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월호]

[구월산 유격대의 신화]

안악출신의 반공일생

李敬南(이경남) 회장. 6· 25 ‘ 동키부대격전회고

전역후 출판, 논객으로 평생 현역 반공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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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산 유격대의 활약을 회상하는 이경남(李敬南) 회장>

황해도 안악인(安岳人) 출신 이경남(李敬南) 회장의 일생은 반공이다. 올해 여든 둘, 이회장의 6·25 유격활동은 반공역사의 신화와도 같은 드라마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인민군 장교에서 귀순하여 국군장교로 전역한 이회장은 현대문학 추천 시인으로 등단하여 작가와 언론인으로 50년 넘게 활약하는 필생의 반공작가이기도 하다.

신천, 제령, 안악 반공벨트의 피

이회장의 반공인생에는 생태적 반골기질의 안악인 피가 흐른다. 이회장은 지금도 안악 동향 출신의 안무혁(安武赫)씨가 운영하는 한국발전연구원 고문으로 월간 리뷰(Review)지 편집인을 맡아 반공전선의 현역 필객으로 활동한다.

이회장의 평생 반공투쟁은 김일성 치하에서 반공학생운동으로 부터 시작되어 6·25 직후의 당나귀 부대로 불린 동키(donkey) 구월산 유격대로 절정을 이룬다.

당시 스물셋의 유격대 참모장으로 신출귀몰한 작전을 통해 서해안 연안 일대 인민군과 중공군의 발목을 묶어둔 전공은 동키부대 전사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월간 신동아 등 잡지와 신문에도 단편적으로 보도되어 참전세대에게는 익숙한 반공투사로 각인되어 있다.

이회장의 유격활동은 신천, 제령, 안악 등 황해 서북 3각지대 반공 벨트로부터 나왔다. 제령 평야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안악 일원은 일제하에서 부터 북녁땅 기독교의 본산이자 민족운동의 중심기지였다.

신천은 안중근 의사의 생가가 있고 안악은 백범 김구선생의 활동 근거지이며 제령은 나석주 의사와 장덕수 선생의 고향이다. 그리고 단군설화가 깃든 구월산(九月山)이 안악, 신천과 인접해 있다. 김일성의 독재정권이 이곳 3각지대 반공벨트의 토지를 몰수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자 반공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경남도 안악고 4학년때 반공·반탁 운동으로 체포되어 해주와 평양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뤘다. 이때부터 안악인의 반골기질이 평생 반공인생으로 이끌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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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에서 맹활약한 유격대 모습. 사진은 1951년 2월께 동키 11부대 대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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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때 유격부대의 군가 악보.>

소대원 42명 대동 국군에 귀순

이경남은 평양사범 조선어과 3학년때 6·25를 만났다. 대학당국에서 인민군 입대지원 궐기대회를 열어 독촉하는 분위기에 놀라 평양을 떠나 구월산 기슭의 고향마을로 은신했지만 곧 입대기피자 명단에 올랐다.

하는 수 없어 인민군 제2군관 학교에 입교하여 1개월 속성반 과정을 거쳐 인민군 소위로 임관됐다. 초기에는 황해 평산군에 위치한 인민군 26여단 소대장으로 방어전투 훈련을 받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 성공 이후 전세가 불리해 지자 전선으로 내몰았다.

이경남 소대장은 38선 경계구역인 북한강 모진교 일대의 사수명령을 받고 국군에 귀순할 기회를 얻었다. 비록 인민군 장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평소 서북청년단과 연계공작으로 국군과는 정신적으로 내통하고 있었다.

1950102일 밤, 노동당원인 부소대장과 분대장 등 6명에게 대대본부 당원 세포회의 참석통보가 있었다고 거짓지시하고 비당원 분대장 등을 소집하여 전쟁상황을 설명한 후 귀순의사를 밝혔다. 놀랍게도 소대원 42명이 전원 동참하겠다고 약속했다.

즉각 국군이 내려다 보이는 고지에 이승만 대통령 만세’, ‘국방군 북진 환영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자 국군 6사단 7연대 수색중대 보트가 건너와 귀순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소대원 42명과 함께 연대장 임부택(林富澤) 대령, 사단장 김종오(金鐘五) 준장의 격려를 받고 귀순 기념촬영을 했으니 곧장 국군에 편입되어 북진전투에 참가할 줄 믿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미 고문관이 제네바 협정을 이유로 포로수용소로 후송되어 포로 심문을 받아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죽음을 각오하고 김일성을 때려 잡기위해 귀순했는데 포로로 취급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끝내 소대원 42명 전원이 포로수용소로 후송되고 이경남 소위만은 연대 정보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남을 수 있었다.

