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령추모 정신이 세계최강국 원동력

▲ <사진=Benh Lieu Song>

[이코노미톡뉴스=김무일 (前 한전KDN(주) 상임감사, 前 주 프랑스 국방무관] 세계적 유행의 본산지며 중심가인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나지막한 언덕위에 유명한 개선문이 우뚝 서 있다. 위대한 프랑스 제국 군대의 개선을 위해 건립하라는 나폴레옹 황제의 명령에 따라 건축가 샬그랭(Chalgrin)이 1806년 공사를 시작했는데 높이 50m, 폭 45m이며 1836년에 30년의 대역사가 완공됐다.

드골과 연합군의 파리해방 입성문

나폴레옹의 유해가 영국과의 7년간에 걸친 협상 끝에 사후 19년 만인 1840년 유배지 세인트헬레나(Sainte Helene)에서 파리로 옮겨질 때 개선문을 통과했다. 또 그때 장의(葬儀)행렬을 보러 나왔던 프랑스의 세계적인 문호 빅토르위고(Victor Hugo)가 1885년 사망했을 때도 그의 주검이 개선문을 지나갔으며,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승리의 행진과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프랑스의 드골장군을 선두로 연합군의 파리 해방입성 때도 개선문을 통과했다.
개선문 아래에는 1920년에 마련된 무명용사 묘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이래로 매일 오후 6시 30분이면 <추억의 불꽃>이라 불리는 도시가스에 의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추모의 불이 타오른다.
또 제1, 2차 세계대전의 전승 기념식과 각종 전투에 참가했던 참전용사회가 거의 매일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은 순국선열을 비롯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 호국정신을 기리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매년 제2차 세계대전 전승일 5월 8일과 제1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 11월 11일 오전 11시에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선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12개의 방사선 도로가 합쳐지는 이 역사적인 개선문의 에투알(etoile : 별) 광장에서 전면교통을 차단하고 각 군의 대표로 참석한 부대들이 도열하고 프랑스 주재 외국대사 및 무관들로 구성된 외교단과 정부고위층, 유공자,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식이 거행된다. 프랑스 대통령은 3/4톤 무개군용차량에 탑승하고 샹제리제 거리를 지나서 개선문 주위에 정렬한 부대들을 열병하고 무명용사 묘소에 도착하여 헌화를 하고 방명록에 서명을 한 후 유공자 유가족 및 생존자들에게 대통령이 마이크에 의한 직접육성으로 훈장내용을 낭독하면서 훈장을 수여하고 위로 및 격려의 포옹을 한다. 매년 주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 무관부의 6·25일 한국전쟁 기념식과 10월에 UN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참전협회의 행사가 두 번은 이곳에서 거행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애국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으며 감격적이다. 파리의 중심가에서 거행되는 이 행사를 파리시민은 물론이고 프랑스에 온 세계도처의 관광객들도 자연스럽게 관람할 수 있으며, 이 행사를 통해 유비무환, 위국헌신, 보훈문화의 정착 등으로 아우러진 상무정신을 바탕삼아 선진국으로 도약한 강대국 프랑스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루이 14세 건립 앵발리드(Invalides:국가보훈병원)

파리시내의 세느(seine)강 다리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알렉산드르 3세 다리 건너편으로 보이는 웅장한 돔형식의 건물인 앵발리드(Invalides : 국가보훈병원)는 프랑스 역사상 태양왕으로 부르는 절대군주인 루이 14세가 늙은 상이용사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건립하도록 결정하였고, 이거대한 건물은 4년 만에 완성이 될 정도로 신속하게 준공되었으며, 한때 가장 많이 수용된 상이용사숫자는 4,000여명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진적으로 그 수용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766년에 앵발리드는 수용이 포화상태가 되었고 상이용사들은 그들의 봉급으로 호텔외부에 숙박할 수 있게 되었다. 루이14세는 상이용사들에게 땅을 나누어주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 땅위에 그들의 집을 지을 수 있게 하였다. 앵발리드 내의 음식은 풍부하였고, 양호한 위생시설을 구비한 호화스러운 의무실이었다. 실제로 루이 14세 시대에 300여개의 병상을 구비한 것은 대단히 호화스러운 시설이었다.
그 뒤 젊은 나폴레옹장군은 1804년 7월 15일 앵발리드 성당에서 자신이 1802년에 제정한 레지옹도뇌르(Legion d’honneur : 프랑스 최고국가훈장) 훈장의 호화스러운 공식서훈식을 거행하였다. 맨 먼저 나폴레옹장군 자신이 자신의 레지옹도뇌르 최고훈장인 대 십자훈장을 스스로 자신의 목에 걸었으며, 이어서 서훈에 따른 차례대로 대상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 뒤 나폴레옹황제는 그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수시로 앵발리드를 방문하여 그의 옛 전우들을 보살피고, 불평불만을 청취하기도 하였으며, 1811년 5월 25일에는 앵발리드에 당시의 6백만 프랑의 예산을 승인하였다. 제1제국시대에 앵발리드는 진정한 황금시대를 누렸던 것이다.

