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2012-10-07_124951.jpg 6.25 학도병서 대장까지

군인의 길, 정치의 길

朴俊炳(박준병)회고, 근대화·민주화 빛과 얼룩

3선의원, 3김정치와 3당합당까지

‘군 출신 정치인’의 회고록에 산업화와 민주화 전환기적 비사와 화제가 많이 나온다. 5·6공화국 집권당 사무총장으로 여야 협상 과정에 온건, 화합형 얼굴을 보여준 박준병(朴俊炳) 전 3선의원의 회고록이다. 육군대장으로 전역후 정치에 입문했기에 ‘군인의 길, 정치인의 길’ 이라는 제목이다.(도서출판 기파랑, 2012.8)

군내 쓰리박(朴)의 집권당 소집명령

박 장군은 육사 12기로 직업군인의 길을 택해 6.25와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각급 지휘관을 거쳐 최고계급인 대장으로 전역했으니 군인으로 성공했다. 정계에서는 3선 중진의 경력을 쌓고 집권당 사무총장을 네차례 역임했으니 뛰어난 협상 정치력을 보여준 성공한 정치인이다.

지금은 은퇴한 국가원로이나 천성의 학구파로 늘 책을 읽으며 서경대 석좌교수로서 옛 교수의 꿈을 이뤘다고 자족한다.

박 장군은 현역시절 박세직, 박희도 장군과 함께 엘리트 동기생 쓰리박(朴)으로 꼽혀 선두경쟁을 벌였으며 직업군인 33년, 정치인생 18년 도합 51년간 국가 고위급 공직을 맡았으니 회고할 소재가 너무나 많다. 특히 정치인으로서는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의 집권당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金) 정치시대를 몸으로 겪으면서 특유의 온화, 화합의 현실노선을 지키고자 고뇌했던 대목이 많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5.18재판 등 끔찍한 ‘정치벌’을 잊을 수 없는 처지이다.

박 장군의 정계입문은 1984년, 보안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야전군 사령관으로 승차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가 전두환 대통령으로 부터 민정당으로 출마하라는 소집명령을 받았다. 총선전망이 어렵다는 예측하에 민정당이 요청하여 충북 보은, 옥천, 영동 지역구로 동원됐던 것이다.

초선때부터 ‘정치의 뜨거운 맛’

12대 총선 때 박 장군은 고향에 내려가 ‘사병처럼’, ‘머슴처럼’ 일하겠다고 약속하며 ‘3국지(三國志)보다 더 현란한 전장(戰場)’에서 득표율 64.8%로 압승했다. 그러나 초선의 박 의원이 맞은 여야대결의 정국은 ‘뜨거운 맛’이었다.

민정당 득표율 35.2%에 신민당, 민한당, 국민당 등 야권 득표율이 59.6%에 달했으니 여야관계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민정당은 전국구 의원을 합쳐 겨우 제1당의 체면을 지켰을 뿐이다. 이럴 때 초선의 박 의원이 갈등과 대립의 국정난제들을 풀어내는 방안을 도출해야 할 민정당 국책조정실장의 중책을 맡았다.

이때 당대표 노태우, 국무총리 노신영, 안기부장 장세동 등 5공 실세들로 당정을 개편했다. 국책조정실에는 당대 최고의 언변과 전문지식을 갖춘 8인 상근 위원으로 최병렬, 현홍주, 이종률, 김학준, 송용식, 지연태, 김종인, 강경식 의원 등이 포진했다.

그렇지만 3김정치가 재야의 강성과 함께 5공의 정통성 시비를 제기하니 정치와 사회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5공은 복지사회 구현을 공약하여 공무원 임금동결과 물가안정을 이룩하고 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했지만 국정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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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가도 끝없는 3김정치시절 사무총장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를 최루탄으로 막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박종철, 이한열 사건에다 반공 국시(國是)파동까지 겹쳤다. 이민우 총재의 내각제 수용발언이 파란을 일으키고 호헌론(護憲論)이 3김정치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전두환 단임약속이 물 건너가지 않느냐는 극단론까지 나왔다.

민정당은 차기주자로 노태우 대표를 옹립하려는 분위기 속에 당대표 윤길중, 원내총무 김윤환, 정책위원장 이한동에 사무총장 박준병 등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정국은 ‘가도가도 사막의 길’, ‘태풍의 길’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오리무중의 연속이었다.

이럴 때 극약처방인 듯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전세를 역전시켰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이다. 10.26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 전 참모총장이 YS지지를 선언하고 DJ가 호남을 기반으로 철옹성 같은 지지세력을 모았지만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그렇지만 득표율 36.6%에다 14대 국회 ‘여소야대’ 정국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갈 힘이 없었다.

