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패배, 탄핵 통해 정권 헌납

▲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이코노미톡뉴스=이진곤 논객] 보수정권의 몰락은 진보세력의 공격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 주저앉고 만 것이다. 말하자면 ‘자살’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예비된 자신의 승리를 선거라는 절차로 확인시켰을 뿐이다. 물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선택 후 절치부심했던 이른바 ‘친노 세력’의 오랜 집권플랜이 마침내 결실은 맺었다는 측면도 경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만큼 ‘반문정서’라는 것도 강하게 작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수의 자멸 없이 이뤄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여전히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검찰의 기소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합법적 절차의 외피에 싸인 권력투쟁이었고 그 점에서는 정치적 변고로서의 정변이었다는 인식은 지금도 분명하다). 그의 폐쇄적, 독선적, 권위적 리더십에 대한 우려는 당선인 시기에 이미 지적되었다. 다만 여성 대통령으로서의 모성성이 발휘된다면 다른 약점들은 커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

그런데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기대는 빗나가고 우려는 적중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인재등용이 개방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자신의 수첩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이나, 측근과 연줄이 있는 사람들만 기용한다는 것이었다. 법률가 학자 편향의 인사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말하자면 인재 편식현상을 보였다고 하겠다.
청와대에 들어간 후로는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기자회견을 기피했고 국무총리, 야당 대표들과의 정례회동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각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청와대 내의 대통령 비서진들조차 대면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 같은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통치스타일은 결국 자신을 삼키는 함정이 되었다. 취임 이듬해 4월 16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인근해상에서 발생한 연안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가 정치적 몰락의 시작이었다. 유족과 국민의 원망과 비판이 대통령에게 집중됐다. 청와대의 미숙한 대응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스스로 국민의 불신을 초래한 것이다.
같은 해에 불거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에 대한 청와대의 대응도 국민적 의혹을 키웠다. 당초엔 ‘정윤회 국정 농단 사건’ ‘십상시 사건’ 등으로 불렸던 이 사건을 청와대는 문건 유출자 색출·처벌로 대응했다. 문고리 3인방이 실세라든가, 그 위에 정윤회 씨가 있다던가, 10상시가 권력을 행사한다든가 하는 소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는 빛이 없었다. ‘권력서열 1위 최순실…’ 운운한 보고서도 덮여 버렸다. 대통령은 당연히 문건 내용에 주목했어야 할 텐데 오히려 ‘찌라시’라며 문건 유출을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했다. 그 때 대통령이 경각심을 가졌더라면 훗날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경직되고 권위적이었다. 2015년의 ‘배신자 파동’이 그 예다. 그는 이해 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상시청문회를 가능케 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규정하며 국민에게 ‘심판’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그 이전에 새누리당은 19대 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비박계의 정의화 의원을 선택한 데 이어 전당대회에서도 비박계 김무성 의원을 선출함으로써 친박계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바 있었다. 이로 인해 필요이상의 경계심을 갖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비박계에 대한 노골적, 공개적 공격은 자신의 정치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총선승리를 야당에 바친 여당

박 대통령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20대 국회의원 총선 공천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한구 전 의원을 새누리당 공직후보자추천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 보내 공천과정을 장악케 했다. 공천과정은 시쳇말로 ‘막장 쇼’를 연출했고 민심은 여당을 떠났다. 결과는 참패였다. 한 때는 180석을 기대한다고 했던 집권여당이 제1야당보다 적은 122석을 얻는데 그친 것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과 친박계는 오히려 당권확보에만 집착했다. 친박계는 16년 8월 9일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그리고 최고위원 5석 가운데 4석을 장악했다.
12월 9일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져 통과됐다. 당시 새누리당 의원 129명 가운데 56명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친박계는 이런 상황에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달 16일 실시한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선거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비박계 나경원·김세연 조 대신 친박성향의 정우택·이현재 조를 선택했다. 그 자리조차도 양보하지 않은 것이다. 비박계는 27일 집단적으로 탈당, 올 1월 24일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만약 박근혜 정부가 무난히 임기를 채울 수 있었다면 여당의 재집권은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일찍부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염두에 두는 눈치였다. 당선 가능성 높은 후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단 반 전 총장이 아니더라도 유망한 인적 자원은 많았다. 그러나 총선 참패와 대통령 탄핵, 당의 분열로 여권의 유력인사들 대부분이 정치적 가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정권의 이 같은 몰락과정을 돌아볼 때 문 후보의 당선은 ‘운7 기3’ 정도가 아니라 ‘운9 기1’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물론 나름대로는 전략을 세우고 전쟁도 치렀지만 그러나 결정적 승인은 박 전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제공해 주었다.
사실 문 전 대표는 오랜 기간 ‘대세’로 지칭되긴 했지만 고비도 적지 않았다. 특히 호남에서의 반문정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는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14년 7·30재보선에서 참패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후 당 대표직에 올랐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15곳에서 치러진 이 재보선에서 단지 4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이에 비해 당시의 새누리당은 11곳에서 승리하며 기염을 토했다. 특히 전남 순천·곡성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에게, 서울 동작을에서 역시 새누리당의 나경원 후보에게 의석을 빼앗긴 것은 새정연의 뼈아픈 패배였다.

