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다시쓰는 박정희(朴正熙) 평전](41)

불굴의 혼

핵 개발의 꿈

글/ 高正一 (고정일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민주주의는 꼭 하게 되어 있습니다’

1975년 5월 21일 오전 10시 30분.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를 방문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만나서 악수하고 여·야 영수회담에 들어갔다. 김영삼은 이택돈 대변인을 데려갔으나, 영수회담에서는 박정희와 김영삼 둘만 마주앉았다.2011-11-26_142329.jpg

커피를 마시면서 김영삼이 작년의 영부인 육영수 서거에 대해 새삼 조의를 표하자, 박정희는 창밖에 앉은 새를 가리키며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와 같습니다.” 하며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훔쳤다.

박정희는 아시아 지도를 꺼내놓고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한 북한의 남침 준비 상황을 설명하며 야당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고, 김영삼은 민주회복에 관한 대통령의 결단을 요망한다.

박정희: 만일 북한이 남침하면, 한·미 양국 대통령이 승인한 ‘서울 사수(死守) 7일 작전’ 또는 ‘9일 격퇴작전’을 펼칠 겁니다. 군사적 대처 방안은 이처럼 거의 완벽하게 되어 있으나, 문제는 후방입니다. 월남이 왜 패망했나요? 나라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국론분열로 얼마나 난리를 피웠나 말입니다. 김 총재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나하고 똑같을 거라 믿습니다. 우리가 비록 여와 야로 정치적 입장은 다를망정 국가 안보에 관한 한 초당적으로 총력안보에 협조해주시면 고맙겠소.

김영삼: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나라가 있어야만 정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유신헌법 개정으로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주기만 하시면 제가 적극 돕겠습니다.

박정희: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이 공산당한테 총 맞아죽은 마당에, 이런 절간 같은 데가 뭐가 좋아서 오래 살고 싶겠어요? 김 총재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민주주의, 언젠가는 하겠습니다. 북한의 남침 위협이 현저히 줄어들면 헌법 개정도 할 수 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김 총재한테 부탁할 게 있습니다.

김영삼: 말씀하십시오.

박정희: 방금 이야기,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주시면 고맙겠소. 우리나라 사람들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미리 알려지면 금방 이상한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도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거고.

김영삼: 이 기회에 김대중 씨 이야기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납치되어 왔으므로, 원상회복을 시켜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국제관계도 있고 말이지요.

박정희: 그건 일본하고 이미 양해사항으로 넘어가기로 한 건데……. 말이 나온 김에 이야깁니다만, 그 사람 왜 그럽니까? 도대체 누워서 침 뱉기지, 왜 밖에 떠돌아다니며 도쿄에 망명정부 세우겠다는데 그것도 일본에 다가 제정신입니까. 온갖 소리로 나라 망신을 시키느냐 말입니다. 작년 광복절 그 사건도 김일성이가 김대중이를 대통령 만들어주려고, 그래서 날 죽이고 둘이 합작할 요량으로 저지른 거예요. 이건 내가 지어낸 소리가 아니라, 암살범을 심문하는 과정에 밝혀진 사실입니다.

김영삼: 그 사람이 처신하는 거, 저도 사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하,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 압박은 풀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각하와 만난다는 소식을 듣고, 김상만 회장이 찾아와서 저 보고 선처를 부탁 올려달라고 하더군요.

박정희: 지금까지 나보고 동아일보 광고사태를 풀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김 총재뿐입니다.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나한테 맡겨주십시오.

요담을 마친 박정희와 김영삼은 청와대 비서관들, 이택돈 신민당 대변인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고, 대화도 부드러웠다. 김영삼은 당으로 돌아와서 박정희의 당부대로 회담 내용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주위로부터 많은 오해를 샀다. 박정희한테 거액을 받고 매수되었다는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그 부분에 관해서 당시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관리했던 김정렴 비서실장은 ‘절대 그런 사실 없다’고 못을 박았다.

영수회담을 통해 김영삼과 일정한 우호관계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박정희는 이듬해인 1976년 이철승이 신민당 당수에 선출됨으로써 야당과의 밀월시대(蜜月時代)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철승은 김영삼이나 김대중의 정치관보다 한결 온건한 ‘중도통합론’을 부르짖으며 박정희정권과 타협을 도모해왔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인간적으로나 이념적으로 가까운 이철승의 협조 덕분에 야당과 재야세력의 민주화운동에 신경쓰지 않고 경제개발과 국방강화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으나, ‘박정희한테 기만당했다.’는 생각이 굳어진 김영삼이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로 복귀하는 바람에 여·야 관계가 갑자기 경색되고, 그것이 사회적 불안과 혼란으로 이어져 확대 재생산됨으로써 결국 ‘10.26사건’의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다.

