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弘燮(윤홍섭) 부회장, 군번· 계급없이 첫 참전
각종 전공 평가기록으로 ‘육사군번’ 회복

▲ 윤홍섭(尹弘燮)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육군종합(전시사관)학교 전우회 수석 부회장. <사진=이코노미톡뉴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개교 이래 첫 번째 4년제 후보생으로 입교했던 ‘생도 2기생’들은 ‘비운의 육사생’이라며 자탄한다. 생도 2기는 육사 입교 25일 만에 6.25를 만나 군번도 계급도 없는 ‘무등병’(無等兵)으로 참전하여 많은 희생자를 남겼다. 그 뒤에도 육사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단기교육 과정을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공식으로 육사 군번마저 받지 못했으니 ‘비운의 육사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생도 2기의 명예와 자부심은 영원

올해 여든여섯의 윤홍섭(尹弘燮) 6.25 참전 노병이 생도 2기의 비운을 증언한다. 윤 회장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고 도미유학을 거쳐 월남전에도 참전한 후 육군 중령으로 전역하여 지금은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육군종합(전시사관)학교 전우회 수석 부회장으로 활약하며 생도 2기의 명예와 자부심 회복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긴다.
윤 회장은 생도 2기가 안타깝게 겪은 비운이 기본적으로는 김일성의 남침 탓이라고 돌릴 수 있지만 당시 빈약한 나라의 재정사정에도 원인이 있고 군 수뇌부의 지도력에도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고 인식한다. 이 때문에 육사생의 명예는 고사하고 무명의 용사로 희생된 동기생들을 비롯한 생도 2기생 전원이 정규 4년제 육사생도로 입교했었다는 명예와 자부심을 끝까지 회복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 제9보병사단 창설 제 66주년 기념식 (2016.10.25)

4년제 생도, 장교출신 성분 ‘진골’의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사관학교는 건군 장교육성기관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보지만 당시 여러 가지 여건부족으로 육사 1기생은 겨우 45일, 2기 80일, 3기 3개월, 4기 4개월 등 단기교육 훈련으로 임관, 배출했다. 또한 후보생 선발도 일본군, 만주군 출신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 등 다양하고 사상적 배경도 이질적인 요소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미국서 독립운동을 벌여온 이승만 대통령이 웨스트 포인트식 사관생도 양성을 위해 4년제 생도모집을 서둘러 추진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육사 10기에 해당하는 생도 1기부터 4년제로 공모했지만 실제 모집 후에는 각종 준비 부족을 이유로 1년제 단기과정으로 임관시키고 생도 2기부터 정식 4년제로 교육 훈련시키기로 확정했다.
1949년 11월, 육사 생도 2기생 모집이 동아일보 광고란을 통해 공고되자 전국의 우수 고교 졸업예정자들이 몰려 무려 28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그리고 1950년 5월 29일, 생도 2기생 333명이 입교식을 갖게 되자 기존의 단기육사 출신뿐만 아니라 종합학교 출신, 현지임관, 통역장교 등 각종 장교출신 성분 가운데 최고, 최상의 ‘진골’ 육사의식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렇지만 4년제 육사교육 훈련 25일 만에 6.25가 발발하여 군번도, 계급도 없는 초보 육사생도로 충분한 장비도 없이 포천지구 전투에 긴급 투입했으니 첫날 86명이 전사하는 참사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육군종합 군번으로 좌천됐지만 무공혁혁

▲ 생도 2기의 명예와 자부심 회복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는 윤홍섭 부회장의 당시 모습.

