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급제 후 세자 보좌하다

▲ 김연지 묘소.

[이코노미톡뉴스=최종인 칼럼] 태종은 강력한 왕권강화책으로 세종의 정치기반을 탄탄히 받쳐주어 안정된 국가운영의 길을 열어주었다. 세종대왕은 사회질서를 확립하면서 각종 문물제도의 정비, 민족문화의 창달, 과학 문명의 발전, 북방영토의 개척, 국방의 강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탁월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적재적소에 능력 있는 인물들이 안배되고 여러 분야에서 성과가 나타나면서 국가의 미래는 더욱 발전을 거듭할 것 같았다. 이와 같은 국정안정의 기조 속에서 특히 왕조국가에서 왕통의 계승문제는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는 과제로서 부왕 태종이 미리 양위하여 후견을 했듯이, 세종도 세자에게 내정의 상당 부분을 맡겨 정치적 역량을 키워주고자 했다. 그래서 첨사원(詹事院)을 만들어 장년이 된 세자(문종)가 정사를 대리하도록 하였으며, 이때 세종임금은 신진관료 김연지로 하여금 동첨사(同詹事)로서 왕명출납의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정권의 안정과 전문관료의 등장

진정한 국가발전은 모든 분야의 부문별 역량이 총합되어 국부의 축적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역사상 세종시대야말로 그러한 모습을 구현한 시절이었다고 여겨진다. 정치적 격동기를 지나 사회가 안정되면서 세종은 국가전반의 제도정비와 민생의 활성화를 위해 황희·맹사성 등을 기용하고, 문화 창달을 위해서는 집현전 학사들을 훈민정음 창제에 전념케 하였으며 과학 분야에 이순지·장영실 등을 발탁하였다. 이종무에게 대마도정벌을 명령하고 김종서에게는 사군육진을 개척하여 변방의 방위를 튼튼하게 하는 등, 각 분야에서 국가적 역량을 강화하였다.

▲ 비석 (경기도 장단 비무장 지대 안)

국가의 정세가 안정되는 데에는 우수한 관료들의 활동이 있었으며, 신진 인재들이 계속 배출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1413년 김연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과 형조정랑 등 청요직을 맡던 중 세종의 눈에 띄어 세자를 보좌하는 직책을 맡게 된다. 그러나 세자였던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 또한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빼앗겨 얼마동안 정치적 환경이 요동을 쳤다. 이즈음 김연지는 부평현령으로 좌천되었으나 극심한 흉년이 들어 피폐해진 백성의 생활을 잘 진휼하여 판사재감사에 발탁되고 상호군에 올라 지형조사를 겸하였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참의를 거쳐 가선대부에 올라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참판·대사헌·한성부윤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평안도·경상도관찰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1462년에 판한성부사에 제수되고 지중추원사로서 봉조하가 되었다. 봉조하(奉朝賀)는 정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가 사임하면 특별히 주던 칭호로 죽을 때까지 녹봉을 받는 특전이 있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성품이 단아하고 근실하였을 뿐 아니라 공무에 충실하고 언행이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는 후세의 평이 그의 인품을 말해주는 것 같다.

독곡선생집(獨谷先生集)을 편찬하다

외손봉사(外孫奉祀)라는 말이 있다. 친손이 없는 사람에게 외손이 제사를 모신다는 얘기로 현실적으로는 매우 드믄 일이데, 이에 못지않게 뜻 있는 일화가 김연지와 관련하여 전해져온다. 김연지의 부인은 판한성부사를 지낸 성발도(成發道)의 딸이다. 성발도의 아버지 곧 김연지의 처 외조부가 독곡(獨谷) 성석린(成石璘)인 것이다.
성석린은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활동한 인물로서 왕자의 난으로 야기된 태조(이성계)와 태종(이방원) 간의 갈등관계를 해소시켜 정치적 안정을 이루게 한 당대의 유력한 정치인이다. 관료로서의 정치적 비중과 함께 그의 학덕도 매우 존경받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이라 할 [시무20조]를 건의하고 ‘문장이 웅혼하고 글씨는 신묘하다’ 라는 서거정의 평을 들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같은 반열이라 할 수 있는 이색(목은집)·정몽주(포은집)·정도전(삼봉집)·권근(양촌집) 등이 죽은 후 그들의 사적(事績)을 담은 문집이 남겨져 있는데 아쉽게도 성석린은 아직 문집이 없었다. 그 이유로는 직계 자손이 서둘러 펴낼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겠으나, 이를 안타까이 여기던 외손서(外孫) 김연지가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성석린의 문집인『독곡선생집』 <평양본>을 편찬하였다. 당시의 시대상황과 문학작품이 그대로 실려진 이 문집은 훗날 산질되고 왜정 때 유출되었다가 최근에 일본에서 발견되어 후손들이 한글로 번역하여 다시 출간하였다.
독곡 성석린은 단순히 외손의 제사를 받은 것이라기보다 역사적 인물로 제대로 부각되는 중요한 사료(史料)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향기로운 미담이라 하겠다.

김연지 가문의 역사적 인물들 

김연지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간보(幹甫)이며 시호는 대경(戴敬)이다. 시조 거공(巨公)의 10세손으로서 증조부 해()는 이조판서, 할아버지 득우(得雨)는 목사, 아버지 을신(乙辛)은 중추원부사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유용생(柳龍生)의 딸이다.

김연지의 종손인 말손(末孫)은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병마절제사를 지냈고, 종5세손 응남(應南)은 원주김씨 문중을 빛낸 인물로서 선조 때의 명신이다. 김응남은 선조조에 문과에 올라, 대사성·대사간·부제학을 역임하고 공조판서·부체찰사로서 임진왜란 중에 선조를 호종하였을 뿐만아니라 환도할 때는 이조판서로서 배종하였다. 그 뒤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고, 죽은 뒤 호성공신으로서 원성부원군에 추봉된 인물이다. 응남의 사촌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두남(斗南)의 아들 김준룡(金俊龍)은 병자호란 때 병마절도사로서 용인 광교산전투에서 청태종의 사위 백양고라를 사살하는 대승첩의 전공을 올리고 어영중군·김해도호부사·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현재 광교산 상봉에 “忠襄公金俊龍戰勝地 丙子淸亂提湖南兵 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바위에 새긴 글이 남아있다. (자료협조하신 분 : 원주김씨대종친회 김행락 사무총장)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