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대한민국 건국기 여성지도자

메논 박사와 모윤숙

최종고 교수, 제14회 이승만포럼 발표

뉴데일리 2012-05-22_085840.jpg 이승만연구소(회장 안병호) 주최 제14회 이승만포럼이 4월 5일 서울 정동 제일감리교회에서 ‘이승만과 메논, 모윤숙’이란 주제로 열렸다. 이날 최종고(崔鐘庫) 서울법대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메논 박사와 모윤숙 시인의 역할에 관해 자세히 발표했다.

대한민국 건국과 유엔한국위원단

유엔한국위원단 의장으로 한국을 방문한 메논(K.P.S Menon) 박사는 모윤숙을 만나 깊은 인간관계로 교제하면서 2012-05-22_085904.jpg 대한민국 건국에 공헌했다. 메논 박사는 이승만 박사와 모윤숙 및 여성 사교클럽인 ‘낙랑클럽’과의 관계 등을 통해 대한민국을 이해하게 되고 6.25전쟁 때에도 미·소 냉전체제하에 비동맹 중립노선을 택한 인도가 휴전협정 이후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메논 박사는 1948년 1월 서울에 도착하여 20만명이 참석한 서울운동장에서의 환영식에서 이승만 박사의 환영사를 받고 “한국이 통일국가로 독립하기를 바란다”는 답사를 했다. 그로부터 10주간 한국에 머물면서 인도 시인 타골이 ‘아시아의 등불’이라고 예찬한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미·소 냉전 바람으로 한반도는 끝내 분단되고 말았지만 여류시인 모윤숙을 만나 교제하면서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뒤 메논은 인도 외무장관, 소련 주재 인도 대사를 역임했으며 공직 은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케랄라대 부총장으로 자서전 ‘많은 세계들’을 남기고 1982년 세상을 떠났다.

메논 박사와 이승만 박사

메논 박사의 한국 활동은 모윤숙 여사가 그의 연설문을 모아 외대 정인섭 교수의 번역으로 ‘메논 박사 연설집’(1948.문화당)으로 남아 국회도서관에 한 권이 보존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연설문 서문을 통해 “한국민족문제 해결에 메논 박사가 취하신 태도에 만강의 감사를 올린다”고 적었다.

그러나 메논 박사가 많은 한국사람들과 접촉하여 남긴 기록문에는 유엔한국위원단의 활동에 관해서는 “냉전의 바람이 너무 강했다”고 적었다. 2012-05-22_090006.jpg

“한국에는 400개의 정당들이 있었지만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세 사람의 지도자가 극심한 반목을 빚었다. 이중 이승만은 미국 윌슨 대통령과 친분, 독립운동 등으로 인도의 네루와 같은 국민 지도가 될 수 있었지만 좌우익 대립 속에 극단적 우익으로 전환했다. 한국은 이데올로기 충돌 속에 남북이 경찰국가와 전체주의국가로 대립되었다. 한국위원단이 중간 코스를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메논은 남한이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선거를 치르는 것은 무용한 것이라고 호소하고 두 개의 주권국가가 존재하면 충돌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유엔이 미국에 의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방향으로 결의했다. 이때 캐나다와 호주가 반대했고 인도는 찬성했다. 메논은 이에 항의하지 않고 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한 후 더 이상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에 아시아의 등불을 다시 켜고자 노력했지만 냉전바람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메논 박사는 한국전쟁에 관해 유엔한국위원단의 관찰에 따라 유엔 총회가 북한을 침략자로 선언했다고 밝혔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남한은 침략자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승리에 취한 맥아더는 유엔의 위임을 초과하여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때 중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인도는 중국과 서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로서 영국과 미국에게 이를 전달했지만 미국이 듣지 않았다.”

메논 박사는 중국통으로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리라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한 어느 쪽에도 군사지원을 하지 않고 휴전과 포로문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는 네루 수상의 정책입안자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1952년 소련 대사로 부임했다.

