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회가 어려운 내용증명 답변

[이코노미톡뉴스=고윤기 변호사] #어느 날 저녁, 친한 동네 변호사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한 변호사가 괴로워하며 말한다. “의뢰인이 내용증명 잘못 보냈다가, 소송 망쳤네. 완전 자백을 했어! 자백을!” “그리고 자기가 보낸 내용증명을 까맣게 잊고 있더라고, 나도 상대방이 낸 서면을 보고 알았어!”.
그러자 다른 변호사 하나가 ‘내용증명 무용론’을 펼친다. “그거 안하느니만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도대체 그걸 왜 보내는지 모르겠어!” 또 다른 변호사 하나가 열변을 토한다. “제발 나에게 사건을 가지고 올 때는 백지 상태에서 가지고 오면 좋겠어. 어디서 작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된 답변서를 만들어 제출하고 나서 나한테 사건을 의뢰하러 온다니까!”

“내용증명, 꼭 대응을 해야 하나요?”

변호사들에게 상당히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다. 답은 간단하다. ‘내용증명에는 꼭 답변을 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답변을 할 때에는 신중히 해야 한다’ 이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자신 없으면 내용증명에 답변을 하지 말라!”이다. 보통 사람들은 내용증명 우편을 등기로 받은 경우, 상당히 불안해하며 내용에 관계없이 꼭 답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내용증명에 대한 답변으로 소위 소송의 주요 쟁점에 대해 ‘자백’을 하는 내용을 발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용증명은 보통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바랍니다” 등의 호의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그런데 말미에는 “이에 상응한 법적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O월 O시까지 답변주시기 바랍니다” 등의 살벌한 문구로 끝난다. 내용증명을 처음 받아보면, 처음에는 불안하다가 나중에는 화가 난다고 한다. 말로해도 될 것을 서류를 보냈다는 점에 먼저 분노하고, 그 다음으로는 이 내용증명의 법적 효력이 어떻게 되는가를 궁금해 하고 불안해한다.

내용증명, 함부로 답변 하지 말라

내게도 안타까운 의뢰인이 있다. 아니 그런 의뢰인이 많이 있다. 소송은 어차피 누가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증명할 책임이 있는지’가 상당히 중요하다. 순간적인 분노에 이끌려, 상대방에게 증명책임이 있는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증명을 발송해서 유리한 소송구도를 불리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순리에 따라 해결되었을 사건인데, 내용증명에 대한 답변을 잘못 보내어 자신의 과실을 인정해 버린 의뢰인들이 내게 억울하다고 하소연 하고는 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민사소송법 교과서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원고가 피고에게 빌려준 돈을 갚을 것을 청구한 경우 피고는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까? 돈을 빌려준 증거도 없고, 갚은 증거도 찾을 수 없다고 가정해보자. 피고가 빌린 사실이 없다고 답변한 경우와 빌린 돈을 다 갚았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소송의 진행이 전혀 달라진다. 피고가 돈을 빌린 사실이 없다고 답변한 경우, 원고는 차용증과 영수증, 계좌이체 내역 등을 증거로 제출하여 자신이 돈을 빌려주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반면에 피고가 갚았다고 답변한 경우라면, 피고의 답변 속에는 자신이 돈을 빌린 사실은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피고가 오히려 영수증, 입금증 등을 증거로 제출하면서 자신이 돈을 모두 갚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위 사건에서는 원고도 돈을 빌려 주었다고 증명할 수 없고, 피고도 갚았다는 점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때 피고의 답변에 따라 소송의 승패가 뒤 바뀐다. 피고가 ‘빌린 사실이 없다,’라고 하면, 다른 조건이 없는 한 피고가 승소한다. 그런데 피고가 ‘돈을 갚았다.’고 하면 피고는 패소할 것이다. 물론 이 사례는 교과서에 나오는 극단적인 사례다. 하지만, 민사소송은 이 사례의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원하는 답변을 내용증명 통해 받는

나도 변호사다. 그래서 증거가 없는 사건에서 합법적인 범위에서 증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우리 편이 증명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상대편에게 내용증명으로 살짝 던져본다. 상대방이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되는 답변서를 보내온다. 답변서를 보니, “미끼를 물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이 나의 의도대로 내용증명에 답을 보내왔다. 내가 법정에서 증명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먼저 인정하고 들어온다. 그것도 내용증명 우편으로. 이런 상황을 법률용어로 ‘자백’했다는 말을 쓴다. 꼭 내용증명이 아니더라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편에 유리한 답변을 이끌어 내는 소송 기술이 사용되고 있다.
변호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절, 상대방 변호사로부터 ‘어이가 없는 내용’의 서면을 받은 적이 있다. 상대방 변호사는 나보다 훨씬 개업한지 오래된 변호사였다. 나는 상대방 변호사가 직접 서면을 쓰지 않고, 직원을 시켜서 서면을 썼다고 확신했다. 우리 의뢰인은 서면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리고 마치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나도 의뢰인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같이 날뛰었다. 그런데 소송을 진행하다보니, 상대방 변호사는 여우였다. 상대방은 아주 노련했고, 그 ‘어이없는’ 서면도 의도된 전략이었다. 그 과정에서 의뢰인은 법정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고, 그 내용은 변론조서에 기록되었다. 그 결과 나는 소송 내내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서 고전했다. 그 이후 크게 반성했고, 나에게도 시간이 쌓여갈 수록 상대방이 원하는 답변을 얻어내는 기술은 늘어가고 있다.

답변 후에는 철회가 어렵다

답변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가는 행정청의 질의 회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행정청의 회신문은 대체로 명백한 사안이 아닌 한, 아주 간곡한 문구로 사안의 핵심을 피해나간다. 행정 소송 시에 행정청의 회신은 대부분이 증거자료로 제출되기 때문에, 법률분쟁에서 행정청이 자신들이 불리한 점을 인식하였다면 답변을 보낼 때 상당히 신중한 것이 보통이다.
소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송에서 피고가 소장을 받은 경우 30일 내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만일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패소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소장을 받고 나서, 급한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이런 저런 내용을 담아 답변서를 발송하는 경우가 있다.
입에서 나온 말을 주워 담기 어렵듯이, 일단 답변을 하고 나면 이를 철회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솔직히 아예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한다. 그런데 본인이 법률지식이 많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꼭 사고를 친다. 본인이 아무리 법률적인 지식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이런 비상사태가 발생한 경우 법률전문가의 조언을 한번 쯤 받아 보는 것이 좋다. 아주 간단한 상담만으로도 큰 사고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고윤기

-고윤기 변호사는 사법시험(사법연수원 39기)을 합격한 연세대 출신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 기획, 인권이사를 역임했다. 서울동부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회 위원과 서울시 소비자정책위원 등 다양한 공적 활동을 겸하고 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