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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징비록’ 남긴
대감 유성룡(柳成龍)
‘유비무환’ 역사적 교훈 어찌 변할까

글/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조선왕조는 선조(宣祖)라는 용렬한 국왕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참화를 당했다. 그때 유성룡(柳成龍)과 이순신(李舜臣)이 없었다면 국가는 완전히 멸망하고 일본의 속국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것은 안에서 유성룡이, 밖에서는 이순신과 의병들이 자기 한 몸을 버리고 힘을 다해 싸웠기 때문이다. 유성룡과 이순신이 선조가 훌륭한 임금이어서 그를 위해 충성을 바치려고 귀중한 한 목숨을 희생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나라의 멸망을 막고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망국위기 속의 서애 유성룡의 헌신

▲ 류성룡의 편지 서신. <사진저작권=퍼블릭도메인>

엽기적인 국왕 선조가 장수들이 왜적을 무찌르고 물리치는 동안 한 일이라고는 적이 보이기도 전에 달아난 것과, 아군 장수들을 죽이고 죽이려고 들었던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김덕령(金德齡)을 죽였고, 유성룡과 이순신과 곽재우(郭再祐)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난이 끝나자 나라를 구한 공로는 오직 명나라 덕분이라고 했다. 선조는 임금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조 29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20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왕조는 삽시간에 망국의 위기를 맞았다. 이때 유성룡은 조정에서 국가의 보존을 위해 비상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밖에서는 유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여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
유성룡은 200년간이나 쌓여온 악폐를 해소하기 위해 면천법(免賤法)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고, 속오군(束伍軍)을 설치했다. 면천법은 노비들이 군공을 세우면 노비에서 해방하여 벼슬을 주는 법이고,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軍布)를 걷는 법이다. 속오군은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게 하는 법이다. 또한 작미법(作米法)도 추진했다. 뒷날 대동법(大同法)이라고 불린 혁신적 세제였다. 쉽게 말해서 농토가 많은 양반들은 그만큼 세금을 더 내라는 법이었다.
이에 그동안 쓸모없는 글재주나 농하고 논쟁이나 일삼다가 나라를 거덜 낸 양반 벼슬아치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신분적 이익을 침해당하게 되자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자기네 이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양반들의 온갖 비난과 반대를 무릅쓴 유성룡의 혁신적 조치는 백성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 마침내 조선은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런데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왜군이 물러가기 시작하자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성룡을 내쳤다. 반대파에서는 유성룡이 왜와 강화를 주장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유성룡은 7년간의 전쟁 내내 강화를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군 침략을 예견한 지도자

유성룡도 임진왜란을 앞서 예측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유성룡은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형조정랑으로 있던 권율(權慄)을 의주목사로 천거하여 전란에 대비토록 했다. 또 국방체제를 문제가 많은 제승방략제를 진관제로 바꿀 것을 건의했으나 아직도 태평성대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선조는 왜란이 일어나고 상주와 충주전투에서 패전했다는 보고를 받기 무섭게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정상적인 왕이라면 국난을 당하여 비상내각을 구성, 도성 수호의 결의를 다지고 결사항전을 독려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선조는 적군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길을 택한 비겁하고 무능한 인간이었다.
구원군으로 온 명군이 전투는 피한 채 군량만 축내자 조정은 조선군 양성을 위해 훈련도감을 설치했다. 제조에 유성룡, 유사당상에 이덕형(李德馨), 대장에 조경(趙儆). 포수·살수·사수로 구성된 훈련도감은 사실 유성룡의 머리에서 나왔으나 <선조실록>에는 이것이 선조의 창안으로 둔갑되었다. 그동안 선조는 여러 차례 양위 소동을 벌였는데, 사실 그것은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음흉한 쇼였다.
유성룡이 민생 회복을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상업을 장려하자 양반들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유성룡은 심신이 고달팠다. 강화회담이 재개됐으나 진전은 지지부진했다. 유성룡은 왜군의 재침을 예견하고 방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했던 당쟁이 재연됐다.
1597년 1월에 이순신의 실각을 노린 왜군의 음모에 따라 간첩 요시라가 활약했다. 이에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 군 수뇌부가 놀아났고, 서인들의 음모에 맞장구 친 선조가 이순신을 비난했다. 결국 이는 유성룡에 대한 반감을 그가 추천한 이순신을 공격함으로써 드러낸 것이었다.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증오는 자신은 백성들의 조롱을 받는데 반해 이순신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왕권이 형편없이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참으로 엽기적인 임금이었다.

탄핵 파직 ‘징비록’ 남겨

이순신을 내쫓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한 원균(元均)은 그해 7월 14일에 벌어진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참패를 당했다. 7월 22일 선조는 이순신에게 다시 통제사 직을 내렸다. 이순신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그해 9월 16일 세계해전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인 명량대첩을 거뒀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회복하자 일본군은 군량 보급 길이 막히고, 수륙병진작전에 차질을 빚게 됐다.
조명연합군은 일대 반격에 나섰다. 그런데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8월 18일 전쟁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8월 28일 일본군 총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전쟁이 막을 내릴 조짐이 보이자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성룡을 내치려고 했다. 이를 간파한 북인들이 대거 가세하여 유성룡을 탄핵했다. 이들이 유성룡을 탄핵한 실질적 이유는 속오법과 작미법 등으로 양반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했기에 이에 반발한 것이었다. 양반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해 11월 19일에 유성룡은 파직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순신이 노량해전에 임할 때였다. 이순신은 노량해전 전에 고금도 통제영에서 유성룡의 탄핵 소식을 듣고 “시국이 어찌 이 지경이 됐단 말인가!”하고 길게 탄식했다.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에 파직당한 유성룡은 그 이튿날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청렴결백한 관리였던 유성룡이 여비가 없었다. 길을 떠난 지 이틀도 못되어 양식이 떨어진 유성룡은 하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노자를 구해오도록 시켰다. 고향 하회마을에 돌아온 유성룡은 만사를 잊고 두문불출했다. 선조가 다시 벼슬을 주고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선조 37년(1604) 63세가 된 유성룡은 저술해오던 <징비록(懲毖錄)>을 완성했다. 선조 40년(1607) 병이 깊어진 유성룡은 “이제 편안하고 조용히 조화(造化)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그해 5월 6일 세상을 뜨니 향년 66세였다. 이듬해 2월에 선조도 죽었다. 저승에서 유성룡과 그보다 먼저 간 이순신을 만난 선조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이다.
유성룡의 사후 개혁입법은 모두 폐기되고 나라가 다시 양반들의 세상이 되자 백성들은 실망하고 낙담했다. 임진왜란 30년 뒤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백성들이 손 놓고 나라를 위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모두 그런 것 때문이었다. 유비무환의 역사적 교훈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는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0호 (2017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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