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축구스타의 은행권 출세

헤딩하듯 고객 확보

金在漢(김재한) 주택은 동부지역 본부장

“7월이면 세계 60대은행 진입”

글/ 申貞姬(신정희) 부장

튀는 아이디어로 변신에 성공

왕년의 축구스타 김재한씨(金在漢, 54)가 주택은행 동부지역본부장 이사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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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 주택은행 동부지역 본부장>

1970년대 축구 국가대표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72년 주택은행 축구단에 입단한 후 코치와 감독을 거쳐 90년 서울 개포지점 차장으로 발령나면서 은행원으로 변신했다.

김씨는 이어 94년 경북 경산지점장, 98년 서울 종로지점장 등을 거쳐 99년 본점 개인영업부장을 거쳤다.

이어 지난 2월 8일 정기인사에서 61개 점포를 총괄하는 사령관급인 본부장으로 승진,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서울은행의 경우 1948년 이전 출생자들은 무조건 은행을 떠나야 했을 만큼 최근 50대가 발붙이기 어려운 은행 분위기에서 김씨의 경우는 특별한 사례로 손꼽힌다.

그러나 서울 도봉구 창동지점 3층 집무실에서 만나본 김 본부장은 나름대로 성공요인을 갖추고 있었다.

“선수생활을 할 때도 비교적 늦게 대표선수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늦게 시작해서 늦게까지 뛰는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동기인 이회택, 변호용씨 등은 21?22세때인 60년대에 이미 대표선수가 되었었죠. 그러나 저는 26세때인 72년에야 후배인 차범근 선수와 함께 대표선수로 발탁되었습니다. 그 대신 33세때까지 선수로 뛰었습니다. 남들은 은퇴할 시기에 노장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것이 제 스타일인가봐요.”

은행원이 된 뒤에도 그의 노익장 기질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79년까지 대표선수를 지낸 김씨가 80년부터 10여년간 코치, 감독 등 축구 지도자 생활을 한 것이 은행 업무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90년 개포지점 차장으로 처음 발령받았을 때는 사실 은행업무를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금융지식이 적은 대신 축구시합할 때의 경험을 살려나갔습니다. 경기에 이기기 위해 전략을 짰던 경험들이 은행업무를 잘해내도록 해 준 것이지요.”

영업실적 1?2위 점포 만들어

김씨는 은행원이 된 후 금방 자질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것은 운동선수 및 지도자생활 때 쌓은 순발력과 경험이 은행업무에도 각종 아이디어를 내게 해줬기 때문이다.

김씨는 개포지점 차장 시절, 지점 2층에 ‘개포골 사랑방’이란 상담실 겸 휴게실을 개설했다.

개포동의 지역환경이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가계성 예금을 많이 유치할 수 있는 여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포골 사랑방을 아파트 부녀회, 지역 어머니회, 상가번영회, 심지어 동사무소 회의 장소로까지 개방했습니다. 주민들이 부담없이 휴게실을 이용하도록 한 것이지요. 은행에서는 이들이 안건만 가져오면 A4용지에 회의내용을 잘 타이프해주고 간단한 다과를 제공하는 등 최선의 서비스를 했습니다. 테니스회 모임이 이용할 때는 미리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들의 경기 내용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구해 틀어주는 등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이용객들이 모두 저희 개포지점 고객이 된 것이지요.”

개포지점의 실적이 나날이 좋아졌음은 물론이다.

김씨 또한 이 2년반의 차장시절 동안 은행측으로부터 ‘지점장으로 내보내도 될 만하다’는 인정을 받게된 것 같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지점장격인 출장소장 발령을 받아 94년 대구 경산지점장으로 내려갔으며 이어 서울 월곡동 지점장 등을 거치게 된다.

96년엔 자진해 금융연수원에 들어가 6개월 정도 금융환경 및 국제금융 등에 대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 무렵 유럽으로 연수를 떠나 영국의 선물시장 등을 견학, 선진금융에 대해 조금씩 배워나갔다.

이때의 공부가 이후 97년 12월에 밀어닥친 IMF 구제금융사태를 잘 넘기고 격변기에 은행원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준 것 같다고 김씨는 술회했다.

금융사기꾼들 유혹 물리쳐

김씨 스스로는 97년 12월부터 1년2개월 정도 종로지점장으로 재직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당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종로지점을 맡아 실적 1위의 점포로 변화시켰을 때의 쾌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직원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취하고 있을 만큼 전성시절이었습니다. 제 후임자도 제가 이뤄놓은 실적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합니다.”

김씨는 종로 지역의 특성상 가계금융보다 대기업과의 거래를 개척할 수 있는 곳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 당시는 자금사정이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던 현대그룹을 계열사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왕년의 축구스타였다는 것이 고객들과의 상담에서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장점도 십분 활용했다. 대 고객관계에서 50점은 따고 들어가는 것 같다는 것이 김씨의 말이다. 따라서 일단 친해진 후 거래내용이나 금융상품에 대해 성실히 설명하면 쉽게 성사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현대측과는 이야기가 잘 진행돼 현대자동차, 현대종합상사, 그리고 현대관광까지 거래처로 확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대정보기술측과 거래를 터다가 본점 영업부장 발령을 받아 종로지점을 떠나게 돼 아쉬웠습니다.”

