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핍박, 능멸 참으며 침묵의 세월
이제 무거운 짐 내려놓은듯 인생정리

▲ 전두환 전 대통령. 청와대를 나온 지 30년 만에 회고록을 출간했다. 사진은 1988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담화모습중. <사진=국가기록원>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온 지 30년 만에 회고록을 출간했다. 1~3권에 걸쳐 도합 1,728페이지에 달하는 회고량에 비춰보면 하고 싶은 말, 해명이 필요한 부분 등 자신이 꼭 회고해야 할 역사가 많았다고 믿어진다. 제1권 ‘혼돈의 시대’는 10.26에서 대통령까지, 제2권은 ‘청와대 시절’, 제3권 ‘황야에 서다’는 퇴임 후에 겪은 일들이다.

말할 수 없고 들어줄 사람 없었던 얘기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5 공화국은 10.26 국변 후 위기관리로부터 통금(通禁)해제, 물가안정, 무역수지 흑자달성, 88올림픽 유치 및 평화적 정부 이양 등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동시에 집권과정의 ‘12.12 쿠데타’, ‘5.18 학살’ 등 정반대의 두 얼굴로 심판된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후임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소급입법인 5.18특별법에 의해 구속 재판받고 중형 선고받는 모습을 온 국민이 지켜볼 수 있었으니 국가적인 불행이다. 또한 그동안 정치권과 언론 및 시중여론은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거리낌 없이 무한 비난일색이었지만 본인들은 적극적으로 해명, 반박할 공간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회고록 머리글에 그동안 온갖 핍박과 능멸을 참아 내는 일이 고통스럽고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지만 오랜 침묵의 세월을 겪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회고록 글이 지금껏 “말할 수 없었고 들어줄 사람도 없었던 얘기들”이라고 말하고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것, 패자의 얘기는 묻히는 것”이기에 지금 와서 ‘세월의 힘’을 빌려 진실을 밝힌다 해도 신화(神話)처럼 굳어진 편견과 오해가 풀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절박, 처절한 집필의 심정 토로

▲ 전두환 회고록 1~3권

회고록은 단임을 실천하고 청와대를 나서자마자 후임 대통령의 청와대로부터 비난과 공격이 시작되고 해명할 기회도 없이 백담사로 유폐된 것으로 지적했다. 또 여러 고비와 곡절 끝에 연희동으로 귀환한 뒤에도 정치권과 언론이 가만 두지 않았고 특히 정치적 책략의 희생물로 투옥되고 재산몰수의 수난도 겪었노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간절한 심정의 회고록 발간에 대해 야권에서는 5.18 관련 대목을 이유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느니 인세마저 추징해야 하느니 비난 일색이다.
전 전 대통령의 경우 정치적, 사법적 처벌을 다 받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명예와 예우마저 한 점이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노후의 그의 반론과 항변권마저 끝까지 정치적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할는지는 의문이다.
회고록 ‘글을 마치며’ 대목에 매우 처절한 집필의 심정이 너무나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회고록 집필이 곧 일생을 정리한 셈이다. 남겨야 할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놓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에 맺힌 멍이 풀어진 듯, 이젠 더 이상 지닌 것, 붙들고 있어야 할 그 무엇도, 기쁨도 슬픔도, 미움과 애착도 사라졌고 아쉬움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여든이 넘어 아흔을 바라보는 노병에게 남아 있는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문득 가슴 속에 작은 소망이 남아 있다고 느끼니 바로 김일성 왕조가 무너지고 조국이 통일되는 날을 보고 싶다는 심정이라고 밝혔다.

