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림, 김정남 출산후 잠시 로열패밀리
재산 다 날리고 암살, 망명등 풍비박산

▲ 김정일과 둘째부인 성혜림(위 오른쪽)사이에 태어난 아들 김정남(아래).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일성왕조의 장손으로 태어난 김정남(金正男)이 이복동생 김정은에 의해 독살됐으니 세습독재 권력의 전형적인 독기(毒氣)다. 마치 역성혁명으로 조선조를 세운 이성계의 3남 이방원의 ‘왕자의 난’이 되살아난 꼴이다. 김정은이 겨우 27세의 철부지로 독재권력을 승계한 후 고모부 장성택을 총살한데 이어 해외로 나가 3대 세습을 비판해 온 이복형마저 극약처방으로 청소한 것이다.

‘백두혈통 적장자’의 평양 탈출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69세로 사망하기 전 아들 셋 가운데 막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한바 있다. 한때 장남 김정남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황태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었지만 자주 해외로 나다니며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듯한 언행으로 자유세계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으니 독재권력의 속성상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남은 김정일이 유부녀이자 5년 연상의 배우 성혜림과 극비로 동거하다 낳은 장남으로 할아버지 김일성이 ‘귀여운 백두혈통 적장자’라고 했다니 3대 후계자 1순위로 꼽힐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99년 후계자로 지명됐다는 보도가 나온 후부터 아버지 김정일과 사소한 의견충돌이 생기고 이 때문에 베이징 등지로 자주 탈출한다는 보도가 나왔으니 사태가 잘못되고 있노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더구나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 하려다 추방된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으니 후계자 반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관측됐었다.
이보다 훨씬 앞서 김정남이 모스크바와 스위스 유학을 다녀와서 “호텔에서 술 마시고 마구 소리 질러 아버지 김정일한테 야단도 맞았다”는 증언들이 있다. 다만 이때는 아직 20대의 반항의 계절이라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김정남이 해외에서 보고 듣고 익힌 안목으로 부친의 절대권력 놀음이 비정상적이라고 인식하여 각종 언행 속에 북한체제에 대한 불만이 섞여 나온 것이 아닐까 짐작되기도 한다.
실제로 김정남은 평양을 떠나 베이징에 거처를 정해 두고 북한과는 다른 중국의 개혁 개방풍토를 마음대로 호흡해 왔다니 절대군주 체제하의 황태자로서는 스스로 자격포기를 선언한 셈이나 다름없었다는 결론이다.

도피 황태자 ‘김정남의 육성고백’

김정일이 사망하여 장례식을 치른 후 김정남이 평소 친분관계를 쌓아온 도쿄신문 고미요지 기자와 주고받은 이메일과 인터뷰 기사를 담은 ‘김정남의 육성고백’이 책으로 나온 적이 있다. (2012.3 중앙M&B, ‘안녕하십니까, 김정남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방탕아인가, 은둔의 황태자인가’라는 의문의 제기로 그가 평양을 떠나 밖으로 나와 자유인처럼 행동해온 내면의 세계를 얼마큼 증언한다.
김정남은 이 책에서 “나는 지도자가 될 생각이 없다”는 말로 동생과 싸울 일이 없다는 입장을 일부러 밝혔다. 그러면서 부친이 생전에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고 말하고 자신이 직접 듣기도 했노라고 주장했다. 또 3대 세습에 대해서는 “봉건시대의 잔재로 사회주의 정신과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딱 부러지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동생이 잘 되기를 희망하여 해외에서 나마 돕고 싶은 생각”이라고 덧붙였으니 그의 진심일 수도 있고 신변안전을 위한 의도적인 발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김정남은 평양을 탈출하여 베이징과 동남아로 유랑하는 과정에 적어도 3차례나 암살위험을 겪은 것으로 보도된 바 있었다. 결국 이의 연장선상에서 지난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정은이 보낸 극약에 의해 피살되어 화장으로 형체도 없는 한줌의 재가 되어 평양으로 압송되고 말았으니 김정남이 “동생이 잘 되기를 바라며…”라며 신변안전을 호소한 말도 아무 소용이 없었음을 말해 준다.
아마도 김정은은 미국, 일본, 남조선 등을 상대로 핵과 미사일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는 시각에 김정남이 해외에서 이런저런 발언으로 성가시게 구는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다며 암살 테러팀에게 ‘빨리 없애버려’라고 호통 치지 않았을까 싶다.