키신저의 우려

‘월남을 저 꼴로 망하도록 방치하는 미국에게 결코 우리의 국가안보를 저당잡혀놓고 태평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런 생각은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를 더욱 굳게 했고,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의 의식을 강하게 압박한 것이 바로 핵무기였다.

박정희가 핵무기를 개발해야 되겠다고 작정한 것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한층 박차를 가하던 1972년이었는데, 핵문제에 관한 개인 지도교사는 당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건설의 실무 책임자였던 오원철 경제수석비서관이었다.

오원철: 핵폭탄은 우라늄탄과 플루토늄탄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기술수준과 재정능력으로 볼 때 플루토늄 쪽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박정희: 어째서 그런가?

오원철: 우라늄탄은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며 개발기간도 길게 잡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라늄 농축시설을 만드는 데만 약 9억 달러가 필요하고, 건설기간은 8년이나 걸리며, 그것을 가동하려면 2백만 kw의 전력이 소요됩니다. 그에 비해서 플루토늄의 경우는 핵연료 재처리시설에 3천9백만 달러, 건설기간도 5년이면 충분하고, 전력도 많이 필요하지 않으며, 약간의 기술도입만으로 국내에서 개발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임자가 저번에 캐나다모델인가 뭔가 하는 원자로 얘기를 했던 거 같은데…….

오원철: 바로 그겁니다. 플루토늄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원자로를 도입하면, 거기서 생산되는 플루토늄의 양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자력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할 때 중수로(重水爐) 원자로를 도입해서 가동하면, 거기서 나오는 폐핵연료 재처리로 연간 2백 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본방향이 설정됨에 따라, 1973년부터 원자력연구소와 한국전력 합동으로 핵연료 기술개발에 착수하고, 늦어도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하며, 해외의 한국인 원자력기술자를 적극 영입한다는 구체안이 마련되었다.

오원철을 비롯해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주재양 원자력연구소 부소장·김철 원자력연구소 공정개발실장 등 핵심전문가들은 중수로형 원자로 도입과 기술문제 협의 목적으로 1972년 5월부터 프랑스와 캐나다 같은 핵기술 기존보유국뿐 아니라 인도나 대만 같은 개발 추진국까지 조용한 가운데 바쁜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미국을 그 대상에서 처음부터 배제한 것은 미국이 우리의 핵무장에 대해서 반대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1974년 5월, 인도가 자기네 라자스탄 사막에서 핵무기 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자, 미국을 비롯한 기존 핵보유국들은 핵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기술과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세계에 퍼져 있는 정보망을 통해 핵무기 개발 희망 내지 추진국들의 동향을 조사한 미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가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는 한편, 프랑스로부터는 핵재처리시설 도입을, 캐나다로부터는 중수로형 원자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1975년 3월 4일, 헨리 키신저 미국국무장관은 한국을 비롯해 캐나다·프랑스·일본·오스트리아 주재 자국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긴급전문을 발송한다.

워싱턴의 정보기관들은 한국이 앞으로 10년 안에 제한된 범위의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중국·소련뿐 아니라 미국까지 직접 관련되는 이 지역 가장 큰 불안요인이 될 것이다. 한반도에 분쟁이 발생하면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핵무기를 지원하게 되므로 한·미 동맹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개발계획은 미국의 안전보장 공약에 대한 한국의 신뢰가 약화되었음을 의미하고, 박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군사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우리의 근본목표는 한국정부가 계획을 포기하게 하거나, 핵무기 또는 그 운반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다자간(多者間) 협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최근 프랑스에게 한국에 핵재처리시설을 제공할 것인지 여부를 묻고 있는 상태이며, 가까운 시일 안에 한국에 대해 분명한 정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당시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가 생각하는 한국의 핵개발 문제는 국무부의 그런 견해보다 한결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핵무장을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음이 분명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추진력과 한국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높은 기술수준, 그리고 외국의 전문 인력을 불러들일 수 있는 일반적 가능성을 감안할 때,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10년까지도 안 걸릴 것이라고 보았다. ‘위험한 목적을 가진 끈질기고 저돌적인’ 한국이 제3국으로부터 핵무기 관련 장비와 기술을 도입하게 되면 미국의 통제력은 상당히 약화될 것이므로, 빨리 단호한 조치로 막아야 한다고 국무부에 답신을 보냈다.