나폴레옹1세 사후 7년뒤 부하들과 함께 안치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 1세가 그곳에서 죽은 지 19년이 되던 해인 1840년에 영국과 프랑스와의 7년간에 걸친 형상 끝에 파리로 그 유해를 운구해 와서 1861년 4월 12일 6겹의 관에 쌓인 유해를 마지막으로 붉은색 대리석 석관에 넣어서 107m 높이의 앵발리드 성당 돔 바로 아래 지하층에 천정이 개방된 상태의 나폴레옹1세 황제 석관을 안치하였다. 그의 관 주위로 함께 근무하였던 부하장군들과 참모들의 관도 안치하였으며, 1940년 12월 15일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를 점령하고 있었던 독일 히틀러의 명령으로 나폴레옹 1세의 아들(로마의 왕, 또는 독수리 새끼라고 명명되었음)의 유해도 원래 묻혀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옮겨와 그의 아버지 곁에 묻히게 되었다. 또한 나폴레옹 황제의 형제들인 죠셉, 제롬도 함께 그 주위에 묻혔다. 세계 제1차, 2차대전시의 여러 명의 프랑스군 총사령관들도 앵발리드에 묻히게 되었는데, 포쉬원수, 리오떼원수, 르끌레르원수, 쥬엥원수 등이다. 역대 이 앵발리드 사령관들의 유해도 성당 지하묘소에 안치되어있으며, 이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앵발리드를 떠날 수 없었다. 현재는 지하묘소의 공간부족으로 다른 곳을 선정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그래서 이곳을 군인들의 빵떼옹(Pantheon:위인들의 합사묘))이라고 부른다.
앵발리드 내 명예의 광장에는 1804년 7월 15일 나폴레옹황제 1세가 레지옹도뇌르 훈장수여식을 거행한 후 전통적으로 프랑스를 위하여 헌신한자들에 대한 산자와 죽은 자의 구별 없이 국가가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명예스럽고 영광스러운 행사를 계속적으로 거행해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프랑스를 위하여 해외작전에서 전사한자들의 유해를 이곳으로 운구하여 국가원수가 직접 참석하여 훈장추서와 함께 엄숙한 영결식을 거행하고 있다. 또한 국가를 위하여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국가원수가 직접 마이크로 훈장내용을 육성으로 말하고 훈장을 달아주고 위로와 격려의 포옹을 한다. 이러한 행사에는 관련된 유가족, 가족, 고위층, 친지들이 전부 참석하여 애도해주고, 축하해주며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한 번 추스르는 기회를 가지기도 하고, 국가가 위국헌신한 모범적인 전사자나 생존자에게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군사박물관 2층 벽면에는 전쟁에 관련된 추모 기념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의 추모 기념판에 연인원 3,421명이 참전하여 287명 전사(이중에는 한국군 18명이 포함됨)하였다고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가슴이 뭉클함을 금할 수 없다.

모병제이나 16세면 징집자원 신고제

프랑스는 왕조시대, 제정시대, 공화국, 제1,2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서 고귀한 희생을 다한 분들과 그 유족들에게 변함없이 최대의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구 징병제하에서 군복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거나 더 힘들고 위험한 부대에서 근무한 자들에게는 가산점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어느 누구 한사람도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현재도 2000년도에 변화된 국제안보환경에 따라서 모병제를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지만 일단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징병제를 다시 시행할 수 있도록 징병제를 일시 중지시킨 상태에 있다. 징병제하에서 철저하게 애국심을 함양시켰던 제도 못지않게 젊은이들의 애국심과 자발적인 국가를 위한 위국헌신의 봉사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남, 여 공히 16세가 되면 거주지 행정관서에 가서 미래의 징집자원 해당신고를 하고, 중3, 고2때는 민족수난의 역사, 특히 군의 역사교육을 시킨다. 18세 때에는 1일 국방 및 애국심함양교육을 위하여 군부대에 가서 견학도 하고, 강의도 듣고 응급처지와 같은 훈련도 하며, 프랑스어 수준을 테스트하기도 한다. 1일 소집교육이 끝났을 때 소집 부대장 명의의 소집교육 필증을 발급 받는다. 이 교육수료 증명서 원본이 첨부되어야 국가가 시행하는 모든 시험, 즉 운전면허시험, 대입검정시험 등에 응시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구 징병제하에서 병역 미필자는 장관, 국가공무원으로 임용되지 못하며, 국회의원 등 선출직의 피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보다 더 엄격한 제도이다. 현재 프랑스는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이고 핵보유국이며, 세계의 외교, 정치,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선진·강대국들이 호국영령과 호국용사들의 공을 높이 기리고 서훈하는 것은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그것은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친 이들을 최고의 예우로 대우하고 추모하는 호국·보훈정신이 바로 세계 최강국으로 그 국가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필자 김무일

파리의 대표적인 호국·보훈의 산교육장인 개선문과 앵발리드의 추모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북한의 끊임없는 핵, 잠수함발사 미사일 실험 등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참전용사들에 대한 보상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이 되어가고 있지만 좀 더 선진국들 못지않은 보훈제도와 정책이 자리 잡혀지고, 호국·보훈문화가 국민전체의 뇌리에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도 호국·보훈문화가 선진화되고 보훈정책이 뒷받침될 수만 있다면 반드시 진정한 선진국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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