군 출신 ‘박준병 정치’가 소수 집권당으로 야권에 밀리고 있을 때 ‘보통사람’ 노태우 대통령은 시중에서 부터 ‘물태우’로 불렸다. 정치권의 여야 협상으로 5공을 청산코자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고 국회가 5공 청문회를 가진 헌정사의 얼룩이 기록됐다.

3당 동상이몽 합당 추진위원장

6.29 선언후 노동권이 가투(街鬪)로 나오면서 사회혼란을 부추겼다. 북의 김일성은 위장 평화공세로 남조선 정국을 흔들고자 했다. 문익환 목사, 서경원 의원, 소설가 황석영이 몰래 방북하여 통일바람을 넣고 한총련 임수경이 평양축전에 참가하여 국가보안법을 무력화시켜갔다.

주사파 학생운동권에서는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주장하며 노동계의 가투와 합세했다. 아무래도 무슨 탈이 날 것 같았다. 정무장관 박철언이 여소야대 정국을 극복하고자 묘수를 추진했다. DJ를 제외한 3당 합당이 극적으로 성사되어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등 3인이 악수하고 만세합창한 장면이 TV에 보도됐다.

박준병 총장이 3당합당 추진위원장을 맡아 협상을 주도했다. 합당 민자당 사무총장에 박준병, 원내 총무에 YS계의 김동영, 정책위 의장에 JP계 김용환 의원 등으로 조화를 이뤘다. 이때 이기택, 노무현 등 민주계 유력인사들은 합당을 거부했다.

이로부터 ‘박준병 정치’는 다시 민자당내의 민정, 민주, 공화계의 갈등과 불화를 겪어야만 했다. 외형상 여소야대를 극복했지만 화학적 융합이 아닌 일시적 이해타산을 위한 합당정치란 너무나 비정하고 살벌했던 것이다.

YS 9단정치 5.18 소급입법 충격

3당합당이 내각제를 고리로 이뤄졌음이 합의각서 유출로 들통 났다. YS가 합당후 내각제를 받을 생각이 없어졌을 때 언론이 이를 보도하자 당대표 집무를 거부하고 거제로 낙향하는 투정을 벌여 노태우 대통령이 난감한 처지가 됐다.

정치 9단의 YS가 노태우를 굴복시켜 민자당 독주체제를 굳히면서 민정계와 공화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차기 대권 주자를 두고 노태우가 입장표명 없이 미적거리자 민정계의 박태준 대표가 후보포기 선언하고 이종찬 의원이 탈당했다. JP는 YS와 결별하여 자민련으로 독자노선을 걸었다. 박준병 총장의 눈으로 보면 YS가 민정계와 공화계를 축출한 셈이다.

YS가 집권하여 군내부의 하나회를 단칼에 척결하고 5.18 소급입법을 제정하여 전임 대통령 두 분을 구속 처벌한 것은 세상이 잘 아는 일이다. YS가 잘못된 헌정사의 왜곡을 다시 한번 소급법으로 단죄한 처참한 장면을 박준병 정치가 목격했다.

더구나 박 총장 스스로 광주민주화 사태시 ‘반란 주요임무 종사’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0년을 구형받은 뼈아픈 고통을 겪었다. 재판결과 1심에서 부터 대법원까지 무죄판결 됐지만 집권당의 중책과 요직을 도맡아 온 정치인생 18년의 파란만장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회고하고 싶지 않은 민주화 과도기 한국정치사의 단면이 아닐까 싶다.

육사와 정계스승 박태준총리 회고

박 장군은 ‘정치인의 길’에서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와의 깊은 인연을 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박 전 총리가 육사 6기 출신 대령으로 육사 교무부장으로 있을 때 박준병 생도의 학사관리 인연이 있었다. 또 박 총리가 육사 졸업생에게 이학사 학위를 수여토록 문교부와 교섭하여 관철해 내고 국내외 위탁교육제를 제정하여 박준병 중위 시절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는 혜택을 입었다.

박 전 총리는 나중에 정계에 들어와 3당 합당시 민정계를 대표했지만 YS와 결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생활하다 1997년 5월 포항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복귀 했었다. 그뒤 자민련에 입당하여 DJP 연합시절 총리직을 맡아 산업화와 민주화세력 및 영·호남의 통합에 진력했다.

그러나 DJ의 권력도 자민련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독주했다. 어느날 박 총리는 출근길 승용차에서 라디오를 통해 부동산을 명의신탁 했다는 허무맹랑한 뉴스를 듣고 ‘뒤통수’로구나 생각하여 미련 없이 물러났다. 박준병 총장은 육사선배이자 정계 스승격인 박 총리의 낙망에 비분을 느껴 자민련으로 옮겨 서울 서초갑 보선에 출마했다 낙선하여 정계를 은퇴하고 말았다.