윤홍섭 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온갖 물자가 부족하고 실탄마저 아껴야 할 때 생도 2기는 M1 소총 영점 조준사격 3발 사격 후 출전했었다고 말했다. 또 소련제 T34 탱크가 나타났을 때 교범대로 57미리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케트포로 정확히 포격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더라고 했다.
이로부터 철수, 후퇴작전을 거듭하며 ‘육사군번’도 받지 못한 채 육군종합학교 단기사관으로 임관되어 각종 전투에 참가하며 ‘소모품 소대장’ 시절을 극복해 내면서도 ‘4년제 사관생도’의 꿈과 명예는 결코 버리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 생도 2기 동기생 박보희리틀엔젤스 회장

윤 회장은 생도 2기 동기생의 하나로 박보희 회장을 꼽는다. 당시 박보희 소위도 윤 회장과 같이 9사단 창설요원으로 배치되어 28연대 소대장으로 함께 복무하다가 1952년 미국 조지아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 유학을 거쳐 주미 한국대사관 근무 등 육군 중령으로 전역했다. 그 뒤 리틀엔젤스 회장으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홍보하고 워싱턴 타임스 회장, 세계일보 사장을 역임한 후 2010년 유엔 6.25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윤 회장은 생도 2기 출신들이 ‘육사군번’도 못 받은 불운 속에서도 각종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도미유학 시험에도 월등한 성적을 올려 다수가 고급장교로 승진하여 대령 47명, 장군 19명을 배출했다고 자랑한다. 윤 회장 자신도 6.25 참전에 이어 베트남전 참전과 6관구 사령부 근무를 거쳐 중령으로 전역한 후 과학기술처, 원자력청, 원자력연구소 등 주요 기관 비상계획관, 보안실장 등을 역임했다.

▲ 생도 2기의 명예와 자부심 회복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는 윤홍섭 부회장의 당시 모습.

생도 2기 동기회 구성 명예회복 총력

비운의 생도 2기가 차별시정 및 명예회복을 위해 적극 나선 것은 1961년 6월 1일, 생도 2기 동기회 구성부터이다. 생도 1기는 6.25 도중에 임관식을 갖고 육사 10기생으로 군번을 받았지만 생도 2기는 아예 육군종합학교 군번으로 좌천되고 말았으니 본가에서 쫓겨난 기분이다.
그러나 생도 2기의 명예회복에는 육사의 기수 조정문제가 있고 4년제 1기생으로 자부해온 11기생들과의 갈등요인도 작용한다. 4년제 생도 출신 전두환 소령이 육본 인사참모부 유학성 처장 시절 기수조정 논리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사 1기에서 9기까지는 단기과정으로 임관한바 있고 생도 1기는 1년과정으로 임관됐으니 육사 10기로 조정하고 전두환 소령기인 4년제 1기생은 육사 11기로 정리하자는 논리였다. 반면에 육사군번에서 밀려난 생도 2기는 생도 1기 군번인 육사 10기 후반기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이었다. 불가피하게 생도 2기는 이 같은 수준으로 명예회복을 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1964년 4월, 생도 2기는 육사 총동창회 김점곤 회장 시절에 정회원으로 가입했으니 명목상 명예회복이었다. 또 1997년 3월 29일에는 생도 2기로 육사에 입교했던 333명 전원의 명단이 한문으로 동판에 새겨져 제막식을 가졌으니 ‘화랑대인’ ‘육사인’으로 영구 각인됐다. 이어 2000년 4월 17일에는 6.25참전 ‘생도상’이 준공 제막되고 육사기념관 입구에 ‘생도 2기 6.1탑’도 건립됐다. 이보다 앞서 6.25 초전에 참전했던 경기도 포천군 내초면 진목리에는 육사 사관참전 전공비가 생도 1, 2기 공동제작으로 세워졌다.

