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식 박사, 문화대국으로 가는 길
문화영토시대 인류 구원의 孝철학.

▲ '문화대국으로 가는 길'을 출간한 홍일식 박사.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우리의 전통 효(孝)사상을 대한민국 주력 문화상품이라고 강조해온 홍일식(洪一植) 박사가 다시 ‘문화대국으로 가는 길’을 출간했다. (2017.6, 범우사) 홍 박사는 지난 2014년 11월에는 ‘도의, 문화대국 건설의 길’을 제시한 ‘나의 조국 대한민국’(동서문화사)을 발간했기에 속편의 성격이 아닐까 싶다.

인성함양과 도덕성 회복시기

홍일식 박사는 고대 총장을 끝으로 대학을 떠난 후에도 공동체의식개혁 국민운동협의회 회장,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의장, (사)세계효문화본부 총재, 한국인문사회연구원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특강과 집필도 계속하고 있다.
홍 박사는 ‘문화대국으로 가는 길’의 머리글을 통해 ‘인성 함양과 도덕성 회복’을 강조하면서 “국가지도자의 정신적 쇠퇴, 도덕적 타락 속에 국가와 민족이 융성하는 법이 없다”고 지적, 결국 인성 함양과 도덕성 회복 외에 대안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홍 박사는 역대 대통령들의 위법․불법사례 및 인사청문회에 나타난 고위직의 도덕 불감증을 지적하며 문명국가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로 “우리의 전통문화자산인 효사상과 효문화의 부활이 매우 시급하다”고 촉구한 것이다.
홍 박사는 미래를 향한 우리의 문화역량을 측정할 때 분단극복과 통일문화 확립이 중요하므로 지금 도래하고 있는 ‘문화영토시대’에 우리민족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문화영토시대… 영토개념의 시장화

세계사의 영토개념이 변하고 있다. 과거 서구 열강이 영토 확장을 위해 침략을 일삼았지만 지금은 교통 통신 발달이 거의 하나의 세계체제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니 종래의 배타적, 폐쇄적 영토개념이 희미해진다. 영토 기준이 개방적 경쟁적 시장개념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문화영토론이 나오게 된다. 각국마다 다양한 문화를 자랑할 수 있지만 문화영토 측면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상호교류를 통해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인류문화로 통일, 승화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그 추진력에 대해서는 문화 고유의 운동법칙에 맡겨 둬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듯 “문화도 고저 따라 흘러 교류되어 동화하거나 변혁 발전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저자는 하나의 인류문화로 통일 승화될 경우 인류의 공동파멸을 막고 인간성 상실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새 정신문화를 확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홍 박사는 문화영토시대 한국의 주력 대표 문화상품으로 효사상, 효문화를 제시한다. 효사상은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과도 직결되는 정신으로 ①인본주의(人本主義) ②이타주의(利他主義) ③인내주의 ④평화공존주의 등을 내포하여 인류문명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게 뒷받침할 것으로 예측한다.
홍 박사는 우리의 경제국력이 세계 10위권에 이른 것은 우리 민족 저력의 상징이라고 평가하면서 앞으로 글로벌 문화영토 시대에는 우리의 전통 민족문화를 올바르게 계승한 바탕 위에 세계 각국으로 진출한 해외동포와 함께 경제적, 문화적 영토를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나의 조국의 선구자들 ‘영예와 비애’

홍 박사는 2014년 11월에 발간한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우리민족의 뿌리조성을 자세히 설명하고 독립투쟁 사연들 속에 자랑스러운 저항의 발자취가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살아 있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성자(聖者) 안중근 의사, 도덕성 도산 안창호를 예시했다.
또한 저자는 우리민족이 망국과 해방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선구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영예와 비애를 함께 느낀다면서 ①이회영(李會榮) ②최남선(崔南善) ③인촌(金性洙)과 수당(金秊洙) ④일본군 중장 홍사익(洪思翊) 등 4명을 꼽았다.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은 6형제가 함께 망명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옥사했다. 6형제 가운데 다섯째가 이시영(李始榮)으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지만 나머지 5형제는 모두 해외서 별세했다. 이회영 가문은 노비들을 방면하고 전 가산을 정리한 40만원(현 화폐가치 600억원)을 바탕으로 서간도 땅으로 집단 망명, 항일투쟁의 본산이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10년간 3,500여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육당 최남선은 친일 논쟁의 중심인물이나 홍 박사는 그의 조선주의, 조선정신을 선구자의 영예와 비애로 올렸다. 육당이 설립한 ‘조선광문회’는 선각자들의 지적 네트워크, 학병을 권유한 것은 미래의 나라 건국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해석한다. 육당은 당시 학병 권유에 따른 시비와 논란을 인식하면서도 이왕이면 장교가 되어 일본의 군사기술과 지식을 습득하라고 당부했다.
육당이 1957년 10월 68세로 별세하자 사상계 장준하(張俊河) 발행인이 조문 특집과 함께 “고인의 지조에 관해 세간의 오해가 있었지만…”이라는 권두언을 싣기도 했다.
인촌과 수당의 선구적, 경세가적 애국사업은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인촌은 교육과 언론사업에 큰 족적을 남기고 부통령을 역임한바 있다. 수당은 인재양성과 과학입국의 큰 뜻을 펼쳐낸 애국 애족사업가로 기록된다. 수당이 경성방직을 경영할 때 광목의 상표가 ‘태극성’으로 ‘조선인은 조선인의 광목으로’라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당시 상표 속에 태극기를 도안한 것이 조선총독부가 심사했다면 결코 통과되지 못했을 것이지만 특허등록업무는 도쿄에서 담당하여 심사에 무사통과했던 것이다.
일본군 육군중장으로 종전 후 전범으로 교수형 된 홍사익을 선각자 반열로 올린 파격도 홍 박사의 지론이다. 홍 장군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와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에 유학 갔다가 망국 후에는 일반 유학생으로 졸업 일본군 장교로 임관됐다. 중위 시절에는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한 것이 조선인 최초의 기록이다. 그가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던 시기에 남방전선으로 발령 나자 매일신보 도쿄 특파원 김을한(金乙漢) 기자가 “조선인 유일의 장군으로 탈출할 때가 왔소. 중경(重慶)의 임시정부로 가서 광복군을 지휘하는 것이 좋지 않소”라고 물었다.
홍 장군은 이번 길이 ‘죽는 길’이라 해도 그냥 갈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조선인 수십만 명이 전쟁에 동원되어 있는데 조선인 최고 계급자가 탈출, 배신하면 병사들은 물론 징용 노무자들까지 보복당할 것이 뻔하다”면서 죽는 길을 선택했다는 증언이다. 홍 박사는 김을한 기자의 책 속에 ‘여기 참사람이 있다’고 적은 대목을 인용하여 그의 충절, 예의, 무용, 신의 등을 꼽았다. 홍 장군은 항일 독립투사나 그 가족들을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화대국은 적을 만들지 않는다

홍 박사는 ‘도의, 문화대국 건설의 길’을 통해 ‘문화대국은 적을 만들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문화영토 시대의 도래를 말하며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강조했다. 이 대목에서 세계로 뻗고 있는 K-POP 등 한류 열풍을 제시하고 새마을운동도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문화란 창조주체가 누구이든 평화로이, 자연스럽게 수수 가능한 점이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홍 박사의 문화대국의 길은 역시 인본주의, 이타주의 사상의 효문화 정립으로 통한다. 홍 박사는 효사상을 ‘인류 구원의 철학’이라고 주장하며 국민교육의 교본이자 세계화의 최대 주력상품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한 것이다. (주)범우사, 5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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