월남이 패망한 1975년 4월 30일 오후, 박정희는 청와대를 방문한 스나이더 대사에게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월남이 패망하기까지 미국이 적절한 지원을 계속하지 않은 데 대해서 실망했으며, 한국은 공산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형 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박정희: 우리가 록히드사와 미사일 기술도입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여러 차례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정부는 왜 여태 승인하지 않는 것입니까?

스나이더: 각하, 그것은 미국정부가 우방인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들에게도 개방을 통제하는 첨단기술입니다. 미국은 이 분야에서 강력한 독점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하께서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이 요청하는 바와 관련해서, 미국은 양국 상호협력의 기반에 입각한 한국의 장기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점 자세히 알려주시면 개별항목들에 대해서는 수출허가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 그렇다면 앞으로 수년간의 계획을 알려드리리다. 우리 국방과학연구소장한테 일러놓을 테니까 접촉해보시지요. 우리는 3?5년 안에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할 작정입니다. 만약 미국이 도와줄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제3국한테라도 지원을 받을 작정입니다.

스나이더: 각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미사일 개발에는 엄청난 비용 지출이 따라야 합니다.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쪽이 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박정희: 물론 막대한 개발비용이 들겠지만,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정식으로 통보할 때까지 미사일 개발을 늦춘다면 너무 늦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서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오기 전에 우산을 준비해놓아야 하지 않겠소? 미군 철수에 대비한 자주국방이 우리의 계획이고 목표인 이상, 미국은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스나이더: 전략적으로 중대한 그런 결정은 상호 협의를 거쳐야 하니 안보협의회에서 다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박정희: 좋소이다. 대사께서 워싱턴에 신속히 보고하실 수 있도록 우리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상세한 브리핑을 하도록 지시하겠소.

박정희는 미국 조야를 휩쓸고 있는 반전여론 분위기를 싸늘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떠나겠다’고 통보할 날이 그리 멀지 않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핵무장은 생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절대선택이었다.

그런 박정희의 예측은 적중했다. 바로 그 이듬해인 1976년의 미국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나선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자마자 철군계획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의 줄다리기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 문제로 미국과의 갈등이 증폭되자, 한편으로는 아주 비싼 대가를 받고 포기하는 대안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굳이 우리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할 생각이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우리한테 지불해야 할 것 아닌가.’

박정희는 내심 그런 퇴로를 준비하면서도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각오로 밀어붙였다.

한국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았으므로 적어도 국제법상으로는 미국의 간섭과 반대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한국을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은 고리 원자력발전소 2호기를 도입하기 위해 미국 수출입은행에 1억 3천2백만 달러 차관과 1억 1천7백만 달러 신용대출을 신청해놓고 있었는데, 미국은 한국이 프랑스와 도입계약을 맺은 핵폐기물 재처리시설을 포기하지 않으면 차관집행을 해주지 않을 방침임을 한국에 명백히 전달했다. 또한, 미국은 프랑스와 캐나다에도 핵무기 개발에 사용될 것이 뻔한 핵폐연료 재처리시설과 연구용 원자로를 한국에 팔지 않도록 외교적 설득으로 압력을 가했다.

미국은 직설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단념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박정희의 강한 자존심을 자극해서 역효과를 가져올까 우려해서였다. 재처리시설이 없으면 아무리 원자력발전소가 많아도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없으므로, 핵폐연료 재처리시설을 가지려고 하지 말아달라고만 요구했던 것이다.

그에 대해서 한국은 국가신의에 관한 문제이므로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1975년 10월 31일,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는 본국 국무성에 다음과 같은 전문(電文)을 발송한다.

한국정부는 프랑스로부터 핵폐연료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라는 우리 미국의 요구를 두 번째 거절했고, 미국은 이 문제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다. 한국의 거절은 박 대통령의 주관 아래 심사숙고로 이루어진 결정임이 분명하다.

프랑스로 하여금 최종계약 체결 전에 판매계획을 중단하도록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 네 가지다.

첫째, 미국의 지원 없이는 추진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한국정부가 깨닫도록 더 이상 추가대응을 하지 않는다.

