)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 라며 율곡을 옹호하는 말을 하여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겨우 종9품인 성균관 학유에 제수되었다가 그 뒤 경원훈도로 나가고 광주훈도를 거쳐 사재감 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을 거쳐 예문관 봉교·사헌부 감찰·병조좌랑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순변사 신립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여했다가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공으로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전쟁으로 대명외교문서의 폭증으로 지제교·승문원에서 일하고 1594년 이조정랑으로서 역적 송유진의 옥사를 다스리고 사복시 첨정에 승진하였다가 곧 집의에 초수되었으며 같은 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위한 주청사 윤근수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군기시정에 제수되었다.

1595년 함경도 어사와 의정부 사인을 거쳐 장악원 정·성균관 사예·종부시 정·세자시강원 필선·홍문관 교리 및 응교·의정부 사인·홍문관 전한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599년 아들 익성(翊聖)이 선조의 부마로 간택되면서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가 형조참의 겸 승문원 부제조를 거쳐 병조참지·우부승지·이조·예조·병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01년 《춘추제씨전》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승자되고 예문관 제학이 되었으나 충무위부호군으로 좌천되었으나 곧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서 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자헌대부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에 되었다가 병조·예조판서, 상호군·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영창대군 보필 명받은 유교7신으로 파직도

1608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을 지은 후 예조판서가 되었고 동지경연사·동지성균관사·예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7신(遺敎七臣)으로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며, 인목대비의 폐비와 관련하여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다.

1623년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 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 해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여 전주로 피란하였고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서거했다.
 신흠의 자(字)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현옹(玄翁)·방옹(放翁) 등 여럿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배위는 청강(淸江) 이제신의 따님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인조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 145호이다. 
<자료협조: 문정공 상촌의 15세 성균관 전인 석전교육원 총동문회장 신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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