모윤숙의 메논 박사와 외교 교제

모윤숙 시인은 메논 박사의 마음을 이승만 박사 지지로 돌리려고 고심했다. 모윤숙은 춘원 이광수를 메논에게 소개하여 문학을 통한 공감대 확산도 노력했다.

모윤숙은 1949년 3월,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승인을 받은 후 귀로에 장면,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등 대표단과 헤어져 인도를 방문하여 네루 수상의 만찬에 초청되는 국빈예우를 받았다. 모윤숙이 메논 박사께서 “한국을 위해 고생하며 원하는 일을 해주셨다”고 감사하자 네루 수상은 이승만 박사가 너무 자기 고집만 세운다고 말하고 “내가 그 고집을 좀 숙이라고 하더라”고 전해 달라고 했다. 2012-05-22_090116.jpg

이에 모윤숙이 메논 박사 부부를 쳐다보면서 “수상님의 말씀을 잘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박사의 고집정치가 상대방의 수완을 거부하는 힘이 된다”고 덧 붙였다.

메논은 1965년에 발간한 자서전 속에 이승만, 김구, 김규식, 모윤숙, 임영신 등에 관해 기록했다. 가장 친애한 사람이 여류시인 모윤숙이다.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졌지만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랑과 슬픔과 기쁨 등을 이야기했다. 많은 회의에서 연설에 지쳐 아무에게 말하지 않고 빠져나와 모윤숙의 집으로 가서 그녀와 임영신과 함께 보냈다.”

“모윤숙은 시인이자 애국자로 남한에 주권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배반이라고 말했다. 모윤숙은 나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한국의 구세주’라는 시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유엔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모든 것이 되어 가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메논은 귀국 후에도 모윤숙과 편지를 계속했다. 그녀의 딸 안경선은 1961년부터 84년까지 메논이 모윤숙에게 보낸 편지 20통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 건국기의 여성지도자들

대한민국 건국기에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지원해준 ‘낙랑클럽’이 있었다. 영어 잘하고 교양 있는 여성들이 모여 주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민간외교하는 비밀 사교단체였다.

총재는 김활란, 회장은 모윤숙으로 이대 출신 미모의 여성 150명이 활동했다. 운영비는 장면 국무총리실이 부담했다. 낙랑클럽 회원 가운데 김수임이 공산주의자 이강국과의 사랑에 빠져 여간첩 노릇을 하다 체포되어 미군정보부가 조사한 기록이 ‘모윤숙의 미인계 조직’으로 남아 있다.

모윤숙의 기록에 의하면 대한민국 건국기 여성지도자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해방후 나를(모윤숙) 지도해 준 선배로는 박순천, 황애덕, 김활란, 임영신, 박승호(납북), 황신덕, 고봉경(납북), 서은숙씨 등이 기억에 남는다.”

강원룡 목사도 회고록 ‘역사의 언덕에서’(2003) 이무렵 한국 여성계의 활동을 소개했다.

1950년대 초반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박승호 회장은 동아일보 여기자를 거쳐 창덕여고 교장으로 있다 6.25때 납북됐다. 박승호와 함께 일한 여성으로는 박순천, 황신덕, 황애덕 등이 있다. 과격 우익여성단체로는 여자청년단이 있었는데 제일 열심이던 사람이 황근옥이다.

당시 여성단체들도 좌익계가 압도적이다. 이 때문에 황근옥은 좌익여성들의 돌에 맞아 머리가 터지는 사고를 당했다.

가장 특이한 여성운동단체가 서울여자대학전문학교가 주축인 ‘애국부녀동맹’이다. 가톨릭신자인 박은성이 위원장을 맡아 홍만길, 나신애 등 30여명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초창기는 반공을 위해 똘똘뭉쳐 한집에서 합숙하며 투쟁했는데 공산당 조직에 직접 침투하여 정판사 위조사건을 적발해낸 공을 세웠다.

우익계 여자청년단은 6.25전쟁 중에도 군복을 입고 다녔는데 단장은 모윤숙, 중간 간부로는 이희호, 김정례, 박기순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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