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2013-09-27_094044.jpg 여간첩 소정자의 전향수기
내가 반역자냐
6.25당일 미아리서 인민군 길안내
열성당원으로 2차 남파 자진 전향

어느 고서점에서 1960년대에 발행된 전향 여간첩의 수기를 발견했다. 필자 소정자(蘇貞子)씨가 “내가 반역자냐”고 반문하며 자진 월북, 남파, 전향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자필고백서 성격이다.(1967.1 방아출판사, 425p).

지하당원에서 9.28 후 월북 여간첩

저자 소정자씨는 일제 시 진주 부청(현 시청)에 근무하면서 일인 총력계 주임 나까무라로부터 “8월 15일에 출근하여 천황폐하의 중대성명을 들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듣고 보니 일왕의 항복선언이었다. 해방정국 소용돌이 속에 소 여인은 남로당 지하당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다 9.28 서울수복 후 월북하여 여간첩이 됐다.2013-09-27_094303.jpg
이보다 앞서 소씨는 여순반란사건 직후 가명으로 변장하여 서울로 올라와 삼선교와 명륜동에 은거 암약하다 1949년 8월 6일 남편이 특무대에 체포되면서 “수천 명의 생명이 달려있다”는 문건을 받았다. 이듬해 4월에 소씨도 체포되어 성북경찰서에 구금됐다. 이때 글도 모르는 무식쟁이로 철저히 위장하여 한 달 만에 무죄 석방됐다.
남편은 중대사범으로 분류되어 마포형무소에 구금됐다가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어 6.25직후 처형됐다. 이 때문에 소씨는 6.25로 인민군들이 서울로 진입하자 인민군에 입대했다가 국군이 북진할 때 월북했던 것이다.

남로당 변절자들 검거 총살형

6.25 당일 소씨는 장충단 공원으로 나가 당 조직사업에 참가한 후 삼베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미아리고개로 나가 인민군들의 길을 안내했다. 돌아오면서 서울대병원 뒷마당에 즐비한 국군시체를 보고 동대문경찰서 마당에 쌓인 정복 경찰관들의 시신도 봤다.
벌써 서울시내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출감자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곧이어 북에서 내려온 정치보위부가 남로당 지하조직 변절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소씨가 잘 알고 있는 경남출신 지한종이 체포되고 북로당이 파견했던 성시백(成始伯)의 조직 부책인 김명룡의 부인 주 여인도 체포됐다.
또 많은 사재를 헌납해온 부산 북진양행 대표 강창영씨 부자도 체포되어 총살됐다. 그는 남로당 서울시당 재정책으로 활동했지만 수도경찰청에 체포됐을 때 전향했다는 죄목이었다.

모란봉 지하극장서 김일성 만나 열성당원

소씨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위생병으로 근무했지만 국군이 진주하자 공산당 간부들의 피난 이삿짐과 함께 북으로 도주했다. 1952년 초 ‘연로자 제대명령’에 따라 소씨는 새로운 임무를 배치 받으러 가는 길에 남편과 동지 사이인 정희영씨를 만났다.
그는 평양과학원 역사연구소에 근무하면서 김일성대학 교원사택에 거주하고 있었다. 모두가 가족들은 중국으로 보내고 남자들만 합숙하면서 이빨 빠진 사발에 강냉이죽과 소금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노동당에 가서 제대증과 추천서를 제출하니 재정성으로 배치했다. 당시 부벽루 옆 재정성의 지하 방공호에는 소련 고문관과 재정상 및 부상 등 고위직이 가족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입구에는 목총을 든 보초가 경비했다. 재정성에는 여성직원이 9명이었는데 소씨는 재정성 여맹 부위원장으로 지명되어 농촌지역에 나가 선전 강연했다.
1952년 8.15 경축행사가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열렸다. 단상에는 모택동과 레닌 초상화가 걸려있고 소련과 중공 국기가 세워있었다. 이날 소씨는 신격으로 추앙된 김일성을 처음으로 만나 열성당원이 됐다. 이 무렵 당에서는 사교댄스를 배우라는 지시가 내려와 밤마다 댄스연습이 한창이었지만 소씨는 아무리해도 춤을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남로당 숙청보고 ‘자유가 어디 있느냐’

어느 날 중앙당 ‘결정서 보고대회’가 열렸다. 김일성이 “조직의 사상통일이 승리의 기초”라며 연설한 내용이지만 남로당의 숙청이 요지였다.
박헌영과 이승엽 등 남로당 ‘종파분자’들이 남반부끼리 패당을 짜서 북로당 출신들을 천시하며 미 제국주의의 지령 하에 중요 기밀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박헌영 집에서는 금괴가 발견되어 미국 고용간첩 임이 드러났다고도 말했다. 이를 계기로 박헌영 일파가 숙청되고 부수상 허가이와 산업성 부상 부부가 자살했다고 들었다.
소 여인이 이때부터 공산당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돌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 무렵 영양결핍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개구리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전쟁 때 겪은 폐결핵이 재발하여 소련병원에 잠시 입원하기도 했다.

