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유자녀로 자수성가 모델

들을수록 ‘감동과 눈물’
파독광부 성공이야기
朴光根 전 프랑스 한인회장 성공기
6.25 참전 유자녀로 자수성가 모델

▲ 파독광부 출신으로 프랑스 한인회장을 지낸 박광근(朴光根) 회장. (사진=경제풍월DB)

파독광부와 간호사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눈물과 감동이다. 7080 세대는 ‘그때 그 세월’을 잘 기록해 두고 후세들에게도 꼭 전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들의 체험 한마디 한마디를 소중하게 듣는다. 파독광부 출신으로 프랑스 한인회장을 지낸 박광근(朴光根) 회장의 성공 스토리가 대표적인 의지와 집념의 성공모델이다.

EU경제권 교류협력 유공 한국인 얼굴

파독광부와 간호사 가운데 고국으로 돌아와 각계에서 성공한 분들이 많다. 또 독일 현지에서 정착하거나 구라파와 미국으로 이주하여 각종 전문직에 올라 한류(韓流)를 증진시켜 고국발전에 기여한 성공인들 이야기도 적지 않다.
박광근 회장의 경우 서독광부 3년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각종 사업에도 성공하여 모국과 EU 경제권의 교류협력에 큰 공적을 남긴 명사로서 지금도 활약한다.
박 회장이 서독광부를 지원했을 때는 나라가 가난하고 모두가 배고픈 시절이라 막일, 험한 일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당시 서독은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국이지만 전후 일찍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 부국(富國)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이 때문에 지하 갱도 깊숙이 막장에서 채탄하는 광부들을 찾기 어려워 일본인 광부들을 고용하고 있다가 고용계약 만료를 앞두고 같은 동양계로 ‘키 작고 근면한’ 한국인 광부를 찾고 있던 시기였다.
박 회장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머나 먼 타국 땅 광부로 나가 탄광일 외에도 온갖 잡역(雜役)을 마다하지 않고 두 곱 세 곱으로 일하여 계약기간 3년간 출국 당시의 소망을 이룩했다. 뿐만 아니라 현지생활 중에 보고 듣고 느낀 이국생활 체험을 살려 프랑스로 정착하여 학업과 사업에 성공함으로써 파리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로부터 박 회장은 고국을 자주 방문하며 자신의 전문분야와 관련된 비즈니스 자문과 고문역할 및 한·프랑스 우호증진에도 기여하면서 건강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3년계약 무사고 만근후 파리정착

▲ 독일의 함보른 탄광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박 회장은 1966년 7월 30일, 파독광부 제7진 500여명과 함께 출국했으니 꼭 50년 전의 일이다. 계약기간은 3년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지하 수천 미터 갱도의 작업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고 듣고 있었다. 박 회장은 무사고로 계약기간 내내 만근(滿勤)할 수 있었으니 성공이었다.
뿐만 아니라 광부시절 내내 틈틈이 공부하고 교회활동을 중심으로 파독광부와 간호사 등 한인사회의 신망을 쌓고 현지인들과 우애관계로 좋은 평판을 들을 수 있었다.
광부생활이 끝난 후에는 파리로 넘어가 돈 벌어 가며 공부하는 ‘주경야독’으로 기반을 쌓아 식당업에서부터 여행사, 무역업 등으로 성공하여 모국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었으니 파독광부로서 자수성가한 성공모델이 된 것이다.
박 회장의 성공 이야기는 현지 공관에 근무했던 외교관들과 파리 특파원들 입을 통해 전해졌고 여행객과 비즈니스맨들에 의해 소개되기도 했다.
박 회장은 파리생활이 안정되면서 한·프랑스 우호증진에 관심을 보여 1979년 파리 6.25 참전용사협회 명예회원이 되고 은장 국가공로 훈장을 받았다. 박 회장은 선친이 6.25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경찰관 유자녀로서 한국전에 공헌한 프랑스 참전용사회에 각별한 열성으로 최선을 다해 협력했었다.
이어 1982년에는 프랑스 한인회장으로 선출되어 교민사회를 이끌고 1988년 88’ 서울올림픽 유치 후에 1983년부터 5년간 올림픽 후원회장을 맡았다. 또 1989년부터 93년까지 파리 라데팡스 신도시 한국기업 투자유치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1990년에는 세계 한민족 대표자 회의 파리 이사회 대회장으로 활약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프랑스 수에즈그룹 계열 수처리 전문 데그레몽 한국지사 사업고문으로 한·프랑스 경제협력 가교역할의 족적을 남겼다.
한마디로 박 회장이 걸어온 지난 50여년은 가난한 나라 젊은이로 미지의 땅으로 출국하여 온갖 고난을 극복하며 의지와 근면으로 성공한 감동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선친 경찰관 전사후 취업전선 전전

