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相弼 전 상공부 차관보의 애국열정
부모, 3형제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탄핵정국 하에 촛불시위에 대응한 태극기 집회에는 각 군 출신 및 북한에서 38선을 넘어와 남한에서 정착한 분들의 열성적인 참여가 특징이었다. 특히 월남인들은 국내에서 정년을 마치고 해외로 나가 노후를 보내고 있다가 일시 귀국하여 태극기를 들고 나선 분들도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촛불시위 탄핵시국 하에 “종북좌파들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뒤흔드는 상황이 너무나 불안해서 뛰어나왔다”고들 말한다.

▲ 4월6일 오찬에서 조남홍 회장과 대화하는차상필 전 상공부 차관보(왼쪽). <사진=이코노미톡뉴스>

‘인민군 출신’ 차국장의 태극기 애국

함북 청진 출생으로 ‘인민군 출신’이란 과거를 지고 다닌 차상필(車相弼) 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전신) 차관보님을 태극기 집회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차 전 차관보는 필자가 상공부 출입기자일 때 ‘차 국장’으로 불린 호칭이 지금껏 이어져 태극기 집회서 만날 때도 ‘차 국장님’으로 불리었다.
차 국장은 6.25로 부모형제가 남북으로 갈라진 전형적인 이산가족이다. 아들 3형제 가운데 막내인 차 국장은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남침전쟁에 참가했다가 야간에 탈주하여 국군으로 편입되어 제대한 후 행정고시를 통해 고위 공직자가 되어 정년퇴직 했다. 차 국장은 공직 퇴임 후 어느 친목행사에 참여했다가 교통사고로 부인을 잃은 허탈한 심정으로 미국 LA로 이주했다가 다시 귀국하여 태극기 집회에 자주 참가하게 됐노라고 한다.
필자가 5.16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시절 상공부에서 만난 차 국장은 매우 날카로운 원칙과 소신의 외고집주의자였다. 아마도 인민군 출신이라는 삶과 죽음의 험한 계곡을 건너온 전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차 국장 스스로는 인민군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성가신 점도 없었고 인사상 불이익을 느낀 점도 없었다고 말한다.

▲ (2017년 4월 15일) 박 대통령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 <사진=이코노미톡뉴스DB>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진천전선서 탈주

지난 4월 6일, 상공부 출신으로 한국경영자총협회 상근부회장을 지낸 조남홍 회장과 차상필 전 차관보와 오찬을 나누면서 6.25와 차 국장 집안 관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차 국장은 청진 고급중학 2학년 때인 1950년 4월 1일 학교 강당에서 “인민군에 지원하라”는 선동연설이 있은 다음 군의관의 신체검사에서 콧병을 이유로 불합격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며칠 뒤 다시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은 징집연설 후 인민군 제2사단 17연대 공병소대에 편입되어 남침전쟁에 참전했다.
차 국장 부대는 6월 12일 원산을 출발하여 철원, 화천을 거쳐 38도선 접경지역에 도착, 대기하고 있다가 6월 24일 밤에 “내일 새벽에 큰일 난다”는 예고를 받고 새벽 4시쯤에 “남쪽 국방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침하여 반격을 개시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국군 측 전선은 무방비 상태였다.
차 국장 부대가 춘천지역 어느 계곡에 이르자 모처럼 국군의 저항이 나타났다. 나중에 듣고 보니 북한출신 반공청년들이 중심이 된 ‘백골부대’의 반격이었다. 중국 팔로군 출신의 인민군 부대도 이때 국군의 저항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6.25 초전에 인민군이 국군의 저항으로 전선이 지연된 것은 이곳 춘천전투가 유일했다.
차 국장 부대는 곧 국군의 저항선을 돌파하여 가평을 지나 한강을 도강하여 용인, 안성을 거쳐 충북 진천에서 국군과 접전했다. 이 시각 현재 이미 서울은 인민군이 점령하여 김일성천하로 변했었다. 그러나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 수십만 명이 봉기한다는 박헌영의 예언을 믿고 3일간 서울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 실책이었다.

김일성이 남조선 해방 호언할 때 탈주

차 국장 부대가 7월 11일 국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살길을 찾아 야간도주하기로 결심하고 인민군복장 그대로 탈주했다. 믿는 구석이라면 서울만 가면 대학에 다니는 큰형과 친척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또한 서울 장충동에는 함경북도 출신 대학생들의 공동기숙시설이 있다고 들었다.
청진해역에서 정어리 어업으로 성공한 설경동(薛卿東)씨 등 함북 출신 기업인들의 공동 출연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시설이었다. 설경동씨는 6.25 후 대한전선, 대한제당, 대한방직 등으로 크게 성공했다.
차 국장은 고대 법대에 다닌 친형의 이름을 팔아 이곳 기숙시설에서 인민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얼굴을 바꿔 회현동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 몸을 숨겼다. 그로부터 9.28 서울수복까지 은신했다가 10월에는 국군 정훈대대 모집공고를 보고 응모하여 강릉, 속초, 간성부대 등지로 전전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차 국장이 인민군에서 탈주한 시점이 국군은 정신없이 후퇴한 반면 인민군은 곧 부산까지 점령하여 ‘남조선 해방’을 이룩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시각이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결단이었다.
차 국장의 맏형은 고대 법대를 나와 국군장교로 임관되어 영관급까지 복무한 반면 둘째 형은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경제과를 나와 인민군 중위로 출전했다가 포로가 됐다. 나중에 포로교환으로 북한으로 돌아갔지만 그 뒤 생사여부는 알지 못한다. 셋째 아들인 차 국장은 인민군 전사로 끌려나왔다가 국군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의 고위 관리로 정년을 마쳤으니 3형제가 적과 우군 사이로 갈라진 것이다.