박 회장은 정치인생 18년을 되돌아 보며 육사생도 시절에 몸에 익힌 명예제도를 잊지 않고 정치자금에 깨끗했음을 자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군과 정치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만 없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소감을 말한다. 그러면서 군 출신으로 정계를 거쳐 나와 생각해 보니 우리겨레가 자랑스러운 현대사를 쌓기까지 온갖 그늘과 빛을 고루 경험했던 만감이 남아 있노라고 밝혔다.

이한림장군 전속부관으로 5.16맞아

박 장군의 ‘군인의 길’은 ‘이등병에서 대장까지’로 이야기 된다. 1950년 9월 15일, 대전중 5년(17세) 때 피난지 경남 밀양에서 제3 육군병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6.25에 참전했다. 이때 신병 동기 가운데 안응모 일병이 뒤에 경찰에 입문하여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박 장군이 병장으로 진급한 1952년 대구에 있던 육본에서 4년제 육사 2기생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코자 했지만 학력미달이 문제가 됐다.

대전고 2년 수료증으로는 응시가 안돼 대대장 백창기 중령(서울대 의대 1회 졸업, 육군소장 예편)의 추천서로 11대 1의 경쟁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생도시절 군사학 4년간 우수상을 받고 1956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육군소위로 임관됐다.

첫 부임지가 강원도 화천 북방에 주둔한 9사단 전방소대장으로 병사들이 배고픈 시절을 경험했다. 중위로 진급하여 육사 교관요원으로 파견되어 이한림 교장을 만나고 서울대 문리대 위탁교육으로 문학사 자격을 획득했다.

이한림 장군이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전속부관으로 발탁됐다가 한달만에 5.16이 일어났다.

이 장군이 동기생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에 동조할 수 없다면서 군의 엄정한 정치중립을 선언하고 1군단장 임부택 소장에게 출동준비를 명령했다.

다음날은 윤보선 대통령의 특사가 ‘국군끼리 충돌하지 말라’는 공문을 전달했다. 하오에는 8군 사령관이 방문하여 쿠데타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한림 장군은 이날 하오 5시경, “내전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쿠데타 반대에서 이를 묵인한다”는 뜻을 예하 장병에게 알리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5월 18일 새벽 박정희 특사인 한신 소장이 방문하여 이 장군과 1시간 면담한 후 1군 작전처 엄병길 중령 등이 사령관을 서울로 압송했다.

박 대위는 전속부관 신분으로 뒤따라 갔다가 덕수궁에 대기하다가 필동 헌병대로 연행되어 3일간 유치됐다가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이 장군을 면회했다. 한달 후 박 중위는 석방되어 의정부에 위치한 8사단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이 장군은 두 달 뒤에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얼마뒤 귀국하여 국영기업체 사장과 건설부 장관을 맡았다.

10.26으로 박 대통령이 서거한 후 호주대사로 있던 이 장군은 자진 사임한 후 지난 4월 29일 91세로 타계할 때까지 은둔의 삶을 살았다.

베트남 참전에서 야전군 지휘까지

박 대위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5년 미 육군 특수전 비정규직 과정 7개월간 심리전 교육을 받고 66년말 파월 심리전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2012-10-07_125701.jpg

채명신 사령관이 ‘베트남전과 한국군의 역할’에 관한 시험을 출제하여 박 대위가 만점을 받아 1,000달러 상금과 10일간 특별휴가를 받았다. 박 대위는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육군대학 등에서도 수석을 차지한 기록을 세웠다.

소령으로 진급하여 주월사 민사 심리전 대장으로 임명되어 고위 지휘관들 앞에서 민사 심리전에 관해 브리핑했더니 ‘브리핑 잘 하는 장교’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주월사 근무를 마치고 1968년 7월 귀국하여 ‘1.21사태’ 뒤 북의 대남침투가 극성일 때 강원도 원통 12사단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무장 침투 적병들을 완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1970년 육군대학 수석 졸업후 교수요원으로 다시 진해로 내려가 가족과 떨어져야 할 무렵 육본 인사참모부 노태우 대령에게 부탁하여 육본 작전참모부에 근무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권익현 대령이 윤필용 수경사령관에게 추천하여 수경사 인사참모로 보좌했다. 그뒤 박 대령이 전방 연대장으로 진출했을 때 윤필용 장군이 독직사건 혐의로 구속됐다. 윤 장군은 15년형을 받고 나와 다른 연루자들이 모두 재심을 청구했지만 “옛 상관이 내린 벌을 그대로 받겠다”는 충성심으로 살다가 2010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 장군은 지금도 윤 장군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박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굳게 믿는다고 했다.

