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언론인 金錫吉님 회고]

백범과 나의 아버지

金武一씨, 백범총서 속 선친이야기2013-07-30_213222.jpg
해방정국 건국실천원 양성운동

용맹 해병대 장교 출신(대위)에다 현대기아차 계열 CEO로 활약했던 김무일(金武一)씨가 ‘백범(白凡)과 나의 아버님’ 회고를 경제풍월에 기고해 왔다. 김 회장은 오는 10월 광화문에 조선어학회 선열기념탑 건립계획을 듣고 한글사랑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아버님(金錫吉)을 회고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백범총서’ 통해 선친 모습 회고

만주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하던 김석길씨 장남으로 태어난 김무일은 베트남전 참전 후 전역하여 현대·기아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등 임원과 CEO로 경영력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베트남전 참전전우회, 서양화가, 사진작가로 활동한다.2013-07-30_213422.jpg
김 회장은 서울사대부고 시절부터 우정을 쌓은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으로부터 ‘백범총서’(白凡叢書)를 받아 읽고 해방정국 하에 선친이 백범과 함께 건국운동에 적극 참여한 기록을 재확인하여 ‘백범과 나의 아버님’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의 선친 김석길님은 평북 정주 태생으로 일찍부터 민족정신에 눈을 떴다. 정주(定州)는 춘원 이광수, 소월 김정식, 조만식, 현진건, 유진오, 백낙준, 함석헌, 문선명 등 민족지사와 지성을 많이 배출한 문향(文鄕)으로 유명하다.
김석길님은 고향에서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지원하다 왜경에게 적발되어 고초를 겪은 후 만주로 도피하여 장남 김무일을 낳았다.

언론인으로 끝까지 백범 측근 보좌

김석길님은 1940년경 북경대 정경학부를 나와 동아일보 봉천(현 심양) 특파원으로부터 매일신보, 만몽일보 지국장으로 활동하다 백범에게 발탁되어 오랫동안 측근으로 보좌했다. 8.15로 임시정부가 귀국한 뒤에는 백범의 과도정부 수립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해방정국 하에서 언론인 김석길씨는 정국상황과 국제관계를 해설하는 논객으로 활약하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사장의 권유로 논설위원, 주필을 역임했다. 그 뒤 중앙일간지, 통신사, 방송사 해설위원,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김석길님과 백범과는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과 운영으로 밀접한 인간관계를 끝까지 지속했다. 한글사랑과 관련해서는 ‘조선어 사전’ 편찬에 재정지원 했다.
해방정국은 민족 내부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이 생기고 박헌영 등 공산진영과도 뜻과 길을 달리했다. 이 때문에 백범의 건국실천원양성소 발족은 우여곡절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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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건국실천양성소 개소

이승만은 북의 소련 군정을 지켜보면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백범은 통일과도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2013-07-30_213809.jpg 맞섰다. 이 무렵 미군청장관 하지 중장이 자문기구로 ‘민주의원’을 설립하자 백범의 과도정부론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백범은 ‘한국독립당’을 기반으로 우익정파를 이끌면서 민족국가 건설 인재양성을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미군정, 이승만 계열 및 박헌영의 공산계열 등이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경무국 수도청장 장택상은 경찰을 동원하여 한독당 본부와 백범의 숙소인 경고장을 압수수색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1946년 12월, 백범을 준비위원장으로 앞세운 ‘건국실천’ 기성회가 발족했다. 상무이사진으로 언론계 김석길, 여성계 황기영 독립촉성애국 부인 회장, 와세다대 법률전공 진성록씨, 독일철학박사 안호상, 재정지원 손홍린씨 등 5인이 선출됐다.
‘건국실천’ 개소식은 용산 원효사에게 열려 각계 300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원효사는 일본 재벌계 소유이었지만 김법린이 불하받아 백범에게 무상으로 대여했다. 개소 당시 상무이사진에는 기성회 이사진 외에 연희전문 교수로 조선체육회에서 활약했던 김낙원씨가 추가 됐다.

정계, 언론계, 학계의 강사진

‘건국실천’은 제1기에서 9기까지 수료생을 배출했다. 1948년 12월 제5기 수료생 명부에 따르면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부소장 엄항섭, 이사장 장형(張炯)으로 진용을 확대 구성했다.
백범이 이승만을 끌어드리고 이사장을 단국대 설립자인 장형을 유치한 것이 특징이다. 장형은 보성전문대 재학 중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한 지사(志士)이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장충식(張忠植) 단국대 이사장이 바로 장형 지사의 아들이다.2013-07-30_213913.jpg
‘전국실천’의 입소자격은 20대에서 40대까지 애국심이 투철하고 애국단체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당시 강사진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정당인, 유명 언론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개소 당시 강사진은 △고대 변영태, △서울대 조기준, △한민당 장덕수, △조선청년단 이선근, △동아일보 설의식, △서울신문 마명(馬鳴) 등 17명이었다. 이 가운데 마명씨는 1925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으며 해방 후 서울신문 정치부기자로 활동했지만 백범이 좌익계열 청년도 교육하여 독립투사로 양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강사로 초빙했다.
제5기 강사진에는 △단국대 장형, 장도빈, △연대 민영규, △임정 엄항섭, △한독당 김인기, △한성일보 안재홍, △대한노총 황기성 등 19명, 제8기 때는 △동국대 양주동, △연대 민영규, △서울대 김경수, △고대 최호진, △한독당 조완구, △YMCA 홍병선 등 21명의 이름이 올라있다.

백범 암살로 홍익대에 흡수

건국실천의 기본교육은 1개월로 건국강령, 민주주의 해설 및 일부 제식훈련도 실시했다. 제식훈련은 강낙원 교수와 일본육사 출신 신태영이 맡았다.
언론인 김석길은 건국실천의 재정을 지원하면서 정치분야 강사로 자신이 집필한 ‘한민족의 당면진론’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요강을 해설하고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건국실천은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9기생 수료까지 계속했지만 백범과 김규식의 남북협상, 5.10총선거와 이승만 대통령 당선 및 대한민국 건국으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백범은 건국실천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형 이사장을 초빙하고 심지어 한독당 재정까지 끌어 들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무렵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자 건국실천은 해산위기를 맞아 그해 9월 홍익대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로써 백범의 건국구상의 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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