인민경제대학서 국군출신들 만나

어느 날 중앙당 연락부가 소환하여 갔더니 “당이 혁명 유가족 사회보장사업 한다”면서 남편사망에 따른 혁명 유가족 수속을 밟도록 지지했다. 이때 ‘애국열사 유가족 원호 제1호 통장’을 발급 받았다. 바로 대남공작용이었음이 얼마 뒤에 드러났다.
폐결핵 요양 중인 1954년 5월, 인민경제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1956년에는 국군출신 5명이 당 추천으로 입학했다. 남로당원으로 국군에 입대했던 전주 정경호, 부산 김종운, 진주 하창영, 대구 박옥경 및 북송교포 1명 등이었다. 이중 박옥경은 간호장교로 사병과 결혼했지만 입원 중인 대대장과 간통하다 발각되어 월북했다.
1958년 8월에도 국군 출신 3명이 추가 입학했다. 함경도 출신의 비행조종사 중위는 다방레지를 태우고 월북했고 경북 출신 육군중위는 오른쪽 팔이 잘려나간 부상을 입고 월북했다. 인민경제대학 3년 과정은 남한출신 100명으로 졸업했다.
이 무렵 최창익 일파의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어 처형됐다. 1958년 9월, 김일성의 사회주의 건설을 비판했다는 죄목이었다.

1차 남파 시 시장물자 보고 충격

인민경제대 졸업 후 중앙당이 중대과업 지시가 있다기에 대동강 기슭의 단층 기와집으로 갔다. 당에서 “오늘부터는 동무 대신에 선생과 아주머니로 호칭한다”고 말했다.2013-09-27_094635.jpg
매일 남한 방송을 듣고 벽에는 남한 말씨를 적어 놓고 연습했다. 옷차림도 중류부인으로 행세하라면서 모시 치마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서울 시민증을 휴대토록 했다.
어느 날 평양을 출발, 원산에 도착했다가 밤 12시에 강원도 해안 보리밭에 상륙했다. 보리밭에서 옷을 갈아입고 큰길로 나오자 15세쯤 처녀가 소를 몰고 그냥 지나갔다. 낡은 군모에 와이셔츠 입고 손목시계 찬 청년도 무심코 지나갔다. 2시간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이르러 서울행 버스를 타고 보니 모시 치마저고리 차림은 한명도 없었다. 기관원이 쓰고 다닌다는 ‘검은 안경’은 엿장수도 쓰고 다녔다.
버스 안에서 라디오방송이 흘러나오니 놀랄 지경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시장으로 가니 천당에 온 느낌이었다. 고기와 먹거리가 넘쳤다. 새로 옷을 사고 파라솔과 핸드백도 사고 미장원 가서 머리도 다시 손질했다.

2차 남파로 전향 후 ‘내가 반역자냐’

접선 1번집과 2번집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3번집에 가니 부인이 “남편(박 과장)은 오전 근무만 하고 친구 만나러 갔다”고 말했다. 세간이 너무 으리으리하여 속으로 놀랐다. 부인이 간첩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두려웠다. 결국 남파 15일 만에 빈손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평양 책임자가 남한에서 구입한 시계, 옷 등을 내놓으라고 해서 돌려주었다. “남한이 왜 잘사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2차 밀봉교육 때는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기를 암송시켰다. 트랜지스터라디오도 준비해 주었다. 서울로 잠입하여 여관에 투숙하면서 파고다 공원 앞에서 목욕한 후 접선장소인 주문진 바닷가로 갔다. 여러모로 사상적 동요가 일었다.
서울로 돌아와 포섭 대상인 공군대위를 종로3가 다방서 만나 방첩대에 자수키로 했다. 방첩대에 가니 소씨를 안내했던 요원들과 포섭 대상자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휴전선을 넘으려다 체포됐다고 했다.
소 여인이 전향서를 작성하고 자유를 찾았다. 그 뒤 “내가 과연 반역자냐”고 자문자답하는 수기를 집필했다. 그녀는 오랜 망설임 끝에 이 책을 썼지만 어느 누구의 권유나 조언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이었다고 머리글에서 밝혔다. 조국에 대한 죄의식이 바탕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로 자신의 간첩인생을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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