5.18 아직도 진상 규명되지 않았다

▲ 백담사에서 백일기도 염불을 드리는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 제1권, ‘혼돈의 시대’는 10.26 사태 후 보안사령관 합수본부장으로 12.12 및 5.18 당시 신군부 주역을 맡아 대통령이 된 과정을 기록했다. 이 가운데 핵심 대목이자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하고 논란이 극심한 부분이 ‘5.18과 나’이다.
전 전 대통령은 각종 기록과 증언들을 나열해 가며 항변과 해명하면서 5.18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자리매김 했노라고 탄식한다. 또 5.18특별법, 5.18 청문회 등을 거치면서 각종 편견과 오해 속에 ‘정치재판’, ‘정치보복’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광주사태를 악화시킨 요인들로는 △ 폭동심리를 유발한 악성 유언비어들 △ 무기고 습격과 시위대의 무장 △ 극한상황으로 몰린 공수부대원들 △ 정부와 계엄사의 수습노력 △ 해방구가 된 광주시 등으로 꼽았다. 광주시 해방구라는 표현은 그해 5월 21일, 계엄군이 철수하고 공무원들도 피신한 후 무장 시위대가 전남도청에 진입한 사실을 말한다.
또 사태수습 뒤에까지 쏟아진 질문들로는 △ 계엄군의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나 △ 발포명령이 있기나 했나 △ 과연 학살이 있었나 △ 비극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만 했나 등을 꼽았다. 이어 ‘5.18사태의 실태’ 논란 부문에서는 △ 계엄령의 전국 확대가 5.18 원인이었나 △ 투쟁위원회의 선언문과 시위대의 구호 △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는가 등 의문을 제시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질문과 의문의 제시로 “5.18의 진실규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 부문은 광주교도소에 대한 시민군의 집요한 공격을 두고 지적한 말이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좌익수 등 170명, 강력범 300명 등 총 2,640명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곳을 6차례나 공격한 것은 폭동을 유발할 의도가 아니겠느냐는 지적인 것이다.
당시 정보당국에서는 북측에서 남한 고첩들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내린 것으로 포착하고 있었다. 또 소준열 전교사령관과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이 국회청문회와 검찰조사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증언했었다.

퇴임과 동시, 6공으로부터 5공단절 개시

회고록 제3권, ‘황야에 서다’는 뜻밖에도 자신의 도움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고 확신한 6공 노태우 대통령의 청와대로부터 시작됐노라고 기술되어 있다.
전, 노 두 전직 대통령 사이가 평생 동지라는 사실은 온 국민이 듣고 알고 있는 일이다. 노태우 후보의 당선요인인 ‘6.29 선언’은 이미 확인된 것처럼 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작품이다. 그러니까 노태우 후보가 직선제에 의해 당선된 공과를 따지자면 전 전 대통령의 공헌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퇴임과 동시에 청와대로부터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각종 언론 플레이에 의해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대선운동 기간 중에도 노태우 후보 진영에서 5공과 전두환 격하운동이 시작된 조짐이 없지 않았다. 노태우 후보 자신도 야당후보들의 공세에 대응하여 친인척 관련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전 전 대통령은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무슨 말이든 다해도 좋다”, 또 “내가 열 번, 스무 번 죽어도 좋다. 당선만 된다면…”이라고 응답했다. 또 TV 연설문안에 부정부패 척결과 관련하여 “국가원수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라는 대목이 있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었지만 노 후보가 이를 그대로 방송했을 때도 선거전략으로 이해했다.
그 뒤 노 후보가 대선 승리에 성공하여 당선자 신분이 됐을 때부터 야당과 함께 5공과 단절을 시도하는 언행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단절의 첫 신호가 전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영향력 행사 우려로 표시됐다. 전직 대통령문화를 조성해 보겠다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마치 상왕(上王)노릇으로 비판하고 이를 언론이 보도하기 시작했다. 또 동생 전경환의 새마을운동본부 비리혐의도 대서특필됐다.
이에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일정을 단축, 귀국하자마자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정당 명예총재직 등을 사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계속하여 1988년은 노태우의 6공은 보이지 않고 5공 청산의 해로 비쳐졌다.
미 무렵 시중에서는 전 전 대통령의 해외 망명설이 유포되고 있었다지만 실상은 청천벽력이었다. 모처럼 단임약속을 실천하고 평화적 정부이양에 성공한 전직 대통령의 해외망명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죽어도’ 해외망명은 있을 수 없노라고 강력하게 부인한 것이다.

