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의 책임 아닌가

‘종북이 뭐가 나쁘냐’ 고…
민주화 미명속의 ‘괴한’
역대 대통령들의 책임 아닌가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태평양위원회 이사장

‘민주주의는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군사독재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라고 잘라서 말할 수는 있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 간선으로 대통령을 뽑던 헌법을 바꾸어 직선제로 되돌아갔다. 노태우는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이니 민주화의 선봉에 섰다고 할 수 있지만 전두환 입김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고 보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노 정권이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여섯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때부터 민주화라는 미명하에 나라도 흔들리고 질서도 무너뜨리고 경제도 도약을 멈추었다. 3당의 통합으로, 김대중 모르게 김영삼과 김종필이 여당으로 들어가 드디어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가 되고 민정당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하나회’가 작살나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감옥으로 갔다.
이 무렵 국가질서가 급물살을 타고 무너지기 시작했고 김일성이 갑자기 죽어서 김영삼이 그를 찾아가 만나지는 못했지만 남북정상이 악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도 사실이다. 이때 국민은 대한민국이 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때가 온 것으로 착각하게 됐다.
교원노조를 비롯한 노조운동이 친북 종북의 가능성 내지 타당성을 암시하였고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그 많은 시민운동 단체들은 친북을 진보적인 이념으로 간주하게 됐다. 반공(反共)이나 멸공(滅共)이란 구호는 몽땅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대한민국은 가장 민주화된 나라, 가장 진보적인 나라로 자부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백주에 괴한의 칼을 맞아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이 암살 미수사건이 성공했더라면 대한민국은 민주국가 반열에서 밀려났을 지도 모른다.
내가 보건대 이런 참변은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이다. “반미가 뭐가 나쁩니까”라고 소리 지른 대통령도 있었다. 오늘은 “친북, 종북이 뭐가 나쁩니까”라고 반문하는 대통령도 나올 수 있는 엉뚱한 대한민국이 되었다.
민주주의 한답시고 민주주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질서 없는 민주주의는 혼란과 침체를 야기할 뿐 국민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나는 리퍼트 대사에 대한 테러 책임을 그 괴한에게 묻지 않는다. 청와대의 주인이 되어 5년 임기를 채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및 아직도 임기가 3년이나 남아 있는 박근혜 등 여섯 지도자에게 묻는다.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내일은 희망이 없다.

원칙을 살리기 위한 파격

우리는 권모술수(權謀術數)라는 말을 싫어한다. 술수란 속임수이다. 권모술수를 일삼는 사람과 일을 같이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트로이(Troy)의 목마(木馬)를 생각하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그것은 부득이한 술수였다고 믿으며 오디세우스 장군의 지략과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옛날 함석헌 선생에게서 권도(權道)의 참 뜻을 배웠다. 권도의 사전적 의미는 “목적 달성을 위해 임기응변으로 취하는 방편”이다. 그런데 함 선생께서는 권도의 참 뜻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예화 한 가지를 들려주셨다.
어떤 학교 교장 아들이 그 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러나 점수가 모자라 불합격이 되었다면 그 교장은 그 학교의 교장 노릇을 할 자격이 없다. 입학시험의 점수 한 두 점 때문에 아들을 낙방시키고 무슨 교장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 가르침에 큰 뜻이 있다는 사실을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변칙(變則) 없이는 원칙을 지킬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격(格)을 지키기 위해 따르는 파격(破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나는 군사 쿠데타를 어제도 반대하고 오늘도 반대하고 내일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5·16 군사혁명이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내일이면 늦으리…

오늘의 나의 조국을 바라보면서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영화제목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오늘 이 나라 지도층에 진실이 없다고 느끼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터지고 있지 않은가.
방위산업 비리는 국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장군 복장 가슴에는 훈장을 대신하는 약장(略章)이 석 줄, 넉 줄이나 되는 그 장군들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면 이 나라의 국방은 안심할 수 없다.
신임 국무총리가 방산비리, 자원외교 등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친이(親李)계를 겨냥한 것 같다고 떠들기 시작하니 부정부패 척결이 처음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골수에까지 칼을 들이대는 철저한 수사가 아니라면 부패척결의 실효를 거두기는 어렵다.
오늘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부정부패를 깨끗이 도려내지 못하면 우리는 사회적 혼란을 마무리 짓고 보다 생산적인 대한민국을 만들 수가 없다. 어쩌면 이번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찬스일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부가 이번에 또다시 사정(司正)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영영 태평양의 새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내일이면 늦다는 것이다.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어제 있었던 일을 오늘 와서 없었던 일이라고 우겨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건 어떤 힘으로도 안 된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통째로 삼켰다. 그것도 강제로. 2천만 우리 동포는 토해내는 것이 옳다고 믿고 1919년 3·1운동으로 맞서서 평화적 함성을 질렀지만 일본은 듣지 않았다.
일본은 1937년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국대륙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그 해 12월에는 남경으로 쳐들어가 30만을 학살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중의원 의원 사이또 다까오는 일본 국회에서 중국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가 중의원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독일 메르켈 수상이 최근 일본을 방문하여 아베를 만나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지만 아베와 일본 언론은 메르켈 연설에서 그 대목은 빼고 보도했다. 그들은 끝까지 역사를 왜곡할 뜻을 굳힌 것 같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꾸지도 않고 바꿀 수도 없다. 아베와 그 추종자들은 일종의 환각과 착각에 사로잡혀 일본을 미화하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제 탓이오, 제 잘못이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를 쓰는 것이다.
사실에 대해 눈을 감고 허망한 환상만 보면서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시달리는 일본을 동정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물에 빠져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봄·여름·가을·겨울 등 4계절 중 언제가 가장 기다려지느냐고 물으면 대개 봄이라고 답한다. 가을이 좋다는 사람도 가끔 만난다. 그러나 대다수 인생은 봄을 기다리다가 세월을 다 보낸다.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지나치게 춥다. 특히 지루한 겨울을 견디는 민초들에게 봄은 계절의 여왕으로 해마다 찾아온다. 혹독한 겨울을 덜덜 떨며 사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봄 밖에 없다. 영국시인 Robert Browning이 봄을 노래했다.

일 년 중 지금은 봄
하루 중엔 아침 일세
아침은 일곱 시
산언덕에 맺힌 이슬 진주되어 빛나고
종달새는 하늘에
달팽이는 가시덤불에
하나님 하늘에 계시오매
인생만사가 그릇됨이 없어라

어차피 인생은 겨울인 것을, 봄을 기다리면서 겨울추위를 이겨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 아닌가요.
독일 시인 Friedrich Schiller가 이렇게 탄식했다.
“짧은 봄이 나에게 다만 눈물을 주었다.”
그 짧은 봄이 오고 있다. 소망 중에 또 한 번 기다려 본다. 어김없이 봄이 올 것이므로.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8호 (2015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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