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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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장의 K-레이션

김치통조림 개발비화

전재근 교수, 박통지시로 연구개발 소개

채명신 장군, ‘김치 안먹고 전투 못한다’

1960년대 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있을 때 장병들은 미군용 C레이션 보다 김치와 고추장을 가장 먹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월 미군사령부 측에서는 국방성 병참규정을 들어 반대하여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논란을 빚었다. 이 무렵 국산 김치통조림 개발에 참여했던 서울대 전재근(全在根) 교수가 이에 관한 배경과 비화를 경제풍월에 소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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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지시로 3인 교수가 연구

전 교수는 지난 2월 8일, TV조선에서 전 해병대 사령관 공정식 장군의 월남전 참전기를 방영할 때 일본산 김치통조림을 공급했다는 발언이 나와 국산 김치통조림 제조과정을 정확히 밝혀두고 싶어 제보한다고 말했다. TV조선 방송에서 월남전 참전초기 김치통조림이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 식품회사에서 생산한 제품이라는 사실은 공 장군과 대담했던 경제풍월 배병휴 발행인이 말했던 내용이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1968년 8월 30일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화학지에 발표한 ‘김치 통조림 제조에 관한 연구’(Studies on the Manufacture of canned Kimchi)논문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당국의 지시로 연구 2년 뒤에 발표했노라고 설명했다.

연구자는 이춘영(李春寧) 당시 농화학 과장, 김호식(金浩植) 농과대학장 및 대학원 박사과정 중에 연구실무를 맡았던 전재근 3인이다. 전교수는 연구를 주도했던 이춘영 교수는 연로하여 은둔하고 있고 김 학장은 별세했으며 대학원생이던 자신은 교수직 37년을 은퇴하여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때를 회상한다고 말했다.

섭씨 35도로 5분간 살균처리

월남 참전 장병들을 위한 김치통조림 개발연구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호식 농과대학장과 가정학과 김분옥 교수에게 지시하여 농화학과 발효 미생물 연구실에서 수행했다. 당국에서 워낙 급하다고 독촉하여 밤을 새워가며 연구에 몰두해야 했다.2013-04-08_180722.jpg

연구팀은 국내서 제조하여 월남전장까지 군납하자면 장기간 김치의 신선도를 보존하고 조직감을 유지하기 위해 방부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장기 복용에 따른 장병들의 건강을 생각하여 가열살균 방식으로 바꿔 개발목표를 섭씨 30도 고온에서 한 달가량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부분살균기술을 적용했다.

이렇게 제조한 김치 통조림을 군함 편으로 대만해협을 통과할 때 고온에 노출되자 김치맛이 시어지고 통조림 자체가 팽창하는 문제가 드러났다. 이에 다시 살균온도를 35도로 높여 5분간 살균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결과 전장에서 통조림을 개봉할 때 김치찌개 냄새가 났지만 조직감은 그대로 살아 있었으니 장병들이 만족했다.

전 교수는 연구결과를 실용화한 과정에 있었던 비화도 소개해 주었다.

처음 시험생산은 미국 원조로 건설한 대학내의 파이롯드 공장에서 성공하고 본생산은 인천에 있는 원예협동조합의 소규모 공장에서 맡았다. 이곳 공장은 박 대통령의 유실수 식목 권장으로 생산된 밤을 가공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통조림 생산 설비는 강원도에 있는 수산물 통조림 공장에서 빌려오고 기술자들도 함께 동원했다. 이 첫 김치 통조림 공장 준공식에는 상공부장관이 참석하여 축하할 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

1960년대 나라의 형편이 이 정도였다는 사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료의 하나이다.

김치통조림에서 김치냉장고로

전교수는 김치통조림 개발경력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김치냉장고를 개발하여 오늘의 가전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김치통조림 프로젝트 이후 전 교수는 몸이 불편하여 1년가량 고생했는데 제자 가운데 누군가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이용한 냉장고 설계를 산학협동조합 연구 프로젝트로 신청하시라고 권유했다.

현역시절 전 교수는 농대교수로는 유일하게 자동화의 기본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가전제품에 적용하는 연구실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 신청결과 산학협동 프로그램으로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이용한 냉장고 설계가 선정됐다고 언론에 보도됐지만 실제 연구비가 배정되지는 않았다.

전 교수는 어느 누가 대신에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수소문해 보니 제일제당 이천연구소 소장이 바뀌면서 신·구소장간 갈등이 작용했다. 전임 소장이 결재한 사항을 후임 소장이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 문제가 삼성그룹 임원회의에까지 문제로 제기되어 3~4개월이 지나서야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때 삼성측은 “냉장고라면 우리가 연구해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여 삼성과 전 교수가 공동연구형식으로 추진했다. 이 무렵 국산 냉장고는 일제 내쇼날 제품을 모델로 김치를 저장하는 방식을 연구했지만 삼성 연구진은 냉장고의 기본원리에도 서툰 단계였다.

냉장고 내부의 채소와 김치를 저장하는 박스에 구멍을 뚫은 이유도 알지 못했다. 이에 전 교수가 “야채와 김치가 숨 쉬는 구멍으로 뚫어 놨다”고 설명하여 ‘숨 쉬는 냉장고’라 이름 붙여 크게 히트했다.