상공관료로 입문, 전사처럼 맹렬전진

차 국장은 군 복무를 마친 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여 행정고시를 통해 첫 보직으로 현역 소장 정래혁(丁來赫) 장군이 상공부 장관일 때 광전과(鑛電課)로부터 출발했다. 차 국장의 고시 동기는 고건 전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장관급 고위 공직자들이 수두룩한 것으로 꼽힌다.
이 당시 5.16 정부의 상공정책이란 ‘경제제1일주의’, ‘수출제1주의’로 ‘속전속결’이 큰 원칙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5.16 혁명공약이 곧 국정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상공정책은 불도저로 불린 이낙선(李洛善) 장관과 장예준(張禮準) 장관 등으로 이어지면서 “수출을 위해서는 모두가 미쳐야만 한다”는 행동철학이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이 같은 정책환경과 인민군 전사 출신으로 삶과 죽음의 계곡을 건너온 차상필 국장의 임전(臨戰)태세는 격이 잘 맞았다. 당시 상공부는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0년 수출 100억 달러 목표를 설정하고 ‘전 산업 수출산업화’, ‘전 세계 수출시장화’, ‘전 품목 수출상품화’를 독려했다. 이 같은 목표는 무모하고 불가능한 것으로 비판됐지만 결과는 3년이나 앞당겨 달성됐으니 상공부 관료들이 얼마나 수출을 위해 미쳐 뛰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차 국장은 이 시절을 거쳐 차관보로 승진하여 공직을 마친 후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등을 역임하고 출생 고향인 함북도지사도 지냈다.
차 국장은 공직시절 후회 없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회고하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을 꼽자면 1989년 남북경제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했던 일이라고 소개한다. 당시 금진호(琴震浩) 상공부 장관 시절 차상필 차관보가 남측 수석대표로 나타나자 북측에서 ‘반동분자 아니냐’는 소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북측 대표단에서는 차상필이면 6.25 때 전사했는데 “어찌 남측에서 살아 있다는 말이냐”고 야단이었다.
북측에서는 인민군에서 탈주를 인정할 수 없기에 도망자는 전사자로 처리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차 국장이 당당히 대한민국 고위 관료로 출세하여 남북경제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했는데 그들이 어찌할 수 있겠는가. 당시 5공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정부는 북측이 꼼수를 부려 쌀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하자 이를 덜컹 수용하여 그들을 오히려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어 남북경제회담도 우리 측이 사실상 주도권을 행사한 회담이었기에 차 수석에 대한 자격시비는 곧 없었던 일로 덮어지고 말았다.

▲ 97년 당시 임승택 사장, 노진식 전 상역국장, 차상필 국장, 대한석탄공사 이병길 총재.(왼쪽부터)

1998년 10.23 전직들의 끔직한 참변

차 국장과 함께 상공부와 동력자원부 시절을 열심히 뛴 전직 일행이 1998년 10월 23일, 영동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무더기 참변을 당했다. 대부분 부부가 함께 참변을 당했지만 참여 일행 가운데 차상필 차관보와 김종학 전 중소기업국장 두 분은 부인만 사망하고 본인들은 살아남아 그때 그 참담한 사고를 증언한다.
당시 전직들은 재직시절 교분을 쌓은 경동탄광 측의 초청으로 버스 편에 합승해 가다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반공소년 이승복기념관 부근 지점에서 마주오던 동부고속버스와 정면충돌로 대형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날 사고로 박필수(朴弼秀) 전 상공부 장관 부부, 유각종(劉珏鍾) 전 동자부 차관 부부, 노진식(盧鎭植) 전 상역국장 부부가 함께 사망했고 차상필 전 차관보, 김종학 전 국장은 같은 버스에 동승했지만 부인만 사망했다. 또 대한석탄공사 이병길(李丙吉) 총재는 국정감사 출석 때문에 참석 못하여 부인만 먼저 떠나보내고 말았다.
또 이들 상공, 동자부 전직들을 초청한 경동탄광 사장 부부도 함께 사망했고 버스 운전사도 사망했다. 동부고속버스 승객도 2명이 사망했다.
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분들의 빈소가 현대아산의료원과 삼성의료원에 마련되어 수출드라이브와 오일쇼크 시절 고락을 같이 한 관계, 업계 관계자 및 언론계 인사들도 무더기로 조문했었다.
이때 부인을 잃은 차 국장은 한때 넋을 잃고 지내다가 LA로 이주했다가 다시 귀국하여 노후를 끝내 대한민국에 바치겠다는 각오이다. 차 국장은 아들이 고대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출가한 딸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본인은 공무원연금만으로 노후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자족감(自足感)으로 종북좌파들을 척결하기 위한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마지막 사명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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