▲ 백담사 입구 용대리 주차장은 전국에서 몰려든 방문객들로 가득했다.

해외망명 유도 공작끝에 산사유폐 결정

5공이 유치한 서울올림픽이 개막됐지만 전 전 대통령은 개막식 참석을 포기했다. 노태우 정부는 올림픽 게임 성공에 고무됐지만 5공과의 단절을 위한 전 전 대통령의 해외망명 공작은 계속 진행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박세직 올림픽조직위원장이 안현태 전 경호실장을 통해 흘린 스위스 망명계획이 특이하다. 전 전 대통령측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지만 ‘레만호 계획’이라는 이 공작에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만약 이 계획을 수용했더라면 스위스의 비밀계획에 엄청난 돈을 빼돌려 놨다고 몰아붙일 작전이 아니었을까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뒤 국회 5공특위와 청문회가 시작되면서 청와대가 장기외유를 권고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갑자기 합천 생가에 화재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낙향할 곳도 없어졌으니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해외망명설을 워낙 강력히 거부하자 산사(山寺)로 유폐결정이 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5공과 단절, 청산을 서둘기 위해 망명, 낙향 등을 설득하기 위해 모든 측근들을 동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 동기인 이원조 의원을 비롯하여 윤길중 민정당 대표, 정호용 의원, 권익현 전 민정당 대표 등이 연희동을 방문했지만 전 전 대통령은 완강히 거부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6공은 검찰과 국세청을 통한 압력으로 전 전 대통령 4촌동생과 형님을 구속하고 처남회사에 대한 세무조사와 구속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끝내 망명, 낙향 대신에 백담사 유폐로 결말이 났다.
그해 11월 23일, 전 전 대통령은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낭독한 후 백담사로 떠나 오후 3시반쯤 눈 쌓인 산사 입구에 도착하여 주지 김도후 스님으로부터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를 받고 법당으로 안내됐다. 법당에서 서툰 방식으로 예불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어떻게 알았는지 신문기자 20여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다음날 조간신문에는 “절로 쫓겨 와서도 웃고 있다”는 요지로 조롱하는 기사가 실렸다.

백담사 769일 유폐와 5공청산 종결

영하 20도의 맹추위 속의 백담사 요사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화장실이 재래식 그대로였다. 밤이면 200여m 떨어진 화장실에 가자면 이순자 여사의 경우 살쾡이 울음소리가 두렵다고 해서 늘 전 전 대통령이 플래시를 들고 안내해야 했다.
청와대 경호실에 차량지원과 전기가설을 요청해 봤지만 감감소식이었다. 반면에 박삼중 스님, 김장환 목사, 법정 스님, 지학순 주교 등이 방문하여 법문을 들려주고 기도를 올려주니 큰 위안이 됐다.
음력 정월초하루를 계기로 100일기도를 올리기로 큰 결심을 했다. 아호 일해(日海)를 지어준 탄허 스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 ‘국태민안, 영가천도’로 이름 붙였다. 하루 세 번씩 108배 100일기도에는 숱한 고비와 고비가 있었다. 그렇지만 죽기 살기로 기도에 매달려 5월 16일 회향(回向)법회를 갖게 되니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까지 청와대와 5공 청산을 위한 신경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이학봉 전 민정수석이 구속되고 장세동 전 안기부장도 구속됐다.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하라는 요구와 함께 동행명령권도 도착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중간평가를 유보하겠다고 선언한 후 4당 중진회의를 거쳐 전 전 대통령의 국회출석 증언에 합의한 것이다.
1989년 12월 31일, 새벽 5시 백담사를 출발하여 오전 9시 반 국회에 도착, 10시에 증인석에 앉아 사전 질의에 대한 답변서를 낭독했다. 야당석에서 고함과 소란이 잦아 정회선포가 이어졌다.
5.18 관련 대목에 이르자 평민당 소속 정상용 의원이 증언대로 돌진, 항의했다. 그는 5.18 당시 시민군 지도자 출신이다. 또 평민당 이철용 의원도 달려나와 폭언을 했다. 그는 ‘어둠의 자식들’ 작가로 등원했지만 특위 위원이 아니었다.
청문회 동안 8차례나 정회 소동을 거듭하면서 진실규명 보다는 인신공격과 모욕 등 한풀이장이나 다름없었다. 밤 12시 59분에야 국회의사당을 겨우 나올 수 있었다. 다음날 1990년 1월 1일 새해 첫날 백담사에 도착하고 보니 이순자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일부 스님 등이 이틀째 철야기도 하며 3,000배를 올렸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1월 3일, 노태우 대통령은 5공 청산 종결을 선언했다.

