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距離)는 미(美)다

▲ 성암(星巖) 이우영(李愚榮) 회장

한국은행 등 공직 38년
거리(距離)는 미(美)다
이우영(李愚榮) 초대 중기청장의 회고록

한국은행으로부터 공직 38년의 원로(80세) 회고록 제목이 ‘거리(距離)는 미(美)다’라고 했으니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한은 부총재, 중소기업 은행장, 초대 중소기업청장을 역임한 성암(星巖) 이우영(李愚榮) 회장의 회고록이다.

왜 거리는 미(美)인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한 이우영 씨가 중학교 3학년(상주 농잠중) 때 어느 토요일 하오 귀가 길에서 파라솔을 쓰고 걷는 여자애의 뒷모습이 너무 예뻐 얼굴 좀 보자며 빠른 걸음으로 추적했다. 한참을 뛰어 걸어 얼굴을 훔쳐보니 곰보로 어찌나 실망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때 세상만사는 상황 따라 급변할 수 있노라고 깨달았다. 예쁜 뒷모습을 뒤쫓은 50여 m의 공간과 곰보얼굴을 훔쳐 본 5분간의 ‘공간과 시간’이 마치 천상천하(天上天下) 아닌가. 이로부터 ‘거리는 미(美)다’라는 인생철학을 익혔다는 이야기다.
저자가 중학교를 수석으로 나와 명문 경북사대 부고에 진학, 졸업할 때가 단기 4288년(1955년)으로 친목모임을 ‘88회’(쌍팔회)라고 불렀다. 회원 중에 정구호 전 KBS 사장, 조경식 전 농림부 장관, 이원택 전 서울시 부시장, 이정성 전 럭키화학 사장 등 정·관·재계 명사들이 많다.
대학 학력이 복잡하다. 난생 처음으로 서울대 입시에 실패한 후 성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외대 독어독문과에 편입, 2개 대학을 다니다가 다시 고대 상학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대학 3학년 때 육군 11사단장집 가정교사로 들어갔더니 부인이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도로포장공사를 따내어 경리주임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장군 부인의 서툰 경영솜씨로 회사가 적자를 면치 못해 월급마저 줄 수 없게 되자 인부들이 “경리주임 어디 있느냐” 잡아 감금당한 곤욕을 치렀다. 이때부터 학업에 열중하여 3학년 2학기에는 김순식 교수의 회계학 시험에 만점을 받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한은 공채입행 2년만에 졸병 입영

대학 졸업 후 교수가 되는 길을 찾다가 1959년 한국은행에 응시하여 동기생 33명과 함께 입행했다. 당시 한은의 월급이 뻐길 수 있을 만큼 많았다. 기본급에 물가수당, 시간외 수당을 합쳐 4만2천환을 받으니 일반직장의 두 배에 해당됐다.
기숙사 월 식비가 4천환에 지나지 않으니 술 마시고 양복 맞춰 입고 다닐 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좋은 세월도 기껏 2년 남짓,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으로 병역미필자에 대한 사표지시가 내려왔다. 입대하여 논산훈련소를 거쳐 최전방 포병 911 대대로 배치되니 선임하사관의 잔소리가 무서웠다.
입대 7개월 만에 의가사(依家事) 제대 기회가 찾아왔다. 부모님은 연로하고 형은 병약하고 동생은 ROTC로 입대했으니 저자가 집안 가장 노릇을 해야 할 처지로 의가사 요건이 됐다. 제대 후 한국은행에 복직을 신청하여 55세 정년까지 근속했다.
한은 김성환(金聖煥) 총재 시절 어느 날 비서실장이 호출하여 갔더니 중앙정보부 경제과장을 소개해 주며 따라가 보라고 지시했다. 그가 대연각 호텔 16층 비밀사무소로 데려가더니 ‘극비사항’이라며 경제관련 리포트를 작성해 보라는 밀명을 전해주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심지어 한은 측에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경제안정이냐, 성장이냐’의 논란에 관해 명확한 결론을 도출해 내라는 밀명이니 지극히 어려웠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안정우선’, 재무부는 ‘성장우선’을 주장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 조정안을 마련해 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 이우영 회장의 회고록 ‘거리(距離)는 미(美)다’

이로부터 밤낮없이 사흘간 리포트를 작성했더니 박 대통령에게 전달되어 대단히 만족하시더라고 전해왔다. 대통령은 리포트 작성자의 이름을 알 리가 없었지만 중정 경제과장이 윗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지 기분이 좋아 한턱내는 바람에 밤새껏 통음한 후 통금도 없이 중정 차량으로 귀가했었노라고 적었다.

한은 부총재로 천직 마감후 초대 중기청장

저자가 한은 대리급으로 승진했을 무렵 서독 프랑크푸르트 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고교 때부터 준비한 독일어 어학력 때문에 선발됐을 것이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이 한은 총재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때 저자에게 중정 경제과장을 소개해 준 이헌성 씨였다.
한은 소장의 전용차가 벤츠 280으로 외교관들마저 부러워 할 수준이었으니 한은인들의 자부심을 짐작 할만하다. 현지 근무 얼마 뒤 과장이 바뀌어 새로 부임해온 후임을 공항에서 픽업해 오다가 건널목에서 초등학생을 치어 경찰조사를 거쳐 재판을 받은 악몽을 겪었다.
1971년 오스트리아 빈에 ADB 연차총회가 열렸을 때 남덕우 재무부 장관과 IMF 아시아국장 간 면담 때 저자가 승용차로 안내하다가 길눈이 어두워 진땀을 뺐지만 결국 약속시간 45분이 지났다. 당시 민망한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남 장관께서는 “수고 했어요”라고 한마디만 했다.
과장으로 승진하여 외환관리 업무를 맡았을 때는 재무부 관계자와 의견충돌을 빚었고 제1차 오일쇼크 때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씨름을 했다. 그 뒤 사우디 한국대사관 초대 재무관으로 건설근로자들과 함께 땀 흘린 공적으로 한은맨 가운데 최초로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이어 한은 자금부장, 은행감독원 부원장, 한은 부총재를 거쳐 퇴임했으니 천직을 명예롭게 마친 셈이다.
한은을 물러 나와서는 다시 중소기업 은행장을 거쳐 YS 정부가 신설한 중소기업청 초대 청장으로 공직을 끝냈다. 공직 은퇴 후에는 바른경제동인회 이사장, 고대 초빙교수, 중소기업정보화경영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금탑산업훈장, 황조근정훈장 등 수훈.
저자는 회고록을 끝내면서 ‘나라와 국민에게 드리는 고언’으로 교육개혁, 규제개혁, 정치개혁에 관한 소신과 방안을 제시했다. 대한민국 CEO연구소 출간. 2016.3.15. 330페이지.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1호 (2016년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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