김씨는 이때가 은행원으로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맹활약했던 때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시절 위기도 숱하게 넘겼다고 되새긴다.

종로지역이 지역인 만큼 장안의 온갖 사기꾼들이란 사기꾼들은 다 한번씩 자신을 집쩍거려본 것 같다고 한다.

요즈음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구화폐사건, 미국발행 CD사건 등이 그 때 이미 자신에게 미끼를 던지곤 했다는 것이다.

“축구선수 출신이니까 무엇을 잘 모를 것이란 생각으로 제게 접근해온 사기꾼들이 참 많았습니다. 거액의 외국채권을 갖고 있다는 사람, 건국채권, 미국 국채, 대우 자금 회사채, 산업금융채 등 온갖 구실로 접근해오는 사람들의 술수에 말려들면 큰일나지만 그렇다고 은행지점장으로서 그들을 함부로 대해서도 안되던 때였습니다. 가끔 차장급들이 판단을 잘못해 휘말릴 뻔한 적도 있었지만 제가 호통을 치곤 해 위기를 잘 넘겼습니다. 결국 당시는 사기꾼들이 또 다른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치는 식의 사건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젊은 은행원들 중 인재 많아

김씨에게 유혹이 있은 후 엇비슷한 사건으로 국민은행 태평로지점장이 구속되고 외환은행 금융사건 등이 터지는 것을 보고 김씨는 마치 지뢰밭을 지나온 느낌이었단다.

역시 올바르지 않은 거래는 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은행원은 정도를 걸어야 오래 일할 수 있음을 깨달았단다.

일반인들의 은행원들을 보는 시각이 건전한 전문직이나 샐러리맨이라기 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도 상당함을 이때 느꼈다고도 한다.

그러나 내부에서 보는 은행원들 특히 젊은 층들은 토익점수가 적어도 8백50점에서 8백70점 수준이 될 만큼 상당한 엘리트들임을 김씨는 강조했다.

언제든 국제금융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 정도의 어학실력과 국제감각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정보에 앞서 있다고 말한다.

이런 유능한 인력들이 앞으로 금융기관들을 국제경쟁시대에 맞게 끌고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아울러 앞으로는 덩치 큰 금융기관들만 생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또한 선진금융시스템으로 빨리 전환해야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덧붙인다.

“우리나라의 금융환경은 지금 큰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주택은행만 하더라도 오는 7월 1일이면 국민은행과 합병하게 됩니다. 우선 두 은행의 자산부터 통합되고 이어 상품가격, 금리 등이 통합되겠죠. 금융상품이 하나씩 통합된 후 전산완료까지는 1년반 이상 시간이 걸리겠죠. 외국은행들이 한국 금융시장에 속속 침투하고 있는 이 시대에 선진금융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가 힘들어집니다.”

주택은행이 2년여동안 맥킨지로부터 컨설팅을 받은 것도 모두 금융시스템을 선진화시키고 새로운 영업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포항제철 축구팀과 성과급 계약

김 본부장은 축구선수 출신으로서 2천2년 월드컵에 거는 기대가 상당했다.

주택은행이 2천2년월드컵 공식은행으로 지정돼 국제축구연맹(FIFA)에 2백71억원을 기부하기도 했지만 월드컵의 인기몰이 및 성공이 주택은행의 홍보와 영업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금년 중으로 ‘월드컵정기예금통장’을 개발하고 앞으로도 여러 가지 월드컵 관련 금융상품을 개발, 홍보, 판매해야 할 입장이기도 하다.

“주택은행이 오는 7월이면 자본금 규모로 세계 60대 은행에 들게됩니다.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는 유일한 국내은행으로 세계에 홍보할 수 있는 아이템들을 계속 찾아야되겠지요.”

국내 프로 축구팀 중에서는 포항제철축구단과 연간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포철 축구팀이 경기에 나갈 때는 주택은행 상표를 단 유니폼을 입는 대신 주택은행은 성과급으로 최고우승때는 연간 15억원을, 최하위때는 연간 7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제가 처음으로 주택은행과 인연을 맺은 것은 순전히 민병대감독이 이끌어줬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시중은행들에 비해 자산규모가 작았고 주택금고에서 은행으로 전환한지 2년밖에 안된 서민주택 전담 기관은행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소매금융만 하다보니 IMF를 겪으면서 기업을 상대한 시중은행에 비해 손실이 적었던 점이 오늘의 주택은행으로 클 수 있었던 거지요. 저로서는 주택은행을 택한 것이 다행이었으며 이제 지역사령관급까지 올랐으니 행운이 따랐다고 봅니다.”

아직도 축구에 대한 사랑과 미련이 남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팀의 경기는 빼놓지 않고 본다고 한다.

축구외의 취미는 인터넷 바둑을 즐기는 정도란다. 본인의 건강관리를 위해서 매일 아침 헬스클럽을 나가며 슬하에 장성한 1남 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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