산사 유폐 2년 1개월 만의 귀환

노태우 대통령의 5공 청산 종결 선언에도 불구하고 연희동으로 귀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반면에 서암 스님을 비롯하여 월산, 숭산, 큰스님 등의 법문을 듣고 전국에서 몰려오는 불자들의 단체방문이 즐거운 보람이었다.
여름 휴가철이 되자 백담사 방문 관광버스들로 용대리 주차장이 넘쳤다. 하루에도 4~5천명씩, 어느 날은 8,000명에 이르기도 했다. 백담사 측에서도 미니버스와 봉고차 등 9대를 빌려 주차장에서 절간까지 7km 계곡을 서비스했다. 그러나 법당과 앞마당마저 넘쳐 전 전 대통령 부부가 주차장으로 내려가 합장인사 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여름이 가고 가을을 맞고 보니 또 한해를 백담사에서 보내야 하느냐는 근심이 나타났다. 전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 3주가 지나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이 발표됐다. ‘구국의 결단’이라고 선언했지만 실상은 이질적인 정치세력간의 야합식 합당이었다.
실제로 오래지 않아 합당의 고리인 ‘내각제 합의각서’ 파기 소동이 일어나고 YS가 다수파인 민정계와 자민련계를 압도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고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 연희동 복귀의 기약이 없어 정구영 민정수석편을 통해 전 전 대통령의 형 전기환씨 석방과 연희동집의 원상회복을 요청했지만 청와대 반응은 냉랭했다. 연희동집은 학생시위의 표적이 된다는 이유로 ‘제3의 장소’를 물색해야느니 연희동 귀환을 고집한다면 신변보장을 중단하느니 등 막말까지 나오는 지경이었다.
더구나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처남이 법원의 판결이라지만 다시 구속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순자 여사가 ‘백담사 3번째 겨울을 맞으며’라는 장문의 수기를 발표하여 언론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12월 24일,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통해 모처럼 전 전 대통령의 연희동 귀환을 희망한다는 뜻을 밝혀 보도됐다. 언론보도에 앞서 김영삼 민자당 대표,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 등에게도 미리 이를 통보했었다. 이렇게 해서 12월 30일을 연희동 귀환일로 결정했으니 유폐 2년 1개월만의 귀환이다.

▲ 서울서 찾아온 손자, 손녀를 자전거 앞뒤에 태우고 백담사 주위를 돌면 그처럼 행복할 수가 없었다.

평생동지 노태우와 6년만에 화해

전 전 대통령은 연희동으로 돌아온 직후 최규하 대통령을 예방하고 이승만 대통령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 윤보선 대통령 미망인 공덕귀 여사를 방문, 인사하고 가까운 친척들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측근들도 찾아 인사했다.
그렇지만 평생 동지 사이였던 노태우 대통령과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퇴임하고 YS가 집권한 후 1년이 지난 1999년 6월, 어느 결혼식에서 전 전 대통령이 평생 야당 출신 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 전 국회부의장과 테이블을 같이 했다. 이 자리에서 소석이 전 전 대통령에게 보수 우익세력의 각성을 촉구하며 단합을 강조했다. 당시 북한이 IAEA 탈퇴를 선언하고 핵 개발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소석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고 응답한 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오는 6월 보훈의 달, 국립현충원에 참배한 후 따로 만나자고 제의했다. 실로 6년만에 전, 노 두 전직 대통령 간의 만남과 화해였다.
그로부터 두 전직 대통령은 YS의 ‘역사바로세우기’의 가혹한 심판을 받게 된다. 전 전 대통령은 YS의 역사바로세우기가 14대 총선 실패에서부터 시작된 역사농락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YS는 민자당 대표가 된 후 1992년 3월 24일 총선결과 민자당 149석, 민주당 97석, 통일국민당 31석 등으로 과반획득에 실패하여 여소야대 국회로 진로가 험난해졌다. 당시 당내에는 박태준, 이종찬, 이한동, 박철언 등 민정계 주자들이 다수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YS는 극적인 돌파력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자마자 연희동을 방문하여 민정계의 적극 협조를 당부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방문하여 “앞으로 잘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명목으로 정치적 보복을 감행했으니 이에 강력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YS의 ‘역사바로세우기’ 정치재판