박 회장은 6.25 참전 경찰 유가족 5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대학진학이 어려운 형편 따라 직업전선을 헤매다가 파독광부로 선발됐다.
선친은 향리에서 머리 좋기로 소문 나 일본으로 유학했지만 맹장수술을 두 차례나 겪은 병고로 2년 만에 귀향했다. 고향 충북 진천에서 잠시 교사직을 거쳐 경찰관이 되어 천안군 수신면 지서장을 거쳐 예산지서에서 6.25를 만났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홍수처럼 밀려올 때 일시 후퇴했다가 조기 복귀하여 후퇴하던 인민군 패잔병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전선의 혼란으로 선친의 시신마저 수습할 길이 없어 지금 동작동 국립현충원 지하에 위패로만 모셔져 있다고 박 회장은 울먹인다.
선친이 전사할 때 장남은 중3, 차남은 초등 5년, 박 회장은 초등 4년이었으니 가장을 잃은 집안의 생계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모친은 광주리 장사에 나서고 아들 3형제는 5촌 당숙집 신세를 져야만 했다. 당숙은 선친의 도움으로 경찰관이 되어 지서장을 맡고 있었지만 양가의 어린 자녀들을 한꺼번에 돌보기가 벅찬 형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와 하왕십리에 셋방을 얻어 독립하기로 했다. 위로 두 형제는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나가 벌이하고 막내는 나무 줍고 빨래하고 여동생 돌보는 가사업무를 맡았다. 같은 또래 친구들이 고교 2학년일 때 겨우 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으니 꼭 3년이나 뒤처졌다. 용두동 벌판에 자리 잡은 고흥중학에 입학하여 ‘월반’제도를 이용하여 단국대 계열인 백남공고 전기과를 졸업했으니 고졸학력을 겨우 채웠다.
대학진학을 열망했지만 학비가 문제이고 전쟁통에 정상수업을 제대로 못했으니 실력도 문제였다. 이 무렵 새문안 교회 황광은 부목사께서 교회에 나오라고 했지만 친구들 보기 민망하고 창피감도 느껴져 집안에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황 목사가 “취직시켜 주마”라고 약속하여 새문안 교회를 찾아가니 실제로 취직을 시켜줬다. 한국 보이스카웃 연맹의 일자리였다.

