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노 세츠코, 無情읽고 춘원 연구 집필
‘만질수록 민족의 상처’ 이나 ‘역사적 인간’

천재작가의 친일 이야기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하타노 세츠코, 無情읽고 춘원 연구 집필
‘만질수록 민족의 상처’ 이나 ‘역사적 인간’

▲ 춘원 이광수가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모습(1946년). <사진=퍼블릭도메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라면 단연 친일, 반민족 지식인의 상징이다.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는 지성의 배반과 민족의 상처를 덧나게 작용하게 되어 있다. 최근 일본학자가 쓴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한국어판(최주한 옮김)이 나와 관심을 갖고 읽게 됐다. 그의 친일행각을 용서할 수 없다지만 천재적인 작가의 문학작품이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친일 지성 만질수록 민족의 상처 덧나

작가 하타노 세츠코 씨는 니가타 현립대학 명예교수로 한국 근대작가 연구의 대가로 소개되어 있다. 이광수뿐만 아니라 북으로 간 홍명희(洪命憙), 춘원과 동시대 작가인 김동인(金東仁) 연구서를 발간했다.
홍명희는 춘원이 동아일보에 ‘단종애사’를 연재할 때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여 쌍벽을 이루고 있었지만 나중에 김일성을 따라가 부수상을 지낸 공산주의자다. 김동인은 해방 직후 춘원을 모델로 ‘반역자’를 저술했다.
우리네 잡문(雜文)기자 처지에서는 춘원의 무정(無情)과 유정(有情), 흙과 사랑, 단종애사, 마의태자 등 문학작품은 그의 친일과는 상관없는 민족의 문화자산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를 도서출판 푸른역사가 ‘역사적 인간 시리즈’ 제4편으로 출간했으니 실로 미우나 고우나 춘원이야말로 역사적인 인간이라고 믿는다.
일본인 저자는 춘원의 무정을 읽고 그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그가 어떻게 일본을 만나고 깊은 유대를 갖게 됐는가를 탐색하여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저자는 춘원이 소설 무정을 일본인들에게 알리고 싶어 쓴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보면 춘원을 더듬기만 해도 친일의 역사를 후벼 파게 된다고 지적했으니 뭘 알고 한 말이라고 믿어진다.

첫 유학 ‘문명충격’, 한일합방후 대륙방랑

춘원 이광수는 1892년, 평북 정주에서 몰락한 벼슬집안 장남으로 망국(亡國)시기에 태어났다. 그는 신동(神童)이라 불릴 만큼 재주가 뛰어났지만 과거제도가 폐지됐으니 벼슬길로 진출할 희망이 없는 시절인데다가 일찍이 폐결핵으로 부모를 잃어 친인척집 신세를 져야 할 처지에서 자랐다.
뒷날 춘원은 자서전에서 “조부나 삼촌은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인물”이니 “조상의 유업이나 받아 놀고먹다 가난한 집안”이라는 말로 여지없이 집안을 자학했다.
고아 신세인 이광수 앞에 천주교에 맞선 동학(東學)이 나타났다. 동학은 몰락한 경주 양반 최제우가 창시했지만 당시 교주는 손병희, 수제자인 이용구(李容九)가 함경도와 평안도에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동학 따라 한성으로 올라와 1905년 13세 때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 유학생으로 조선인의 어학코스인 도쿄 도카이 의숙을 거쳐 다이세이 중학에 입학했다.
당시 이광수는 개화사상 따라 상투를 자른 단발머리 신문명의 충격을 받았다. 이 무렵 대중목욕탕에서 4년 연상의 홍명희를 만나 사귀게 됐지만 학자금 문제로 퇴학당해 귀국해야만 했다. 그 뒤 1907년에는 황실 유학생으로 재차 유학하여 메이지학원 중학 3학년에 편입하여 문학에 눈을 떠 천재적인 작가의 씨를 심기 시작했다.
중학 재학 중 여름방학 때 귀국하여 부친의 친구 권유로 첫 부인 백혜순(白惠順)과 결혼했지만 애정 없는 조혼(早婚)일 뿐이었다. 중학을 졸업한 1910년에는 오산중학 교주인 이승훈의 초빙으로 교사가 됐지만 얼마 안 되어 교주가 일제에 체포되자 해외 유랑길에 나섰다. 한일합방의 충격 속에 부인에게는 기약 없는 여행길이니 “날 기다리지 마오”라고 이별을 통고했다.
상하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고 재미 대한인 국민회의 시베리아 지부가 있는 치타를 거쳐 세계 제1차 대전으로 귀국했다. 귀국하고 보니 부인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지만 혼자 경성으로 올라가 육당 최남선이 발행하는 월간 청춘 편집일을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청춘 잡지는 무기 정간으로 문을 닫았다.