향토재건하다 구월산 유격대

이무렵 패색이 짙은 인민군들은 전의를 잃고 도주하여 북진하던 국군이 평남 일대를 점령하자 곧 통일이 올 것 같았다. 이경남 고문은 연대장과 사단장에게 고향 안악으로 보내달라고 졸라 댔다.

이 결과 사단에서 발급해 준 귀향증을 들고 안악 고향을 찾으니 마치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다름없었다.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이라 인민군은 도주하고 없었지만 국군이나 유엔군도 진주하지 않아 행정공백에다 치안질서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경남은 향토재건을 위해 반공청년들을 모아 호국청년단 안악단장을 맡아 잠복해 있는 공산당을 색출하고 우익인사들을 보호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후퇴설이 전해 왔다. 반공 청년단은 안악지구 방위사령부를 결성, 이경남이 정보처장을 맡아 결사항전과 향토사수를 결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후퇴과정에서 경찰, 청년대, 학도대 등 300여명을 끌어모아 안악무장 치안대를 결성, 해주, 신천을 거쳐 옹진반도 연안 도서지역으로 탈출했다.

당시 백령도에는 미 8군 정보처 산하 전방 활동기지가 구축되어 북한출신의 반공무장대 요원들을 모으고 있었다. 이경남의 안악무장대가 동키부대 D-10으로 편성되어 적진을 들락거린 유격활동이 이때부터 본격화 되었다.

D-10 구월산 유격대는 부대장 김유성, 참모장 원용서, 작전참모 이경남으로 지휘계승을 구성, 구월산 일대를 작전구역으로 배정 받았다. 구월산 오봉에 유격대 본부를 설치하고 신천, 제령, 봉산, 사리원 등 내륙을 기습, 폭파하며 적진을 유린하는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또한 초도, 상취라도, 피도 등에는 후방기지를 구축하고 청천강 하구와 남포항을 봉쇄할 만큼 위세를 떨쳤다. 당시 구월산 꼭대기에는 고성능 무전기를 설치하고 인민군 중대본부와 인민위원회 등을 습격할 뿐만아니라 유엔군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유도하며 서해안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 회장은 당시 서해안 연안 일대의 동키부대 맹활약이 남로당과 인민군들의 지리산 빨치산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은 용맹 과감한 적진침투와 파괴 및 혁혁한 전공은 6·25 전사에 가장 빛나는 대목이라고 자랑한다. 실제 전사에 나오는 활동상을 읽어보면 이회장의 말이 자화자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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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도서 및 연안 완전장악

이회장은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수석부회장으로 6·25 유격작전의 살아있는 전사에 속한다. 전사에 따르면 전쟁 기간중인 195012월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1953727일까지 동서해안을 장악한 유격부대는 동키부대 등 30여개, 유격전사 32,200여명, 유격작전 4,445회로 집계되어 있다.

이들 유격대가 특공, 기습, 파괴작전 및 비공개 특수작전으로 이룩한 전과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공식통계로는 휴전선 이북 북방도서 30여개를 장악하여 인민군과 중공군 몇 개 사단을 묶어두고 30여만명의 우익동포들의 탈출을 안내했다.

한국유격군 전사에 기록된 자생유격대 지도에 따르면 서해 북방 도서와 연안 일대는 평북 해안의 대화도, 신미도에서부터 황해 연안 초도, 백령도, 연평도 까지 동키부대들이 총총히 장악하고 있었다. 동해안의 경우 주문진 커크랜드 기지를 후방기지로 삼고 강원도 연안 솔섬, 남도를 전방기지로 활용하여 흥남, 원산 일대를 공략하며 지배했다.