자갈치시장 일당 노무하다 파독광부 지원

난생 첫 일자리란 연맹에서 연간 2회 발행하는 회보형식의 잡지 편집부 소속으로 단 두 명이 원고청탁 등 잡무를 맡는 한직이었다. 월급이 제대로 나올 형편도 아니었지만 2년쯤 근무할 때 소집영장이 나와 그나마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신병으로 3군단 직할 원통에 있는 박격포부대에서 3년간 복무 후 병장으로 제대했다. 경찰관 유자녀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했으니 마음은 홀가분했지만 제대 후 취직이 걱정이었다.
군 복무시절 부하 전우녀석이 부산 감천화력의 관리부장이 매형이라고 자랑하여 무턱대고 찾아가 취직을 부탁하니 5~6개월 가량 기다려 보라고 했다. 하루가 급한 마음에 자갈치 시장으로 나가 수소문하니 생선운반 하는 일당 노무직이 남아 있었다. 일당이라야 여인숙의 방값과 세끼 밥값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여인숙 방에는 이와 빈대 및 벼룩이 우글거렸다. 신문지 벽에는 빈대 자국으로 얼룩지고 고달픈 잠결에도 몇 번이나 깨어나 벼룩과 살육전을 벌여야만 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이발관을 찾아갔다가 서독광부 모집 공고문을 읽으니 ‘바로 저거다’라고 느껴졌다. 급히 상경하여 보니 응모 마감일이 가까운데 2년간 근무경력서를 확보할 길이 막연했다.
큰형님이 어디서 광업소 근무경력서를 구해주셨지만 접수처 창구에서 가짜로 들통이 나고 말았다. 당시 남영동 노동사무소 인근에는 대서사(代書士) 사무실이 많아 경력증명서 청탁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원서 접수창구를 찾아 갔더니 문 닫을 시각이니 다음에 오라며 손을 내저었다.
급한 마음에 아리랑담배 한 보루를 사서 뒷길로 들어가 간곡하게 호소하자 못 이긴 척 접수해 주니 파독광부로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첫 관문이 열린 셈이다.

‘돈 많이 벌어 집장만’… 처가 설득 출국

파독광부 시험이란 신체검사가 제일 중요했다. 군대 가서 전방에서 3년 복무한 건강으로 신체검사는 당당 합격이었다. 장성광업소 도계 탄광에서의 40일간 채탄실습은 고전이었지만 파독의 꿈으로 거뜬히 이겨냈다.
출국날짜를 손꼽고 있을 때 서독정부의 에너지정책이 석탄에서 가스로 전환되어 출국이 정지된다는 소문이 나오니 눈앞이 캄캄했다. 성난 광부후보들이 미도파 건너편에 자리 잡은 노동청으로 몰려가 데모를 했지만 방도가 없노라고 했다.
절망 속에 인척의 소개로 영등포 구로동에 있는 판본방직(뒤에 방림방직)에 취업했다. 판본방직은 오사카 교포 서갑호(徐甲虎) 회장의 모국투자 사업으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이었다. 이곳에서 겨우 자리를 잡을까 싶을 때 노동청으로부터 다시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가 왔으니 파독광부의 꿈이 되살아났다.
박 회장은 이 무렵 집안의 성화로 중매를 통해 평택처녀와 결혼한 가장의 몸이었다. 신방을 꾸밀 처지가 안 돼 주말이면 빨랫감을 들고 평택 처가를 다녀오던 신세였다. 출국날짜는 가까이 오고 있는데 장인 장모가 사위를 먼 타국으로 보낼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했다. 이에 “돈 많이 벌어와 집을 장만 하겠다”는 말로 설득하여 1966년 7월 30일,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할 수 있었으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꿈만 같은 여정이었다.
처음 타보는 보잉 707기는 훌륭하다고 느꼈지만 항속거리가 짧아 중간 급유차 여러 곳에 기착했다. 홍콩, 방콕, 카라치, 베이루트 등을 거쳐 독일 뒤셀돌프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25시간이 소요됐다. 온통 낯설고 두렵고 불안한 순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4년 서독을 방문할 때 전세기를 구할 수 없어 동경에 기착한 루프트한자기를 김포로 끌어들여 겨우 좌석을 확보했던 시절이었다. 박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함께 함보른 탄광에서 광부와 간호사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다가 목이 메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귀로에 아우토반 고속도로에서 뤼브케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며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위로한 그때 그 시절이었다.