둘째, 핵폐연료 재처리시설 도입은 묵인하되, 국제사찰뿐 아니라 미국과의 쌍무적 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한국의 방안을 허용한다.

셋째, 재처리시설 구입계약 일시중단이라는 중재안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박 대통령과 접촉한다.

넷째, 비타협적인 태도로 계속 박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문제의 전문은 네 가지 카드의 장단점을 하나하나 열거한 다음, 이렇게 끝을 맺었다.

‘우선은 박 대통령을 접촉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문제는 그를 만나 도전장을 던질 것이냐, 중재안을 가지고 만날 것이냐다.’

박정희는 짐짓 절벽을 등진 채 칼자루를 쥐고서 버티고, 미국은 그가 극단적인 행동을 삼가도록 꾸짖고 달래며 애타하는 형국이었다.

1975년 12월에 가서야 박정희는 프랑스에서 도입하려던 핵폐연료 재처리시설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하기 시작한다. 물론 단순한 일방적 포기가 아니었다. 미국으로부터 응분의 대가를 받아내는 것을 전제로 한 포기였다. 박정희는 스나이더 대사를 직접 만나지 않고 과학기술처장관을 시켜 이렇게 요구했다.

“만약 우리가 핵폐연료 재처리시설 도입을 포기하면 미국은 원자력 분야에서 어떤 협력을 제공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라.”

결과적으로 그 대가는 ‘일본처럼 핵무기는 당장 만들지 않되, 만들 수 있는 기술의 연구와 비축’이란 선이었고, 핵개발을 강행하게 되면 한·미 관계가 파국에 이를 것이 뻔한 처지에서 박정희가 버틸 수 있는 마지노선은 거기까지였다. 약소국의 비애이자 한계였다.

박정희는 오원철 경제2수석이 작성해주고 자신의 손때가 묻은 ‘원자핵연료 개발계획서’를 비롯한 각 연구실무진의 보고서를 집무실 금고 깊숙이 집어넣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강하게 뇌었다.

‘이건 중단이지 결코 끝이 아니야. 아니고말고.’

사라진 옐로우 케이크 미스터리

그렇다면 당시 한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거의 완성단계까지 진행되었던 것일까.

박정희 대통령은 서거하기 직전 우라늄 농축용 분말인 이른바 ‘옐로우 케이크(yellow cake. 정제 우라늄)’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핵폐원료 재처리기술을 금지한 미국과의 원자력협정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핵기술팀은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몰래 개발해놓고 있었으며, 우라늄이든 플루토늄이든 핵폭탄 연료를 100% 확보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이 상당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을 입증하고 확인해줄 자료는 무엇이며, 또 어디 있는가.

당시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각 연구소가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보고서는 크게 분류해서 두 종류였다. 하나는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작성하는 추진계획 및 진행상황에 대한 보고서. 또 하나는 각 연구소의 기술진들이 직접 작성해서 제출하는 세부적 기술보고서.

그러나 당시의 증거자료로서 현재 국가기록원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쓴 ‘원자핵연료 개발계획’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증거자료인 연구실무진들의 숱한 보고서들은 현재까지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국가기록원에서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 보고서에는 핵무기 개발의 기술 관련 알짜 내용이 담겨 있는데, 문건 자체가 증발해버린 것. 요컨대 계획부분만 쥐꼬리로 남고 몸통인 실행부분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박정희 서거 이후 청와대의 대통령 개인금고에 보관 중이던 극비 핵심자료들이 상당부분 사라졌는데, 그 문건들도 그때 도매금으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오원철 경제2수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박 대통령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수석비서관들이 모여 대통령 서재 뒤편에 있던 개인금고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여성월간지 크기의 노란 색 각대봉투 두 개가 있었고, 핵무기 관련 보안문서는 그 각대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담당자였던 나는 그 보안문서들을 봉인한 다음,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에게 넘겼다. 나중에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그 문서들은 전두환의 신군부에 넘어갔다고 한다. 내가 작성했던 핵무기 관련 일부문서가 최근에 보통문서로 분류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을 알고, 다른 핵무기 관련 문서들은 ‘영구비밀문서’로 바꾸려고 국가기록원에 달려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제의 노란 각대봉투 속에 담겨져 있던 문서들은 통째 보이지 않았다. 외부로 유출된 것 같다. 그게 지금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오원철은 문제의 핵 관련 문서들이 미국에 넘겨졌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불법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함으로써 소위 ‘1980년의 봄’으로 알려진 민주화의 꽃을 짓밟은 데 대한 미국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큰 선물’로 사용했으리라는 것.