이회장이 직접 참여한 서해안의 구월산 유격대는 불타산, 멸악산 등을 무대로 내륙지 적진을 유린하고 20여개 도서들을 완전 장악했었다. 이 때문에 인민군과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을 유격대 소탕전에 투입해야만 했으니 국군과 유엔군과 대치하고 있던 전선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당시 평남북과 황해 연안에 배치된 적부대는 평북 연안 중공군 50, 평남 연안 중공군 38, 인민군 4군단 및 26여단, 황해연안 중공군 63·64, 인민군 21여단 및 혼성여단 등 엄청난 규모였다. 또한 동해안에도 함경남북도 연안 인민군 5군단, 원산 연안 2군단, 강원도 연안 7군단 등이 유격대 활동에 붙잡혀 있었다.

이같은 유격대의 맹활약으로 인민군과 중공군의 전력이 큰 타격을 입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휴전이후에도 서해 5도를 확보하여 북방한계선(NLL)을 끌어올린 성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유격 반공전사들 명예도 잊혀져

구월산 유격활동에 신명을 바친 반공용사들은 휴전협정으로 철수명령을 받고 낙심천만하여 철수해야만 했다. 이회장 개인으로는 당시 신태영 국방부 장관으로 부터 금성충무 무공훈장을 받아 명예를 얻었지만 수많은 전사자들과 참전용사들의 전공과 명예가 지금은 거의 잊혀지고 빛 바래지지 않았느냐고 한탄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는 한국 유격전 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곳곳 격전지에도 전적비가 남아 있지만 전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마저 유격전 연구에 소홀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이회장은 유격부대의 특수상황 때문에 비공식 특수임무를 많이 수행했기에 전사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대목이 있다고 양해한다. 그렇지만 공식으로 집계되고 서술된 찬란한 전적만도 정부와 국민들이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참전용사들에 대한 정부의 보훈방침 마저 너무나 소홀하다고 지적된다. 생계가 막연한 참전용사의 노후가 월 9만원의 예우에 의존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뜻이다.

이회장 개인으로는 국군에 귀순했던 소대원 42명의 안부가 안타깝다. 최근까지도 3~4명은 연락 됐지만 그나마 지금은 소식이 두절되고 말았다. 또한 구월산에 침투시켰던 6인 특공대 가운데 2명의 전우가 인천과 양평에 생존해 있지만 자주 만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

이회장은 새파란 20대 청춘을 반공과 구국으로 보낸 잊을 수 없는 유격전우들과 남아있는 생애를 함께 나누기를 소원한다는 심정이다.

출판, 언론인 거쳐 다시 안악인으로

반공청년학생으로 부터 구월산 유격대로 청춘을 불태운 이회장의 반공은 끈질기고 처절한 반면 육군장교 신분으로 현대문학 시인으로 등단한 후 문학과 언론인생은 화려하면서도 집념의 외골이었다.

휴전후 군복을 벗고 찾아나선 필생의 전업분야가 월간 신태양으로 8년간 편집장을 맡았으며 그뒤 현대경제일보(한국경제 전신) 문화부장으로부터 편집국장, 전무 등 10년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또한 출판사 예문관에서 11년간 근속하고 부사장으로 퇴임했으니 논객과 집필인으로 후회 없을만큼 글쓰고 평론도 했다.

80년대 이후에는 다시 고향 안악인으로 돌아가 실향민들의 울적한 심정을 대변하는 황해민보 주필, 현대공론과 월간 동화 발행인, 이북 5도민보 발행인 등 굳센 반공필봉으로 일관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지금도 동향의 안무혁씨가 발행하는 황해민보에는 이회장의 반공칼럼과 현대사 인물 연재물이 실리고 있고 한국발전연구원 기관지에도 구월산 유격전 회고담이 나온다.

여든 둘의 나이에도 집필 의욕이 여전하니 왕성한 안악인의 반골기질에서 나오는 필력이라 믿어진다. 그동안 단행본과 전집류 출판물이 수십권에 이른다. ‘역사의 순간들’, ‘선구자에서 부터 북한 7,300’, ‘조용한 혁명’, ‘한국 기업가 전집’, ‘현대사 인물 발굴등이 집념의 반공인생 기록물이다.

지난 730, 지하철 2호선 건국대 입구 5번 출구 입구에서 만나 다방에서 대담한 이회장은 평생 통일을 염원하며 김일성, 김정일과 투쟁했는데 생전에 통일을 못보고 죽을 것 같아 분통스럽다는 심정을 말했다. 이회장은 김정일이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죽어도 쉽게 통일될 것 같지 않으니 구월산 유격대원들의 분통을 말해 뭣하겠느냐고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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