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조선완조 제15대 임금

▲ 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이코노미톡뉴스=황원갑 논객칼럼] 광해군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쫓겨난 조선왕조 15대 임금이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에 앞서서 6대 임금 단종과 10대 임금 연산군이 왕좌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문종에 이어 즉위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강원도 영월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단종은 숙종 때 복위가 되었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복권이 되지 않아 왕호에 ‘조(祖)’나 ‘종(宗)’이 붙지 못하고 ‘군(君)’으로 끝난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에 두 차례 있었던 ‘반정’이란 요즈음 말로 해서 ‘성공한 쿠데타’를 가리킨다. 반정은 ‘춘추(春秋)’에서 말한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政)’, 즉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구절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렇다면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이 참으로 못된 임금을 갈아 치우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더 나은 나라를 만들었을까. 방탕·포악했던 연산군이 쫓겨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인조반정이란 이름만 반정이지 실상은 서인(西人)들의 성공한 쿠데타에 불과했다. 광해군 대신 왕이 된 인조가 정치를 바로잡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들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은 결국 고질적 당쟁이 불러온 권력투쟁에 불과했고, 정권을 장악한 서인과 인조는 친명반청(親明反淸)이란 시대착오적 외교정책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온 끝에 마침내 씻을 수 없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권좌에서 밀려난 광해군이 폭군이요 패륜아로 매도당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시대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광해군이 자신의 왕권안보를 위해 형제들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외교적 능력은 아버지 선조나 왕조 말의 고종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는 정실 왕비 소생의 적자가 아니라 후궁이 낳은 서자인데다, 그것도 장남이 아닌 둘째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分朝)를 이끌게 하고, 자신은 의주로 피란을 갔다.

광해군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군사를 모아 왜군과 대항하는 등 국난극복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런데 왜란이 끝난 뒤에 선조가 새장가를 든 인목왕후가 적장자 영창대군을 낳자 조정은 광해군파와 영창대군파로 갈렸다. 하지만 광해군보다 9세 연하인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은 겨우 세 살,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은 이미 15년 전이었다. 광해군은 그렇게 우여곡절,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즉위한 광해군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무너져버린 국가기강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또한 당쟁의 폐해를 치유하고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여 내정의 안정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도 애썼다. 왜군의 재침을 막기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도 수립했다.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東醫寶鑑)’ 등 민생과 윤리도덕에 관한 책들을 찍어내고, 전란으로 불타버린 사서들을 중국에 가서 구해오게 하는 등 문화 사업에도 노력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광해군의 으뜸가는 치적은 명·청 교체기에 두 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 외교를 구사하는 한편, 국방력을 강화하여 나라가 또다시 전란에 휩쓸리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 쇠퇴해가는 명과 신흥 강자 후금(청)의 사정을 정확히 꿰뚫고 이에 적절히 대처한 외교의 귀재요 달인이었다. 명나라가 후금 공격을 위해 원병을 보내라고 강요하자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명을 주어 보내면서 형세를 보아 불리하면 후금에 항복하라는 밀지를 내려 결과적으로 더 많은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뒤 민생을 구제하고 국가기강을 바로잡으며 부국강병을 통해 국가안보와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려던 광해군은 재위 15년째 되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서인들이 그를 쫓아낸 이유는 대국(명)에 죄를 짓고, 형제를 죽이고, 경복궁과 창덕궁 재건으로 재정을 고갈시켰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시대착오적인 친명반청정책으로 병자호란을 자초, 숱한 백성을 참상으로 몰아넣었으니,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 어찌 허사에 불과하랴.
최근 북핵사태에서 비롯된 안보 위기에 더해 경제난까지 겹치고 덮치고 있다. 광해군이 비록 내치의 뒷받침이 없어 국리민복(國利民福)과 부국강병(富國强兵) 실현에는 실패했지만, 국제정세를 정확히 분석하고 적절히 대처했던 그의 탁월했던 외교적 치적은 재조명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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