출신성분 최악의 고영희가 낳은 자식

▲ 김정일의 넷째부인 고영희(위 오른쪽)의 아들 김정은(아래).

김정일의 여성편력이야 도무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증언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공식으로 확인된 부인은 4명으로 슬하에 아들 셋 딸 셋을 두었다.
첫 부인 홍일천은 딸 하나, 김혜경, 둘째는 성혜림으로 아들 하나가 바로 김정남, 셋째는 김영숙으로 딸 하나, 김설송, 넷째부인 고영희는 김정철과 김정은 등 아들 둘, 딸 하나 김여정 등 2남 1녀.
이 가운데 김정일의 후계자가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이 낳은 자식이니 남한 지주계급 출신인 성혜림 보다도 하위 성분으로 출신성분을 가장 중시해온 김일성왕조 체제의 정통성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한편 김정남은 첫 부인 신정희와 아들 하나, 김금솔, 둘째부인 이혜경과 아들 하나 김한솔을 둔 것으로 보도됐다. 김한솔은 평양에서 태어날 때는 장손의 왕통을 타고 났다고 좋아했지만 아버지 김정남의 영향인지 일찍부터 해외로 나돌아 파리정치대학을 졸업했다지만 평양체제와는 너무나 다른 세계를 살아와 평양귀환의 가능성은 전무해 보인다. 그는 김정남이 암살되어 시신을 인도할 유족이 없다는데도 끝내 말레이시아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왕통에서 멀어진 후 신변의 안전문제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김일성 이후 세습독재 체제하에 1인독재 권력은 백두혈통 번영을 위해 여기저기에 많은 씨를 뿌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왕권세습 과정을 통해 1인 독재체제 외는 백두혈통이라 해도 씨를 말리는 식의 비정한 숙청방식을 보여 왔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도 권력세습 과정을 통해 위아래 곁가지 등을 과감히 청소함으로써 1인독재 권력을 확립했다. 김정은이 김정남을 독살한 것도 바로 이 같은 독재권력의 기본속성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성씨 일가 동반 김일성에 지극충성

김정일의 처가, 성혜림의 친정 창녕 성씨 만석꾼 집안은 온가족이 월북하여 김일성왕조에 대한 지극충성으로 잠시 인정을 받았지만 6.25 남침전쟁 패배 후 남로당계에 대한 숙청기에 죽을 고비를 맞았다. 그러다가 성혜림이 김정남을 출산하여 잠시 로열패밀리 대우를 맞으면서 가문의 몰락위기에서 회생했다가 그 뒤 다시 패가망신으로 결말이 났으니 전통 있는 양반가문이 빨갱이에 물들어 너무나 값 비싸고 억울하고 비통한 교훈을 남긴 것이다.
성혜림의 부친, 김정일의 장인 성유경(成有慶)은 창녕 성씨 1만 3천석 종손으로 입양하여 수많은 재물로 남로당에 충성한 후 6.25 때 두 딸을 데리고 월북했다. 부인 김원주(金源珠)와 장남 성일기(成日耆)는 미리 평양에 보내 놨으니 온 가족 5명이 빨갱이 정신으로 김일성의 품으로 들어간 것이다.
김정일의 장모 김원주는 진남포 태생으로 관비 장학생으로 일본 고등잠사학원 유학 후 월간 개벽지 기자로 활동하다 성유경의 후처로 들어가 1남 2녀를 낳았다. 성유경은 이미 14세 때 조혼하여 조강지처를 두고 있었기에 양반가문에서 중혼(重婚)을 허락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 임신하여 4대 독자를 출산하니 혼인을 허락하게 된 것이다. 이어 성혜랑, 성혜림을 낳아 3남매의 어미가 됐다.
경남 창녕 일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성씨 일가의 월북은 시대상황이나 사회적 분위기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일제하에서는 항일노선이란 좌우나 빈부의 차이가 없이 공동전선이었기에 해방직후까지 이 같은 개념이 통용되고 있었다. 또 지식인 사회나 문화 예술계 일수록 일제가 억압하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호기심과 친화감을 지니고 있는 경향이었다. 이 같은 배경 때문에 8.15 후 미군정기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승만정권 하에서도 6.25 직전까지 알게 모르게 매일같이 월북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문인, 예술가 등이 많은 편이었지만 성씨 일가와 같이 돈 많은 지주계급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북에서 공산당 횡포를 못 견뎌 남으로 내려온 동포들도 많았다.