마침내 정권을 헌납하다

새정연은 문재인 대표 체제에서 치른 15년 4.29 재보선에서 다시 참패를 맛봐야 했다. 국회의원 보궐선거 네 곳 가운데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3석은 새누리당, 1석은 무소속 차지가 되었다. 광주광역시 서을에서 무소속 천정배 후보에게 의석을 빼앗김으로써 호남의 반문정서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당내에서도 이른바 ‘친노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었다. 결국 안철수 전 대표 등이 탈당을 해 국민의당을 창당(16년 2월 2일)함으로써 문 당시 대표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문재인 호는 당내 혁신위원회를 가동하고, 더불어민주당으로 개명(15년 12월 28일)하면서 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탈당이 이어지고 20대 총선 패색이 지레 짙어지는 상황이 되자 문 대표는 결국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1월 15일 김종인 전 의원을 비대위원회 대표로 추대하고 물러났다.
민주당은 김 비대위 대표의 강단 있는 리더십과 새누리당의 자멸에 힘입어 4·13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호남에서는 안철수가 이끄는 국민의당에 참패를 당했다. 국민의당이 광주 전남 전북 28개 선거구 가운데 23곳을 휩쓸었다. 바꿔 말하자면 민주당은 본거지를 거의 완벽하게 빼앗긴 처지가 된 것이다. 문 대통령은 호남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정계를 떠나겠다는 배수진까지 쳤으나 참패를 못 면했고, 전국적 정당투표 득표율에서도 국민의당에 밀렸다.
국민의당 안 후보의 경우 정치기반을 진보 중도 온건보수에 두었다. 표의 확장성이 크다고 할 수도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입장에 놓였다. 이념적 스팩트럼 상, 민주당 문 후보와 바른정당 유 후보 사이의 좁은 틈을 지지기반으로 삼아야 했던 것이다. 대선이 본격화할 때 까지도 보수 측 두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좀처럼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수 유권자들이 안 후보를 대안으로 선택하는 기류가 형성되면서 문 후보를 위협할 정도의 지지세를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4월 11일의 ‘대형 단설유치원 신설 자제’ 발언 이후 지지율 상승세가 꺾였고 15일 대선후보 1차 TV토론 이후 급락세로 돌아서고 말았다. 반면에 자유한국당 홍 후보에 대한 여론 지지율은 이때를 계기로 급상승했다. 바른정당 유 후보도 토론회 효과를 일정부분 누리게 됐다.
홍 후보의 경우 막판 보수결집의 효과를 업고 추격전을 벌이긴 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후였다. 다만 애초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가 안 후보를 제치고 2위로 결승점을 통과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대신 그만큼 보수 측의 안타까움도 커졌다. 만약 보수가 좀 더 일찍 결집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두고두고 삭여야 하게 된 것이다.
문 대통령과 그의 정부 등장은 자신과 민주당, 그리고 진보 유권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수 정치인들의 헌납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보수정당과 그 리더들은 후회 반성 사죄를 거듭 거듭해도 모자란다. 자신들을 지지해준 국민을 배신한 결과가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자신들에게 안길 것인지 이제 곧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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