▲ 1917년 1월 1일자 매일신보에 소설 '무정' 연재와 초판본. <사진출처=매일신보, 위키피디아>

와세다 유학시절 총독부 기관지 기고

최남선의 출판사 신문관은 조선의 고전 간행을 목적으로 광문회(光文會) 조직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광문회를 근거지로 활동하며 메이지대 출신 송진우(宋鎭禹)를 알게 되고 그의 소개로 와세다대 출신 인촌 김성수(金性洙)의 학비지원으로 1915년 와세다대 예과를 거쳐 문학부에 입학하여 집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결핵이 발병하여 고생했지만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에 기고하여 각광을 받았다. 당시 인촌이 매월 20원의 학비를 보내줬지만 총독부 기관지에 민족계몽을 명분으로 기고하면서 원고료 수입도 누리는 일종의 줄타기 행세였다.
소설 무정은 매일신문이 신춘소설로 청탁하여 1917년 1월부터 126회를 연재함으로써 춘원이 근대문학 스타로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이 무렵 도쿄 유학생들은 향리에 조강지처를 두고 신여성과 연애하는 풍조가 유행하여 춘원도 1915년 여름 국내 첫 서양화가인 나혜석(羅蕙錫)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나혜석은 수원 부잣집 딸로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학 중에 게이오의숙에 다니는 시인 최승구와 열애에 빠졌다가 그가 결핵으로 사망한 후 이광수를 만났다. 그녀는 3.1운동 후 투옥되기도 했으며 뒤에 외교관과 결혼하여 주부작가로 활동하다가 남편과 함께 유럽여행 중 명사로 꼽히는 최린(崔麟)과의 불륜이 드러나 이혼당한 불운의 여인이다. 이때 위자료도 못 받고 친정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길거리에서 객사로 마감했다고 한다.
반면에 춘원은 소설 무정을 집필하면서 허영숙(許英肅)을 만나 1921년 향리에 있는 본처와 이혼하고 재혼했다. 허영숙은 경성 직물상집 딸로 도쿄 여자의학전문 재학 중 결핵을 앓고 있는 이광수를 만나 “결핵에는 무슨 약이 좋으냐”는 대화로부터 사귀게 됐다. 그러나 허영숙이 학업을 마치고 1년 먼저 귀국하여 이별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뒤에 귀국한 이광수와 함께 베이징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나 결혼에 이른 것이다.

‘민족개조론’ 비난 속에 왕성한 집필욕

춘원은 베이징에서 다시 도쿄로 돌아가 1919년 1월 조선독립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지만 미리 상하이로 도피하여 체포를 면했다. 상하이에서는 장덕수를 만나 여운형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에 참여, 독립운동에 가담했지만 3.1 운동 후 사이토 총독의 문화통치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자 귀국하여 사실상 일제에 귀순한 것으로 비판된다.
춘원은 허영숙과 결혼한 다음 해인 1922년 5월 천도교 교단의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발표하여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민족개조론의 요지는 ① 거짓말 추방 ② 공론(空論) 추방 ③ 신의(信義) ④ 개혁의지 ⑤ 공사(公私)구분 ⑥ 전문기술 개발 ⑦ 경제적 독립 ⑧ 위생과 건강 등 8개항으로 명분 있는 내용이지만 일제의 무단정치에 순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또 이듬해에는 김성수가 사주이고 송진우가 사장을 맡고 있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신년 사설로 ‘민족적 경륜’을 집필하여 민족개조론과 같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는 일제 식민통치에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의 정치, 산업, 교육운동을 제창한 내용이니 식민통치를 긍정하는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 불매운동이 일어나 결국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상해시절 독립신문을 함께 발행하던 주요한이 귀국하자 춘원이 그와 함께 평양 동우구락부와 경성 수양동맹회의 통합을 추진하여 총독부의 감시를 받았다.

▲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시절 (1923년). <사진=위키피디아>

1926년에 다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을 때 부인 허영숙이 여성기자 제1호로 입사했다. 이 시절 춘원은 동아일보에 ‘마의태자’, ‘단종애사’를 연속 연재하고 라이벌인 조선일보에는 홍명희의 임꺽정이 연재됐다. 또 이때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자 와세다를 중퇴한 춘원이 법문학부 1회생으로 등록하여 뒷날의 고대 총장 유진오(兪鎭午)와 책상을 같이 공부했지만 휴학을 거듭하여 끝내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춘원은 계속 결핵과의 투병으로 신장결핵 수술을 받았지만 이순신(1931년)과 흙(1932년) 등을 발표한 후 1933년에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장편 유정을 연재하다가 장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자하문 밖 홍지동으로 옮겨 살았다. 홍지동 시절 부인 허영숙이 생계를 걱정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산원(産院)을 개업하여 춘원이 뒤따라가 일본어로 단편과 수필 및 자서전을 집필했다.