만석꾼 재산풀어 좌우익 ‘사교정치’

▲ 성혜림의 부친 성유경(왼쪽)과 그의 부인 김원주.

성유경은 해방공간의 좌우 갈등기에 종로 YMCA 건너 박문서관 골목에 있는 서양요리집 백합원(白合園)을 인수하여 2층을 고급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이곳에 조병옥(趙炳玉), 장택상(張澤相) 등 우익 및 남로당 박헌영, 이주하 등 좌익 거물들도 출입했다.
또 명륜동 3가 자택은 부인 김원주의 단골손님으로 소설가 최정희, 시인 모윤숙, 나중에 스님이 된 김일엽 등이 늘 북적거렸다. 이 무렵 엘리트 공산주의 브랜드로 추앙받던 이강국(李康國)도 명륜동에 살아 성유경 부부는 넉넉한 재력과 백합원과 자택을 기반으로 좌우익 사교정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장남 성일기의 빨치산 행적을 기록한 ‘북위38도선’(2006.9 교학사)에 따르면 이때 성유경이 이강국의 영향을 받아 한·러 사전 500권을 구입하여 김일성에게 헌납하고 공작금으로 450만 원을 받아 오다가 돈암교의 불심검문에 적발되어 공작금은 몰수되고 8개월 징역형을 살게 됐다. 당시 성유경은 좌익검거 때마다 체포됐지만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도움으로 가석방되기도 했다. 이때도 두 분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보게 이제 그만일세. 이번 일은 우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라고 선을 그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성유경은 남로당의 정판사 위폐사건 이후 남로당 재정부장 이관술의 후임으로 취임하여 만석꾼 재물을 풀어 충성을 다했으니 끝내 빨갱이 운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창녕 본가에 있는 성유경의 친형은 집안 제삿날 동생이 내려와도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빨갱이에 물들어 조상이 남긴 재물만 탕진한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부인 김원주는 사회주의 이론에 심취한 운동가로 남조선 민주여성동맹 문화부장을 맡아 1948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남북대표자 연석회의를 참관한 기록을 세웠다. 당시 우익에서는 김구, 김규식, 좌익에서는 허헌, 박헌영 등이 참석했었다. 또 북측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진 등이 참석한 회의로 결국 김일성의 집권을 뒷받침해 준 꼭두각시 행사로 결말이 났었다.

황태자 김정일 성혜림에 넋 잃어

▲ 성혜림의 배우 시절 모습.

6.25가 나기 전 김원주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강동정치학원 교관으로 행세했고 장남 성일기는 이강국의 보증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보내기 위해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두 딸은 6.25로 서울이 인민군 천지가 됐을 때 성유경이 데리고 월북했다.
6.25가 발발하기 전 성혜림은 진명여고에 다니다가 여순반란사건이 터지자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했다가 이화여중에 편입했다. 언니 성혜랑은 풍문여중에 다니면서 학생선동에 늘 앞장서서 사람들이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구나”라고들 혀를 찼다. 그러나 나중에 그 빨갱이 피가 창녕 성씨가를 온통 풍비박산 시킨 독소가 되고 만 것이다.
온 가족 월북 후 장남 성일기는 남로당계에 대한 숙청기에 외교부상(차관)이던 이강국이 몰락하자 모스크바 유학의 꿈은 거품이 되고 말았다. 반면에 당에서 “월북해 온 청년들은 빨치산 복무 후 진로를 선택하라”는 지령으로 회령에 있는 제3군관학교 과정을 거쳐 남파 빨치산으로 경주, 울산, 양산 등 동해남부 유격대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뒤에 휴전 무렵 체포됐지만 어떤 배경이었는지 중벌을 면하고 방면됐다. 그 뒤 성일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만석꾼의 4대 독자로서 혈맥은 승계했지만 ‘잃어버린 세월의 형벌’은 지금껏 면치 못하고 있다.
성혜랑은 김일성대 물리수학과를 졸업하고 동기생인 이태순과 혼인하여 아들 이일남, 딸 이남옥을 낳았지만 1968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니 과부 신세로 전락했다. 동생 성혜림은 평양예술대를 나와 조선문학예술 총연맹 위원장 이기순(월북 작가)의 장남 이평과 결혼하여 딸 이옥돌을 낳았다.
성혜림은 1959년 졸업 무렵 영화 ‘분계선 마을에서’의 주연을 맡아 김일성의 극찬을 받고 ‘인민상’을 수상함으로써 팔자를 고칠 수 있었다. 곧이어 ‘인민교원’, ‘백일홍’ 등에 연속 출연하여 당시 인기배우 우인희 등과 겨룰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빨치산 혈통이 지배해온 북한체제상 성례림은 남한 지주계급 딸이라는 출신성분의 제약이 따라 기대보다는 ‘찬밥신세’라는 한탄이 따랐다.
이때 김일성왕조의 황태자 김정일이 성혜림의 시동생(이기영 3남)과 친구사이로 들락거리다가 친구의 형수(성혜림)에게 넋이 빠진 꼴이 됐다. 성혜림은 유부녀인데다가 5년 연상이며 남한 지주계급 딸이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김정일은 계모 김성애와의 권력암투기로 늘 불안감과 고독감에 젖어 있다가 배우출신의 미모에 서울태생이라는 신비감이 겹친 5년 연상에게 어미와 같은 위안의 품을 느꼈던 모양이다.
또 김정일은 성혜림이 소년단위원장으로 퍼레이드를 지휘하던 모습도 떠올렸다고 한다. 이렇게 김정일이 호감을 보이자 영화 촬영소가 황급히 지위를 ‘공훈배우’로 예우하고 노동당에서 입당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68년 프놈펜 영화제에 참석한 성혜림이 테이블 스피치와 신문기자 회견 등에 능란한 솜씨와 지성미를 과시하자 캄보디아 국가원수인 시하누크 공이 격찬했으니 성혜림의 외교적 성과였다. 이로써 계모와의 암투로 궁지로 몰린 김정일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고 1971년 5월 19일 장남 김정남이 탄생하여 김일성의 인정까지 받게 된 것이다.