운명의 20사단장 시절 5.18재판 유일무죄

육사 12기 엘리트로 박 장군은 박세직, 박희도 동기생과 함께 장군이 되어 3군 하사관 학교장, 63 훈련단장을 거쳐 육본 교육참모부 기획처장으로 영관급 진급심사위원장을 맡았다.2012-10-07_125732.jpg

진급 심사자료를 보니 육사 1년 선배에 입교, 졸업 수석인 김성진 박사가 대령에 머물고 있었다. 박사학위에다 국방연구에도 업적이 많았지만 야전 경험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에 박사학위 소지자 등의 특별진급 규정을 마련하여 김 박사를 장군으로 진급시킬 수 있었다.

그로부터 오래 뒤 1986년 박 장군이 민정당 의원 시절 오명(吳明) 채신부 장관이 집으로 찾아와 1979년도에 박 회장이 박사학위 소지자 특별진급 규정을 만들어 준 덕택에 진급할 수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박 장군은 1979년 8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운명의 20사단장을 맡아 10.26 국변사태 이건영 사령관으로 부터 서울 출동준비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 충돌시까지 전두환 보안 사령관과의 연락은 전혀 없었다고 증언한다.

‘12.12’사건 닷새전, 연희동 전 사령관 댁에 초청되어 경복궁 30 경비단 장세동 단장 사무실 저녁약속을 지시받았다. 그날 가서 보니 정승화 총장 연행문제로 보안사와 수경사가 대립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자리에서 전 사령관이 20사단 출동을 요청했지만 박 장군은 5.16 당시 이한림 장군의 입장을 상기하며 이를 거부했다. 그 대신 공수여단과 9사단을 동원하여 12.12 사건이 진행됐다. 경복궁 팀이 청와대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연행 청원 갔을 때도 박 장군은 빠졌다. 이 일로 나중에 청문회 증언대에 섰지만 사실규명이 분명하여 문제가 없었다.

다시 문제는 사단장 복귀후 1980년 5월 15일 육본으로 부터 광주 출동명령을 받았다. 21일 새벽 부대가 용산역을 출발하여 광주공단 입구에 이르러 민간 시위대에게 지휘용 지프 14대가 탈취되는 불상사가 빚어졌다.

당시 광주시내에서는 ‘경상도 군인이…’, ‘공수부대가…’ 라는 터무니없는 악성루머가 난무했다. 계엄사가 하는 수 없어 자위권 발동을 하달했다. 그러나 박 장군은 어떤 경우에도 민간에 대한 선제사격을 말라고 명령했다.

민간 시위대와 충돌사건 3차례가 있었지만 원만히 수습됐다. 이어 광주 시가지 정비와 외곽 농촌 일손돕기 등으로 광주출동 임무를 마쳤다는 것이 박 장군의 회고이다.

장군의 군인정신이란 영원한 현역

박 장군이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1주일만인 1981년 7월, 절친한 동기생 박세직 수경사령관 부정언행을 조사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조사결과를 보고 하면서 직위해제, 좌천이 적절할 것 같다고 진언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강력 지시로 예편되고 말았다.

박세직 장군은 곧 신임이 회복되어 체육부 장관, 안기부장, 서울시장을 거쳐 88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국가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뒤 재향군인회장으로 활약하다 지난 2009년 7월 76세로 별세했으니 안타깝게 회고된다.2012-10-07_130030.jpg

박 장군은 보안사령관 시절, 권력기관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여러가지 혁신조치로 보안사 내부에서는 인기가 없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사령부 건물 신축예산 100억원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반납하고 각종 위문금품도 전방부대로 이송했다. 반면에 군 전력증강 계획에 역점을 두어 방위산업 전담부서를 신설하고 군 진급관련 3군 장교들의 인사기록을 재검토하여 전문성을 지닌 능력자들의 인사상 불이익을 없애도록 개선했다.

그러다가 임기가 종료될 시점에 민정당의 호출령을 받고 가보니 가까운 선배인 권익현 사무총장의 추천이었다. 전역 1주일 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계급장을 달고 84년 7월 7일 육군 20사단에서 전역식을 갖고 계산하니 학도병에서 병장, 소위, 대장까지 33년 10개월의 장도였다.

그동안 군에서 명령을 받고 내리고 현장을 확인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세월을 후회 없이 뛰었다. 군인정신의 기본이란 ‘책임은 나에게’, ‘영예는 상관과 부하에게’였다. 정치권에 입문해서도 이같은 정신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했었다. 정든 군을 떠나면서 미국에 유학중인 외아들을 귀국시켜 현역으로 입영시켜 만기제대 시키고 나니 홀가분해 졌다.

박 장군은 직업군인으로 입대하여 장군이 된 이상 비록 전역했더라도 영원한 군인이라는 정신으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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