그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오원철이 이어서 말한 다음 증언은 매우 시사적(示唆的)인 뜻을 담고 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 KIST 출신인 한 연구원이 과거에 우리 기술로 만든 ‘옐로우 케이크’를 보관하고 있다가 미국에게 들켜서 큰 봉변을 치른 적이 있다. 문제는 당시 노 정부의 한심한 대응이다. ‘그건 우리의 자구책(自救策)이었다.’고 당당하게 나가도 되는 건데,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쩔쩔매는 꼴을 보자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마을운동, 농촌에서 도시로

1970년 처음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환경개선과 소득증대에 목표를 두고 전개되었기 때문에 도시지역 주민들에게는 직접 관계되지 않는 한낱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나, 농촌사회의 급속한 변혁과 생산성 향상에 대한 관심이 증폭됨에 따라 그 영향이 도시사회에도 자연스럽게 파급되기 시작했다.

1973년부터 시작된 도시새마을운동은 시민들이 근면·자조·협동의 정신 아래 도시사회의 부조리를 시정하고 건전한 사회기풍을 조성함으로써 아름답고 살기 편한 선진도시를 건설해나가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도시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함에 따라 새마을운동은 명실상부한 거국적 국민운동으로 규모가 커졌고, 그 열기는 또‘학교새마을운동’‘공장새마을운동’같은 발전적 특화(特化)의 단계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사실은 박정희류의 새마을운동 이전부터 선진화한 마을과 그것을 구현시킨 이른바 ‘농촌운동가’가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기에 앞서 일찍부터 지역사회가 만들어간 자생적 새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총사령관 박정희 대통령은 일찍부터 그런 선진마을과 농촌운동가 발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자생적 선진마을의 성공사례를 정부의 새마을운동과 ‘접속’시키기 위해서였다.

1971년 5월, 박정희는 ‘월간 경제동향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앞으로 경제동향 보고를 할 때는 농촌개발의 성공사례를 그 지도자로 하여금 직접 보고하도록 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린다. 1개월 동안의 국내외 경제동향을 정부로부터 보고받는 그 자리는 국무총리를 비롯해서 경제부총리와 각 경제부처장관, 국회의 관계 상임위원장, 경제단체장들, 요컨대 한국의 경제 브레인들 모두가 참석하는 중요한 정례모임이었다.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에 내무부는 비상이 걸렸고, 각 지방은 지방대로 자기네 지역의 새마을 성공사례를 수집하느라고 법석을 떨었다. 그 가운데서 선정된 사례의 주인공은 대통령이 참석한 경제동향 보고회 석상에서 자기 경험담을 발표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그들을 ‘농촌 근대화의 선구자, 새마을의 기수’로 추켜세우고, 산업훈장을 수여하며, 한 달 동안 일본과 대만의 농촌을 시찰하는 해외여행 기회를 제공했다.

어떻게 하여 이런 자리에 나갈 수 있게 뽑히게 되었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로 우리가 해놓은 일이라는 것이 너무 미미한 것이어서 낯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오히려 이 보잘것없는 성과를 가상타하시어 친히 산업훈장까지 달아주시고 오찬까지 한자리에서 같이 나누어주시었던 것이다. 우리는 감격에 앞서, 일국의 원수인 대통령으로서 일개의 농민을 친히 불러다가 이토록 찬양과 대접을 하시는 그 참뜻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일이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 또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부터 앞섰다.

당대통령각하의 옆자리에서 오찬을 나누는 동안에도 각하께서는 지붕의 개량에서부터 닭치는 법에 이르기까지 송구스러울 정도로 자상한 데까지를 일일이 캐물으시면서 농촌의 어려운 사정을 같이 걱정해주시는가 하면, 새로운 농사기술을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각하와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어느덧 그분의 농촌 근대화의 집념이 곧 우리의 집념이 되고 신념으로 불타오르는 것을 느껴 새로운 용기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농촌운동가들은 국가원수를 만나 칭찬과 훈장을 받고 언감생심 함께 점심식사까지 한 감동을 나중에 이렇게 고백하고, 자기가 고향마을과 고향사람들을 위해 기울인 노력이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과제에 부합된 것이었다는 데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 나머지 새마을운동의 자발적 역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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