성혜림 등극으로 몰락위기 성씨 일가 급회생

▲ 김정은(오른쪽)의 공부를 봐주는 고영희.

성씨 일가는 성혜림의 등극으로 가계 몰락의 늪에서 해방됐다. 당시 남로당계 인책론으로 눈치 보고 끼니 걱정하고 당의 감시와 멸시 속에 연명하다 일시에 로열패밀리 반열로 올라섰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성유경은 타고난 빨갱이 사상으로 가진 것 전부를 쏟아 붇고 충성했지만 당장 오늘, 내일 운명을 가늠할 수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헝가리 통조림 공장 사장이 되어 현지 공장장과 트러블에도 65세 정년을 채울 수 있었다. 부인 김원주는 김정남 양육을 핑계로 김정일의 중성동 관저에 입주하여 1994년 88세로 죽을 때까지 편안했다. 성혜랑도 김정남의 가정교사 격으로 그의 가족과 함께 김정일의 관저에 들어갔으니 성씨 일가가 몽땅 팔자를 펼 수 있었다.
김정일의 장인 성유경은 정년퇴직 후 일본 유학시절 친구 조헌영(趙憲永)과 말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조헌영은 경북 영양 수비면 주실마을 사람으로 시인 조지훈(趙芝薰)의 부친이자 박준규(朴浚圭) 전 국회의장의 장인이다. 조헌영은 일본 와세다를 나와 8.15 후 제헌국회의원, 6.25 당시 국회부의장으로 납북됐다. 그는 북에서도 선비의 몸가짐을 간직하여 올곧게 처신하며 뜻밖에도 북한동의학 연구소에서 활약했노라고 한다.
조헌영은 일본 유학시절 영어학원에 다닌 애인 김제량이 폐결핵을 앓게 되자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여 그녀를 치료했다. 그러나 왜경의 잇단 고문으로 끝내 사망했다고 한다.
김정일과 성혜림의 밀월은 기껏 6년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투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김정일이 김영숙을 거쳐 고영희에게 몰두하자 성혜림은 우울증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다. 1974년 신병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지만 남편 김정일의 권력하에 놓인 평양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성혜림은 1982년 성혜랑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로 잠적했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가명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2002년 5월 사망하여 어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비석은 한글로 ‘성혜림의 묘’라고 적고 뒷면에는 ‘묘주 김정일’로 표기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그러니까 그녀는 북한 권력자의 부인이 아니라 한때 독재자가 가지고 놀다 버린 여인으로 먼 이국 모스크바에 묻혔으니 객사(客死) 귀신이 되고 말았다.