▲ 2015년 2월 24일 파독 연합회 비상대책 위원회. (사진=박광근 회장)

광부생활 중 이발부업, 관광체험

파독광부 제7진이 루르지방의 티센 광업소에 도착하자 깨끗한 기숙사를 배정하여 2인 1실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고국의 향수를 달래며 설레는 광부생활을 시작했다. 작업배치가 시작된다기에 알아보니 막장의 채탄부(採炭夫) 월급이 가장 높다고 해서 희망했지만 창고직으로 배치됐다.
창고직은 채탄 관련 물자와 소모품 등을 보관 관리하는 업무로 편하기는 했지만 급료가 600마르크로 채탄부의 60% 수준이라 섭섭했다. 그나마 국내 임금 수준과 비교하면 몇 배나 많은 고임금이었다. 계약기간 3년간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알뜰히 모아 신방도 꾸미지 못한 신혼초의 아내에게 빨리 집을 사주고 싶었다. 당시 100만 원이면 서울 변두리의 집 한 채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축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어려운 집안을 돕고 남동생과 여동생 학비도 지원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절약을 위해 이발도 동료끼리 가위로 깎아 주는 생활이었다. 어느 날부터 “박광근의 이발 솜씨가 제일 좋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서울서 이발기구를 미리 준비해온 어느 동료가 아예 이발기구 등을 인수하라고 요청하여 이발이 부업이 되었다. 주말과 휴일에는 손님이 밀려 이발관에서 5마르크 받는 요금을 2마르크로 할인해도 광부월급에 비등할 만큼 수입이 늘어났다.
타향살이에는 늘 외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를 달래고자 교회활동에 열심히 참가하여 친교도 넓히고 단체관광으로 안목도 쌓았다. 파리여행도 6차례나 경험하여 프랑스 문물에도 익숙해졌다. 교회활동에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한 이연빈 목사가 지도를 맡았고 파리여행에는 서울문리대 출신의 이유진 박사가 친절하게 안내했다.

▲ 박광근 회장 가족분들 기념촬영. (사진=박광근 회장)

친교가 쌓인 이 박사가 파독광부 계약기간이 끝나면 대학진학의 길을 찾아줄 테니 파리로 오라고 종용했다. 박 회장의 파리정착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어 파독광부로서의 제2의 인생이 전개될 수 있었다.

파리 정착후 가족초청, 첫딸 얼굴 처음 봐

당시 공관에서는 여권기간 만료를 이유로 귀국을 종용했지만 1969년 파리대학 철학과 입학허가서를 근거로 체류기간 연장이 가능했다. 비록 대학에 등록했지만 불어 학습이 모자라 학원에서 2년간이나 공부했다. 그런데도 불어강의가 귀에 들리지 않아 대학과정은 대충대충 넘겨야만 했다. 나중에는 불어에 능통하여 소르본대 대학원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파리생활 정착을 위해 중국계의 숙주나물 공장에 아르바이트 생으로 취업했다. 기숙사 생활하면서 열심히 일하니 생산성이 10배나 올라가는 공장혁신이 일어났다. 군복무와 광부생활에서 익힌 근면 성실에다 책임감이 겹쳐 나온 성과를 보고 사장이 공장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이때쯤 되어 가족을 초청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임신 2개월의 신부를 남겨두고 출국했던 처지에 아내가 사진으로만 본 딸을 데리고 파리로 왔다. 그 딸이 유치원부터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변호사 자격도 취득하여 대원외고에서 불어교사로 15년이나 근속했다. 사위는 서강대를 나와 증권사에 근무하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에 유학했다. 외손녀 셋은 미국에서 공부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또 파리에서 출생한 두 아들도 프랑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여 자립했다. 위로 3형제와 여동생도 모두 안정된 가정을 이룩했다. 그러니까 박 회장이 파독광부로 출국한 이후 지난 50년간 가문을 살려 일으키고 자신의 입지를 크게 넓혀 한국과 프랑스 간 경제협력과 우호증진에까지 이르렀으니 자랑스런 한국인의 표상이 아닌가.
박 회장은 지난 2012년 12월, 우리것보존범민족문화진흥협회 제정, 제15회 세종문화상 명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파독근로자연합회 정상화 위해 헌신

▲ 소르본대 대학원 학생증. (사진=박광근 회장)