이렇게 만든 김치냉장고는 첫 모델로 8천여대를 생산했지만 잘 안 팔려 실패했다. 그래서 전 교수팀의 권고로 생산라인을 고쳐 2년 뒤쯤 생산코자했더니 어느새 (주)만도가 김치 냉장고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삼성이 특허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는 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김치 종주국 자력개발 첫 가전제품

전 교수의 김치냉장고 연구결과는 국제특허를 획득할 만큼 획기적이었다. 특허는 전 교수 명의로 등록했지만 실시권은 삼성전자가 보유했다. 당시 전 교수는 연구결과에 만족했을뿐 특허료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 교수는 월남 군납용 김치통조림 개발연구에부터 국방의무에 동참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4.19 학생혁명 후 보충역으로 병역을 마쳤기 때문에 늘 현역으로 복무하지 못한 마음 한구석의 부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직으로 연구 활동하면서 쇳가루 고춧가루 사건 파동에 관해 연구할 때도 국방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뒤 김치냉장고를 연구할 때는 특허료 보다는 김치 종주국에서 김치냉장고를 개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실제로 김치냉장고는 가전제품 가운데 외국에 로열티를 지급하지 않는 한국 최초의 유일한 한국기술의 개발이었다.

전 교수는 김치냉장고 개발인연을 고리로 삼성전자로부터 10여건의 연구 프로젝트를 맡아 많은 연구 성과를 기록함으로써 삼성과 좋은 산학협동 관계를 쌓았다고 회고한다. 전 교수는 지금 37년의 연구활동을 마감하고 수원에 있는 서울대 농과대학 생명공학 창업보육지원센터에 명예교수로서 역할하며 후진들을 돕고 있다.

한국군은 김치 안 먹고 전투 못한다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2006.6. 팔복원)에 참전 용사들에게 김치 통조림을 공급한 자세한 과정이 나온다.2013-04-08_181048.jpg

맹호부대가 월남 전장에 도착한 초기 3개월간은 천막에서 야영하며 미군용 C레이션만 공급되자 장병들이 “된장, 고추장, 김치 먹고 싶다”는 건의가 올라왔다. 채 장군이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을 만나 “우리 한국군은 김치 안 먹고는 전투 못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뒤 미군사령부 병참 참모부가 한국군용 K-레이션을 가져왔으니 시식해 보라고 권유했다.

쌀밥에 김치 통조림과 꽁치 통조림이 들어 있으니 먹을 만도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 제조공장에서 공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소문이 퍼지자 장병들이 “우리 입맛에 안 맞는다”고 퇴짜를 놓기로 했다. 그 대신에 국방부에 요청하여 국산 김치 통조림을 조달해 주도록 건의했더니 달포만에 도착했다.

이를 미군사령부 측에 보여주며 국산 통조림으로 조달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관계 규정에 따라 미 국방성이 반대한다고 통보했다. 당시 한국은 미국 잉여 농산물 원조국으로 병참규정상 원조국에서는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게 규정되어 있다고 했다.

미군사령부로서도 이 같은 규정을 개정할 권한도 능력도 없었다. 채 장군이 미군당국과 절충 끝에 물물교환 방식을 궁리해 냈다. 1,200만 달러 상당의 물품을 납품하고 그만큼 다른 물품을 받아 오는 방식이었다고 기술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때부터 국산 김치 통조림을 참전용사들에게 공급하여 향수를 달래면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참전용사들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이왕이면 전투복과 군화도…

채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초기 국산 김치 통조림이 급히 서둘러 제조하느라고 일본산 보다 맛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장병들은 어렵게 공급된 과정을 듣고 알았기에 “역시 김치는 국산이 최고야”라고 떠들어댔다고 한다.

김치에 이어 전투복과 군화에 눈을 돌려보니 역시 일본에서 조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장병들이 “일본산 전투복으로 베트콩과 어찌 싸우느냐”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참전용사들은 전장을 방문한 미군 성조지 기자 앞에 찢어진 일제 군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산 전투복과 국산 군화로 갈아입고 신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진해운의 군수물자 운송용역에도 미군수 당국이 물품도난이 잦다면서 시비를 걸어 해약방침을 통보해 왔다. 채 장군이 알아보니 미국측 용역회사들의 트집이었다.

이에 한진해운과 용역계약을 취소하면 “미군용 탄약고 등 군수시설을 한국군이 철저히 경계해 주겠느냐”고 주의를 줬더니 미군 당국이 찔끔 놀랐다. 당시 한진해운은 매일 수백대의 화물차를 베트공 기습이 잦은 코스로 운송했다. 이에 미군 당국이 손을 들고 해약통보를 취소한 것은 물론이다.

현대건설을 비롯한 한국 건설회사들의 건설공사 수주에도 이 같은 현상이 잦았다. 이때마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미군 사령부와 협조하여 문제를 풀 수 있었다.

라면도 한국의 삼양라면과 일본라면과 입찰경쟁이 극심했다. 납품가격과 품질시비가 요인이었지만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간접 개입으로 삼양라면이 낙찰 받아 참전용사들이 국산라면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이 6.25를 격퇴시킨 미군의 한국전 참전에 대한 보은성격이라고 했지만 국군현대화와 경제개발에 음양으로 크게 기여한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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