14대 대통령 선거는 YS 42%, DJ 33.8%, 정주영 16% 득표율로 YS가 당선됐다. YS는 6공과의 차별화를 목표로 사상 초유의 ‘문민정부’라고 주장하며 한완상 통일부총리를 앞세워 밀입북 문익환을 사면하고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꽃가마에 태워 북으로 보내줬다.
이어 개혁 드라이브로 하나회를 숙청하고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다시 구속했다. 또한 12.12 및 5.18을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 사건’ ‘공소권 없음’에서 5.18특별법 제정 지시로 돌변하여 검찰이 즉각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YS는 정치 9단이라고 불렸지만 오기의 정치라는 지적도 많았다. YS 취임직후 지지율이 치솟고 있을 때 ‘YS는 못 말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팔리기도 했다. 이 같은 여세를 몰아 특별수사본부가 출두 통지서를 발부했을 때 전 전 대통령이 ‘골목성명’을 통해 YS 정권의 이념과 역사관을 따지고 물었다. 이어 국립현충원을 거쳐 고향 합천의 선산을 참배한 후 친척 집에서 자고 있다가 새벽에 들이닥친 수사관들에게 체포, 압송되어 안양교도소에 수감되는 과정이 TV 보도로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YS의 전형적인 오기 정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에 불복하여 28일간 죽음을 각오한 전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도 오기와 자존심의 항변으로 해석된다.
전 전 대통령은 단식 후유증을 치료받으면서 ‘5.18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 분명 ‘정치재판’의 성격이었다. 전 대통령측 전상석, 한영석, 이진우 변호사의 모두발언이 이 재판의 성격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YS정권의 역사바로세우기는 국가적 연속성과 정통성을 부인하는 반역사적, 반국가적 이라는 요지의 비판이다.
제5 공화국 대통령을 내란의 수괴로 단죄한다면 5공 대통령이 임명한 판·검사들도 모두 내란 동조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명백하고 상식적인 논리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정권차원의 정치재판을 말릴 재간이 없었던 시절이다.
검찰의 신문태도에 변호사들이 불만을 표시하고 변호인들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집단으로 퇴장하기도 했다. 이에 전 전 대통령이 역사와 국민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재판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어 국선변호인은 공소장을 읽어보지도 못하고 피고인들이 재판거부 사태를 빚기도 했지만 끝내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에게 반란, 내란 수괴죄로 사형을 언도했다.
이에 항소도 포기코자 했지만 변호인들의 권유로 항소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YS정권의 5.18 재판 결과는 5, 6공을 ‘내란정부’로 규정했다. 반면에 YS는 내란정부와 합당을 통해 정권을 잡아놓고 과거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선언했으니 바로 역사쿠데타가 아니냐고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은 항소심 법정에서 전개된 법리 논쟁으로 △ 정승화 총장의 연행이 위법인가 △ 비상계엄 확대선포가 내란인가 △ 국보위 설치 및 운영과 군헌문란 △ 계엄군의 시위 진압이 내란이 되는가 △ 자위권 보유 천명 및 발동지시가 발포명령인가 △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있는가 △ 법원 확정판결의 기판력과 일사부재리의 원칙 △ 대통령 재임 중의 시효정지와 소급입법 등을 제시했다. 자작나무숲.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