박 회장의 성공 스토리 바탕에는 이국생활의 시름을 달래기 위한 신앙에다 교회활동을 통한 친교의 인맥이 기반이었다. 1972년 파리연합교회를 설립한 것이 한국인교회의 시초였다. 이듬해 1973년에는 한국 대사관 부근에 한인식당 ‘오아시스’를 개업하니 이 또한 유럽 최초의 한국인 식당이었다.
그 뒤 여행사와 무역업 등의 성공도 근면과 신용에다 다양한 인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비즈니스를 통해 한국공관, 무역기관, 여행객들과 친숙해 지고 한국 특파원들을 통해 고국소식을 듣고 프랑스와 EU 경제권과 협력사업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 회장은 최근까지 이건개 검사가 대표하는 법무법인 주원의 고문을 맡고 있지만 당면한 최고 관심사항은 파독근로자연합회의 재건이다. 연합회는 전임 회장의 불법선거 관련 고소 고발전으로 내분이 표출되어 박 회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수습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임 회장 선거까지 원만하게 추진하여 국내로 정착한 파독광부들의 중심단체로서 제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 소망이다.
파독근로자협회는 고 김태우 회장이 파독광부들의 모임으로 창립한 후 정부지원으로 파독간호사들과 합쳐 파독근로자협회로 확대됐지만 회장단의 유고사태로 중요한 목적사업이 중단된 상태이다. 박 회장은 2월중 새회장단이 구성되면 정부가 추진하는 DMZ 평화공원 내에 파독근로자 추모공원을 설립하고 국가유공자 관련법 제정, 국민주택 우선 배정권 등 회원 권익향상 사업을 적극 추진할 것으로 기대한다.
박 회장이 자문역할을 맡고 있는 비즈니스는 8천억 원의 장학기금을 출연한 이종환 회장의 중국 대련 삼영화학 공장의 매각 알선을 위해 중국을 자주 방문한다. 또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아직도 미혼인 두 아들을 결혼시켜 며느리를 맞는 경사를 앞두고 있다. 부인이 꼭 한국여성 며느리를 보고 싶다고 주장하여 아직 결혼이 성사되지 못했지만 곧 며느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귀띔한다.

<박광근 회장의 주요 활동기록>


1972년 : 파리연합교회 창립
1973~2002 : 유럽 최초 한국식당 오아시스 개업 30년 운영
1978 : 제1회 세계 피겨스케이팅 주니어 선수권 대회(Megeve) 한국선수단 단장
1979 : 프랑스 6.25 참전용사협회 명예회원, 은장 국가공로 훈장 수훈
1982~1983 : 프랑스 한인회 회장, 파리 구주한인체육대회장 겸 운영위원장
1982~1991 : 해외평화통일 정책 자문위원
1983 : 세계기사도 협회 기사(Chevalier)작위
1983~1988 : 서울올림픽 프랑스 후원회장
1984~1993 : Marne La Vallee 신도시 한국기업 투자유치 담당
1987 : 세계 한민족 대표자회의 프랑스 대표 및 운영위원
1989~1993 : 파리 라 데팡스 신도시 한국기업 투자유치담당, 신도시 투자유치 신라호텔 설명회
1990 : 세계한민족 대표자회의 파리 이사회 대회장
1992 : 파리연합교회 장로 장립
1993 :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운영위원·부회장
1999 : 충남도 명예 국제협력위원(심대평 지사)
1999~2001 : 프랑스 VIVENDI그룹 한국지사 고문
2002~2013 : 프랑스 SUEZ그룹 DEGREMONT사 한국지사 사업고문
2008 : 백제문화제 해외홍보대사(집행위원장 최석원), 제2회 재불 한인회장상 ‘자랑스러운 한인상’ 수상
2010 : 아리랑환경유통(주) 대표이사
2013 : 파독근로자협회 고문
2015 : 파독근로자협회 비상대책위원장, 법무법인(유한) 주원 고문위촉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9호 (2016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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