후퇴작전 중에도 정규 사관생 자부심

▲ 생도 2기 출신 박경석 장군이 실록소설로 ‘ 육사생도 2기’ 를 집필, 발간했다. (2000.10)

생도 2기 박경석은 17세의 미성년 나이에 응시하여 6.25 참전 전공을 세우고 준장으로 승진, 전역하고 2기생 동기회장으로 명예회복에도 헌신했다. 박 장군은 육군대위 시절에 ‘녹슨 훈장’ 작품으로 문학계에 등단한 후 ‘한사랑’(韓史郞)이란 필명으로 시집 20권, 장편소설 30편을 발표하고 각종 문학상을 12개나 수상했다.
또 군 경력으로 보면 전투 소대장, 중대장을 거쳐 파월 맹호사단에서는 초대 재구(在求)대대장으로 용맹을 날렸으며 군 복무시절 내내 을지무공, 충무, 화랑무공 등 11개의 훈장을 받았다. 생도 2기 출신 박 장군이 실록소설로 ‘육사생도 2기’를 집필, 발간했다. (2000.10 홍익출판사)
생도 2기는 육사 교육 25일 만에 육본의 명령에 따라 포천지구 전투에 참가했다가 참담한 피해를 보고 태릉고지를 지키려다 수원, 평택으로 철수, 후퇴했다. 비록 무질서한 후퇴길이었지만 생도 2기는 사관생도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꼿꼿했다.
낡은 전투복이지만 ‘육사’ 휘장을 뚜렷하게 달고 헬맷에도 흰 페인트로 ‘士’자를 선명하게 표시했다. 또 집단행군시에는 당당하게 군가를 목청껏 불러댔다.
생도 2기생들의 행렬이 평택 부근에 이르렀을 때 북한 야크기로부터 삐라가 떨어졌다. 북한 민족보위상 최용건의 명의로 “미제 앞잡이 이승만 도당은 다 망했으니 빨리 투항하라”는 내용이었다. 후퇴전선이 남진하여 육군본부가 충남도청에 이르렀을 때 생도 1기 134명에 대한 임관식이 있었다.
계급장을 준비할 길이 없어 깡통을 잘라 소위 계급을 표시하고 반창고로 모자와 견장에 부착시켜줬다. 이 때문에 ‘깡통소위’, ‘반창고소위’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반면에 생도 2기는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어중강한 ‘무등병’으로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후퇴하면서 언제 임관이 되고 전투에 참가할는지 알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단기사관 임관후 모조리 소모품 소대장

생도 2기가 동래에 도착하자 포항지구 전투에서 고전중인 육군 3사단 후방 경계를 지원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포항으로 진출하자 현지 하사관들이 ‘군번도 계급도 없는 무등병’이라며 하대하니 죽을 맛이었다. 대포소리, 기관총 소리가 요란한 전투 중이었지만 밤이면 모기들의 공격이 극성이었다.
경계 섰던 생도 2기가 모기와 씨름하고 있는 사이 게릴라가 침투하여 1명이 피살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적의 게릴라도 3명이 사살됐다. 이에 생도 2기는 귀환하라고 명하여 동래로 돌아가니 동래고에 육사본부 간판이 붙어있다. 이곳에서 손관도 소령이 대대장을 맡아 강훈에 돌입하니 아마도 머지않아 전선에 투입될 모양이었다.
당시 전선에서는 소대장을 하루살이 소모품으로 부른다고 했다. 낙동강 전선의 소대장 손실률이 60%를 넘어섰다고 했다. 장교가 모자라 병사들 가운데서 ‘현지임관’으로 보충했지만 계속 부족했다. 이 때문에 생도 2기생도 육군종합학교 6주 교육으로 육군소위에 임관됐으니 육사군번 아닌 단기사관 군번인 것이다.
박경석 소위 등 생도 2기 출신 소위 일동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임관 신고한 후 장도영 준장이 사단장을 맡아 창설 중인 9사단 소대장들로 발령됐다. 당시 9사단 창설 참모장이 박정희 중령이었다. 신임 소대장들은 28연대 박보위 소위, 29연대 홍경진 소위, 30연대 박경석 소위 등 졸업성적 순으로 배치한 모양이다.
박 소위는 3대대 10중대 제3 소대장으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경북 북부지구 잔적소탕 작전에 투입됐다. 북진팀이 예천읍에 이르자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환영해 주니 감격이었다. 당시 예천읍장이 현석호(玄 錫虎) 씨로 나중에 장면 정부 국방부 장관이었다. 현석호 읍장이 10중대의 주둔지로 예천여고 자리를 지정해 주며 매우 융숭하게 접대해 주더라고 했다.