사상전향, 창씨개명 후 본격 친일

1937년 일제가 치안유지법 위반을 이유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관련자들을 일제히 체포했다. 수양을 목적으로 내세운 동우회가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하면서 점차 ‘신조선 건설’ ‘신문화 건설’ 등 독립운동 성격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때 춘원도 체포되어 보름간 수감됐지만 병보석으로 나왔다가 법원에 ‘사상전향서’를 제출함으로써 무죄선고를 받았다.
춘원은 이때 병보석 중에도 구술(口述)집필로 소설 무명(無明)과 ‘사랑’을 출간했다. ‘무명’은 병감(病監)에서 욕망과 싸우며 죽어가는 죄수들 이야기지만 이는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의 한계를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소설이 제1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또 ‘사랑’은 지고(至高) 지선(至善)의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로 허영숙의 의학박사 학위논문을 돕다가 착상했다고 하나 춘원을 사모했던 시인 모윤숙(毛允淑)이 모델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춘원을 포함한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 18명의 사상 전향자들은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고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의 긍지로 살아가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이다. 춘원은 이 사건 최종 무죄선고에 앞서 1940년 창씨개명,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름으로 일본어 논설과 수필을 꾸준히 발표했다.
태평양전쟁 6일 전 1941년 12월 14일에는 경성 부민회관에서 영미(英米)식 자유주의를 공격하는 연설을 했고 사상 전향자들의 원탁회의 대표로서 “조선인의 고집을 버리고 일본인이 되어 일본정신을 가질 결심을 해야 한다”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동조하기도 했다. 또한 춘원은 조선인문인협회장을 맡아 황군(皇軍)위문 작가단을 전쟁터로 보내고 도쿄로 가서 유학생들에게 학병지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친일반민족으로 체포, 평양형무소의 최후

▲ 1948년 12월 출판된 이광수의 ‘ 나의고백’ (왼쪽)과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된 이광수의 모습. <사진=퍼블릭도메인>

일제가 항복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53세의 춘원은 경춘가도 단종의 정순왕후 묘역인 사릉(思陵)에 머물고 있었다. 부인 허영숙이 미리 전란을 피할 곳으로 터를 잡아 놓은 곳이었다.
해방의 감격 속에 춘원의 친일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이듬해는 봉선사로 옮겨 광동중학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춘원은 총독부에 의해 1940년 7월 많은 저서들의 재검열을 받아 저작과 발매가 금지되고 1944년에는 서점에 나와 있는 책마저 압수되어 부인 허영숙이 생계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해방조국에서 집필을 계속하여 1947년 ‘나, 소년’, 1948년에는 ‘나의 고백’, 수필집 ‘돌베개’ 등을 출간했다.
또 흥사단의 의뢰로 ‘안창호전기’와 ‘백범일지’의 현대문 번역 등을 가명으로 집필했다. ‘나의 고백’ 속에는 ‘죄인’, ‘더러운 몸’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찬양하며 “나는 독립국의 자유민이다”라고 선언하고 “사는 날까지 조국 찬양의 노래를 쓴다”고 했다.
그 뒤 1948년 반민특위(反民特委)가 구성되어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구속됐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6.25 때 북으로 끌려가 평양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50년 10월 25일 폐결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거주하는 춘원의 3남 이영근 씨가 1991년 방북하여 평양 용성구역 재북인사릉에 묻힌 것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2009년 친일반민족특별법에 따라 301인의 친일협력자로 분류됐다.

춘원의 고백, 이왕 버린 몸이 희생되고자…

춘원은 화신백화점 박흥식(朴興植), 매일신보 사장 최린(崔麟), 육당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친일 거두로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당시 사건기사들을 요약 정리한 오소백(吳蘇白) 사회부기자의 ‘대사건의 내막’(1945~1982)에 춘원이 체포되는 장면이 나온다.
반민특위 조사관이 춘원을 연행하러 갔더니 “책이나 좀 정리해야겠는데…”라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부인은 “몸이 약하시니 주사나 한 대 놓아드리게…”라고 요청하여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춘원은 미리 특위조사관에게 ‘고백의 길’을 넘겨주었다.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조선민족이 큰 위기를 느끼고 일본에게 일부라도 협력할 수 있는 태도를 보여줌이 목전에 다가온 위기모면의 길이라 생각되어 ‘이왕 버린 몸’이 이 경우에 희생이 되기를 스스로 결심했었다.” “동경까지 가서 학병을 강요케 된 것은 학병에 가지 않으면 학병 가서 받는 것 이상으로 고생할 것 같기에 권했다”, “동조동근(同祖同根)을 말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춘원은 반민특위 조사에서 친일을 부정하지 못하여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 하타노 세츠코의 ‘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한국어판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저자의 말대로 춘원의 생애를 읽을수록 친일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마저 버려야만 하는지 고뇌스럽기 짝이 없다.
동서문화사 사장이자 작가인 고정일 씨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학술상,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문학상을 제정, 연내 시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고정일 사장은 히틀러의 나치정권에 협력한 학자들도 복권된 사례를 들어 육당과 춘원의 학술과 문학유산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알려졌다. 친일반민족행위를 규탄하더라도 그의 학술과 문학만은 친일에서 떼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푸른역사, 2016.9 발행, 330페이지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6호 (2016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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