성혜랑과 외아들 이일남의 운명

▲ 1981년 촬영@중성동 15호 관저. 뒷뚝 왼쪽에 김정남의 가정교사 성혜랑(성혜림 언니), 가운데 성혜랑 딸 이남옥, 오른쪽에 피살된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본명:이일남)

언니 성혜랑은 아들 이일남과 함께 김정남의 초등학교 입학을 명분으로 1982년 제네바에 도착했다. 김정남은 제네바초등학교에 입학수속을 마쳤지만 한국대사가 동양계 학생을 보고 “고향이 어디에요”라고 묻자 “평양입네다”라고 응답한 후 금방 다른 학교로 전학했다고 한다.
이 무렵 성혜랑의 아들 이일남이 행방불명됐다. 스위스 경찰에 호소했지만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 무려 14년이 지나서야 이일남이 서울로 망명하여 ‘이한영’으로 개명하고 얼굴도 성형하여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딸 이남옥도 1992년 런던으로 탈출하여 성혜랑은 달랑 혼자 남은 신세였다. 얼마 뒤 그녀는 신변안전을 위해 모스크바를 탈출, 미국으로 망명했으니 부모와 자식 등 3대가 이산가족 신세로 풍비박산 된 것이다.
성혜랑은 모스크바로 귀환하여 행여나 아들, 딸 소식이 올까봐 이사도 않고 전화도 바꾸지 않고 기다렸다가 1995년 이일남(이한영)과 전화가 연결되어 아들이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이때 통화 내용이 녹음테이프로 기록되어 월간조선 우종찬 기자에게 넘어가 우리네가 들을 수 있었다. 문제는 대화록 속에 “아들을 찾아 한국으로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네가 듣기로는 너무나 당연한 대화이지만 정보당국에서 보면 긴급상황이다. 공산독재국가의 수뇌부와 관련된 인물이 적국으로 망명한다는 것은 반역죄로 절대 용서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정보당국은 서울에 살고 있는 성씨가 장남 성일기씨를 데리고 1995년 11월 15일 급히 모스크바를 방문, 성혜랑과 통화를 시도했다.
오빠 성일기씨는 여중생이던 성혜랑과 헤어진지 47년만에 처음 통화로 연결됐다. 이때 “아들 찾아 서울로 오겠다”는 통화내용이 신문보도(월간조선)로 공개될 경우 “사태가 심각해진다”고 일러줬다. 녹음테이프를 구입한 신문사가 “특종을 빨리 공개하겠다고 야단”이라고도 말해줬다.

김정일, 김정남 사생활 폭로후 암살

이에 성혜랑은 준비해야할 일이 많으니 “두 달만 참아 달라”고 호소했지만 “신문사가 안 된다고 야단쳐 정보부가 겨우 말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전해주었다. 이에 한 달 뒤에 보도하기로 합의하여 그 뒤 월간조선 보도를 통해 성혜랑의 육성을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곧이어 96년 2월 성혜랑이 모스크바를 탈출, 망명길에 오르자 한국언론이 이를 대서특필 했다.
이 사건으로 김정일의 분노가 폭발했을 것이다. 성혜랑의 외아들 이일남은 97년 2월 15일 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아파트에서 총 두발의 저격을 받고 숨졌으니 세습독재의 암살 독기임이 분명하다.
‘이한영 살해사건’으로 기록된 이 암살은 김정남의 지시를 받은 북한 노동당 비서국의 사회문화부장 이창선의 공작팀 소행으로 알려졌다. 이한영이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이란 폭로서 출간(1996년 동아일보)에 따른 보복으로 보인다. 이 책에 김정일과 그의 장남 김정남의 사생활이 폭로되고 온갖 권력남용도 지적되어 있다.
이한영 피살 후 부인 김종은 씨는 남편이 국가에 중대한 정보를 많이 제공한 특수한 신분인데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면서 명예회복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었다. 당시 이 책은 동아일보 출판부장 김대곤 씨가 대필했으며 뒤에 청와대 공보수석실 국내언론 담당관을 역임했다.
성씨가 4대 독자 성일기 씨는 여동생 성혜랑과 헤어진 후 그의 아들 이일남이 서울로 망명 와서 10년을 같은 하늘아래 살았지만 정보부와 모스크바에 동행할 때야 처음 알 수 있었다. 정보부가 빨치산 출신의 외삼촌이 서울에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구했기 때문이다.
창녕성씨 만석꾼 집안 외에 지식인과 예술인 집안의 월북 충성 그 뒤는 어찌됐을까. 빨치산 혈통의 통치, 지배이론의 김일성왕조 하에서 제대로 살아남았을까. 아마도 모두가 성혜랑 일가와 한 점 다를 것이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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