포로되자 인민군 사단장이 ‘해방군관’ 호칭

북진전선이 경북 예천, 상주를 지나 강원도 평창 북쪽에 이르자 1077고지를 공격,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북진하던 국군이 후퇴를 거듭할 때 강원도일대 산악지대에 대한 방어공격을 신설 30연대에 맡긴 것이다.
연대는 1077고지 점령을 3대대에 명령하여 9중대가 서쪽을 맡고 박 소위가 소속된 10중대는 남쪽에서 고지를 공격, 점령하라는 명령이었다. 10중대 소대장 4명은 전원 생도 2기 동기로 호흡이 맞았지만 중대장 이태극 대위는 겁이 많은 편이라 3소대장 박 소위가 앞장서야만 했다. 박 소위는 이미 공비 5명 생포, 6명 사살 등 전공으로 화랑무공 훈장이 상신되어 있었다.
당시 박 소위는 아직도 10대인 반면 분대장과 선임 하사관 등은 모두 소대장 보다 몇 년씩이나 연장자였다. 또 소대장 전령 2명 가운데 정천욱 중사는 키 180cm, 체중 80kg의 거구로 사창리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인민군에게 끌려가던 것을 박 소위가 구출해 전령을 삼았다.
1077고지 공격이 개시되자 함박눈에 전투대열이 뒤죽박죽되고 통신망도 엉망이 되어 적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곧 인접 9중대가 적의 기습으로 궤멸됐다더니 10중대 마저 분산되고 박 소위가 적의 수류탄 공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거구의 정 중사가 소대장을 업고 나오고자 끌어안고 보니 이미 숨이 멎은 상태라 그냥 버려두고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나중에 죽은 줄 알았던 박 소위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방군관 눈을 뜨세요”라는 여군 목소리가 들렸다. 인민군이 ‘미제 앞잡이’로 부르던 국군장교를 ‘해방군관’이라고 호칭하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당시 박 소위는 키 167cm, 체중 55kg의 10대 미소년이었다.
이때 박 소위가 눈을 뜨고 보니 소장계급의 인민군 제4 사단장이 내려 보고 있었다. 그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조치원이라고 대답하고 출신 학교는 대전고, 육사는 생도 2기라고 응답하니 ‘명문고’를 나왔으니 ‘육사 생도’가 될 수 있었느냐며 아는 체 했다. 계속하여 인민군 사단장마저 ‘미제 앞잡이’ 대신에 ‘해방군관’으로 호칭하며 친근감을 표시하며 몇 주간을 함께 보냈다.
그 뒤 인민군 사단장이 “이제 해방군관이 됐으니 현지 임관으로 해방전투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짐작해 보니 인민군도 소모품 소대장이 부족하여 국군장교나 포로 병사들을 인민군으로 편입시켜 전선으로 내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박 소위도 26일 가량 인민군 부대서 치료 요양으로 회복되어 ‘해방군관’으로 편입, 국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된 것이다.

