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씨 조모 훈육, 덕행 현달격

▲ 20世 贈정경부인 양천허씨의 유허비.

[이코노미톡뉴스=최종인 논객(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흔히 충청도 사람들을 양반이라고 일컫는다. 이 덕담(德談)의 의미는 무엇일까? 충청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과문의 탓인지 그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경우를 못 봤다. 왜 굳이 충청도 사람들에게만 의례적으로 양반이란 하나의 특별한(?) 품격을 인정하는지 궁금하다.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인 문·무반을 아울러 부르던 신분차별의 계급적 용어가 어째서 21세기 지금 이 시대에도 늘 사용하는 범상한 말이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이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들의 기질과 차별되는 특성을 말하다 보니 양반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상대적으로 느린 말투와 자기표현에 적극적이지 않은 은근한 태도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만 가지고 왜? 양반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밝혀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그래서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우선, 논산지역의 광산김씨(光山金氏) 가문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바로 예학(禮學)의 대가를 이룬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 김집(金集)의 행의(行誼)가 번져 충청도 사람의 특성을 규정짓는 표현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김장생의 선대, 곧 조선 초 입향조(入鄕祖) 시절에 열부(烈婦)의 표상으로 알려진 허씨 할머니 이야기에서부터 단초를 풀어가 본다.

▲ 贈정경부인 양천허씨의 정려.

광산김씨와 허씨 할머니

허씨(許氏) 할머니의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시댁은 광산김씨. 시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김약채이고 친정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허응이다. 두 집안 모두 명문으로서 김약채의 큰아들 김문(金問)과 허응의 딸이 혼인을 하였다. 김문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라는 직책으로 사초를 기록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황희와 더불어 조정의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스물한 살에 병으로 요절하고 만다. 열일곱에 과부의 운명을 맞이한 양천허씨는 당시의 풍습으로 재가를 가는 것이 큰 흉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친정에서도 청상과부가 된 딸에게 권유를 하였다. 그러나 양천허씨는 갓난 아들을 업고 야밤에 한양을 떠나 시댁이 있는 충청도 연산으로 달려갔다. 여기에 양천허씨와 사정이 비슷해 동행한 문화유씨를 호랑이가 함께 호위했다는 전설이 덧붙여지고, 시댁에 당도하자 친정과 마찬가지로 유가(儒家)의 체통보다도 나이어린 며느리의 앞날을 걱정하여 집에 들이기를 거절하여 가슴을 절이게 한다. 허씨는 초막을 치고 절개를 지키고자 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데, 이때부터 허씨의 절행(節行)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양에서 업고 온 아들 김철산(金鐵山)을 훈육하여 과거에 급제시켜 사헌부 감찰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운명은 또 한 번 모친을 앞서 아들 철산을 일찍이 앗아가고 만다. 철산은 성천대도호부사 김명리의 딸과 혼인하여 4남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국광(國光)이 좌의정에 광산부원군에 이르고, 둘째아들 겸광(謙光)이 좌참찬에 광성군이며, 셋째아들 정광(廷光)은 제용감정이오, 넷째아들 경광(景光)은 승문원판교이며, 딸은 재정부정 이효온과 생원 권술에게 시집갔다.

쓰러진 나무에 새 움이 돋듯, 허씨 할머니의 훈육과 덕행으로 자손들이 존귀하고 현달하게 되어 가문의 명망이 세상에 빛나고, 뒤이어 여러 대를 거치며 꾸준히 인물을 배출하던 광산김씨 연산문중은 조선 예학(禮學)의 대가(大家)인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이 등장하면서 양반문화의 정점을 이룬다.
삼강(三綱)을 근본으로 하는 유교사회에서 허씨 할머니의 행실은 백성을 교화하는 표상이 되었으며 가문의 자랑을 넘어 나라에서 정표(旌表)를 세워 기리고 있다. 예절에 관한 의식이 백성들의 내면에 스며들고, 연산지역에서 일어난 이러한 기풍이 오랜 세월동안 번져서 충청도 양반론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 ▲22世 공안공 諱 겸광 정경부인 진주유씨, 정경부인 삼척진씨의 묘.

청백리 김겸광

허씨 할머니의 둘째손자인 김겸광은 맏형 김국광과 함께 거의 동시대에 조정에서 핵심 관료로 활약한다. 단종1년(1453)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고, 그 뒤 감찰·정언·병조좌랑·정랑을 거쳐 세조6년(1460)에 장령에 승진되었다. 같은 해 신숙주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의 야인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우고 군기시정에 올랐으며, 이듬해 지병조사에 이어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평안도관찰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세조11년(1465)에 호조참판을 거쳐 다음 해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결원이 된 평안도절도사의 적임자로 천거를 받아 승진, 임명되었다. 세조13년(1467)에 예조판서에 승직되었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예종1년(1469)에 예조판서에 재임되었다. 성종2년(1471)에 좌리공신 3등으로 광성군에 봉해지고 한성판윤이 되었으며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성종13년(1482)에는 황해도 지방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황해도 진휼사로 나갔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상례를 주관했으며, 창경궁과 세자궁의 중수를 책임 맡아 처리하였다. 성종16년에 좌참찬을 거쳐 세자좌빈객이 되었고, 건주위의 야인의 토벌을 비롯하여 세조의 국방정책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러한 평생의 경력과 공로로 김겸광은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은전을 받았다.

김겸광의 자는 위경(卿), 호는 서정(西亭), 시호는 공안(恭安)이며, 배위는 참판 유양식의 딸과 사직 진계손의 딸이다. 아들은 극회(克恢)·극치(克恥)·극픽(克픽)·극개(克愷)·극제(克悌)·극신(克)·극심(克心)을 두었으며, 김장생과 김집은 그의 방손(傍孫)이다.
김겸광의 인간적인 품성은 하세하였을 때 기록된 졸기(卒記)에 이렇게 되어 있다. ‘본래 천성이 순후하고 일을 처리함이 주밀하였다. 그의 시호(諡號)는 공안인데, 일을 공경히 하고 위를 받드는 것이 공(恭)이고, 좋아하고 화친하여 다투지 아니하는 것이 안(安)이다’
자료협조 : 공안공 15대손 김광수(서울문화사학회장), 광산김씨공안공파종회 김갑수(회장 :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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