적진 탈출 신고하니 이미 전사자로 처리

인민군 사단장의 호의로 치료 받고 해방군관으로 편입됐다지만 박 소위는 도저히 근본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해방군관으로 위장하여 남행길에 탈주하여 생도 2기 동기생 박준승 소위를 만나 미군 포로 병사를 구출하여 동행 귀대할 수 있었다.
박 소위가 죽을 고비를 헤쳐 부산 동래 육군보병학교에 도착하니 그 사이 종합학교로 교명이 바뀌었고 그의 중형 박영석 소령이 교수부 교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박 소위가 적진 탈출 귀환을 신고하자 그의 형이 오래 전에 전사 통지를 받아 간략한 장례절차마저 다 치뤘노라고 했다. 이 때문에 동작동 국립현충원 묘지에는 ‘육군소위 박경석’ 비석이 아직도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박 소위는 육군 장성으로 승진할 때까지 ‘덤의 인생’으로 새롭게 산다는 각오로 일관해 왔다. 나중에 죽어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히면 고향 선산이 가까워 조상들 만나 뵙기에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육사생도 2기’ 책 속에는 9사단 30연대 3대대 작전장교 현영직 중위의 눈물겨운 사연도 기록되어 있다. 현 중위는 대한제국 말기 호남 재벌 현준호 씨의 장남으로 눈보라 속에 통신두절로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과거 자기집 머슴이 어느덧 인민군 군관이 되어 현 중위를 심문한 처지로 바뀌었다. 그 머슴 군관이 현 중위를 심문하면서 인간학대 했었지 않느냐고 마구 달겨드니 너무 분통하고 기가 막혀 자결을 선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현 중위의 선친 현준호 씨는 일본 총독부 시절 중추원 참의였으니 친일파 거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보수 우익계 인사 60~70명과 함께 광주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국군이 반격, 북진할 때 인민군이 모조리 학살할 때 피살됐다고 한다.

시험관 박정인 장군의 생도2기생 증언

▲ 육사 6기생 출신으로 생도 2기 선발전형 때 시험관으로 참여했던 고 박정인(朴定仁) 장군

육사 6기생 출신으로 생도 2기 선발전형 때 시험관으로 참여했던 박정인(朴定仁) 장군의 회고록 ‘풍운의 별’(1990.9 홍익출판사)이 ‘육사생도 2기’ 필자인 박경석 소위에 관한 증언록을 남겼다. 생도 2기 선발시험 때 박정인 중위는 시험관으로서 생도 2명의 합격을 이끌어 냈노라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첫 번째가 당시 군의 실세인 원용덕 장군(준장)의 장남 원창희 군이 17세의 어린 나이로 응시하여 학과시험 성적이 미달했는데도 합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생도 2기 응모자격에는 분명히 19세 이상으로 명기되어 원창희는 연령면에서 응시자격이 없었다.
그런데도 시험관 박정인 중위는 공산당 관련 구두시험에서 너무나 확고한 신념의 응답을 듣고 “원 장군의 아들로 대를 이어 반공전선에 기여토록 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합격을 주장했다. 그 뒤 원창희 생도는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장군(준장)으로 전역했으니 전업군인으로서 제역할을 다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한 명의 생도 2기는 ‘육사생도 2기’의 필자인 박경석 생도로 그도 역시 17세로 응시하여 무자격이 문제가 됐다. 박 생도는 학과시험 성적과 면접시험 점수는 최고점을 받았다. 박 생도의 큰형은 법관이고 중형은 육사 5기생 출신으로 현역 대위였다. 이에 시험관 박정인 중위는 박경석 생도 형제가 함께 대한민국에 충성토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하여 합격 판정했다. 박경석 생도도 육군 소위 임관을 거쳐 장군(준장)으로 전역했다.
박정인 장군은 또한 6.25 발발 당시 육본 작전장교로 생도 1, 2기생의 전투투입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다. 당시 생도 1기는 1년제 졸업을 20일 앞두고 있었으니 곧 임관하여 전선에 투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생도 2기는 겨우 25일간 훈련만 받았을 뿐이니 후방으로 철수시켜 어느 정도 소정의 교훈훈련을 거쳐 전투에 투입시키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이 앞장서서 일본 육사의 사례를 제시하며 역시 일본 육사 출신인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이를 건의했지만 상황이 다급해지자 무조건 포천전투에 출동시키라고 명령하여 수많은 전사자를 남겼다는 이야기다.
박정인 장군은 북진 전투에 참여하여 압록강변까지 진격했지만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두 차례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기록을 세웠다. 그 뒤 전투 대대장으로 휴직 직전까지 큰 공적을 쌓고 울산지구 경비사령관, 백골부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풍운의 별’이라는 별칭을 받은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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