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영원한 키다리아저씨일 수 없다

▲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이코노미톡뉴스=이진곤 칼럼] ‘안보’가 주요 대선 이슈로 대두됐다고 해서 말이지만 대한민국은 생존을 위한 노력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절박하게 기울여 왔느냐는 물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북한 핵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은 이미 60년대 초부터 적극적으로 핵개발 의지를 표명하면서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시켰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북한의 핵개발은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북관계의 개선에만 신경을 썼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에겐 경제적 부흥이 가장 절박하면서도 무엇보다 우선되는 과제였기 때문이다. 건국 때부터 자유민주체제를 표방했던 대한민국의 정부로서는 민생의 안정과 경제성장이야 말로 그 존재의 이유이고 존립의 의의 일 것이었다. 이에 비해 북한은 체제적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는 주민들에게 어떤 희생도 강요할 수 있는 사교적(邪敎的) 정치적 집단이었다.

우리 측의 한반도 정세 안정 및 평화 유지 열망이 북한의 교활한 기만전술과 맞물림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개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격이 되었다. 특히 우리 쪽에서는 87년의 ‘6·29선언’을 기점으로 정치민주화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동시에 평화적 민족통일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열망도 들끓었다. 이를 거스른다는 것은 곧 ‘반민족분자’가 된다는 뜻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면서 우리는 1990년 9월부터 북한과 고위급회담을 시작했다. 양측은 이듬해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남북 간의 기본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합의서는 92년 2월 19일 제6차 회담을 통해 발효됐다.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채택됐다. 그리고 남북의 총리들은 이 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남북 핵통제 공동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92년 3월 18일 채택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남한에 배치돼 있던 전술핵무기들을 철수했다. 92년 9월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세계 여러 지역에 배치한 각종 전술핵무기를 철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2일, 그는 미국 영토 밖에 있던 모든 지상 및 해상배치 전술핵무기의 철수를 완료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그달 6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남한 내 핵무기의 철거를 끈질기게 요구해온 우리로서는 환영한다”며 “미국의 선언(전술핵철수)은 한반도의 비핵화,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 간의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로써 미국 전술핵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북한은 이에 앞서 85년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에 가입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듬해부터 평안북도 영변에 핵발전소를 지어 가동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ssociation)은 임시핵사찰에 이어 특별핵사찰(93년 2월 11일)을 결정했고, 북한은 이에 반발해서 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측은 이해 6월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에 따라 이 결정을 유보했었으나 2003년 1월 다시 탈퇴선언을 들고 나섰다.

북한의 이 같은 교활한 책략과 무모한 핵개발에 대해 미국은 94년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 북한이 이해 5월 IAEA 특별핵사찰을 거부하면서 핵연료봉 교체를 강행하자 유엔 안보리는 6월 대북 제재 논의에 착수했고 북한은 IAEA 탈퇴를 선언했다. 그달 14일 미국은 장관급 회의를 열고 영변 폭격 방안을 논의했다. 그 방안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영변 재처리 시설만 공격하는 방안 둘째, 재처리 시설과 함께 5메가와트 원자로 등 영변의 다른 핵시설도 공격하는 방안 셋째, 영변의 모든 핵시설과 북한의 주요 군사시설을 함께 파괴하는 방안이었다.

제임스 레이니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그 이틀 후, 그러니까 16일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미국 시민들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겠다고 통고했다. 이를 보고받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은 레이니 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강력하게 항의했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는 없으며,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뜻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어떤 이유에서 였든 미국은 북폭을 포기했다.

그런데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2008년 4월 29일자 주한 미대사관 전문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 대사와 만나 오찬을 함께 하면서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을 말린 것이 후회된다고 밝혔다. 그는 “클린턴 행정부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1994년 북한 영변의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원했는데 내가 그걸 말렸다”면서 “돌이켜 보건대 폭격을 허락했으면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 전문은 밝혔다.

미국과 북한 간의 핵 갈등은 이해 10월의 ‘제네바합의’로 일단락된 듯이 보였다. 양측은 9월 23일에서 10월 17일까지 열린 3단계 고위급회담 2차 회의에서 합의문을 이끌어 냈고 21일 서명절차를 마쳤다. 이 합의문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개발 동결대가로 1,000MWe급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대체에너지로 연간 중유 연 50만t을 제공하기로 하였으며,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완전 복귀와 모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허용, 핵 활동의 전면 동결 및 기존 핵시설의 궁극적인 해체를 약속했다.

이에 따라 1995년 3월 9일 북한에 경수형원자로 제공을 위한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설립하였고, 2000년에는 그 착공에 들어갔다. 그런데 2001년 뉴욕에서 9·11테러가 터졌다. 이를 계기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3대 테러국가로 지목하자, 북한은 제네바합의에서 금지하기로 약속한 흑연감속로를 가동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결국 미국은 제네바합의의 파기를 선언했고, 2002년 11월 KEDO 집행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중유 지원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후 북한 핵문제는 ‘북한 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의 비핵화(非核化) 실현을 위한 다자(多者) 회담’, 이른바 ‘6자회담’의 테이블에 올려졌다. 2003년 8월 27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제1차 회담이 열린 이래 2007년 9월의 제6차 2단계 회담, 그리고 2009년 12월의 수석대표회의까지 끌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표류상태에 빠졌다. 북한이 핵 및 미사일 개발과 실험을 하는 등 회담의 의의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후에도 오불관언,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계속해 왔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해군의 천안함을 폭침시키고(2010년 3월 26일), 연평도에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동년 11월 23일)가 하면 DMZ에서 목함지뢰 폭발사건(15년 8월 4일)을 저지르는 등 군사적 도발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북한은 미국의 대통령선거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6년 9월 9일 다섯 번째 핵실험을 한데 이어 다양한 미사일 발사 실험 위협을 빈번하게 가함으로써 미국을 자극해 왔다. 미국에 강경 보수파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했음에도 북한은 당랑의 도끼를 과시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무모한 군사적 모험주의 집단의 끊임없는 도발과 조롱에 대해 미국은 마침내 ‘전략적 인내’를 포기하고 ‘최고의 압박과 개입’을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트럼프는 이처럼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는 한편 중국에 대해서도 압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든가 아니면 미국의 경제적 압박을 감수하든가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한반도 및 주변 정세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지의 여부는 한반도 주변 열강, 특히 미국과 중국의 의도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중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국과 사이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우리의 안보상황은 급속히 악화될 수밖에 없다. 군사적이건 경제적이건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중국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중국보다 월등한 힘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지 않는 것은 우리와 군사동맹국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틀이 벗겨지면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초강대국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될 게 뻔하다.

미국이 언제까지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보호자 후견국 역할을 하려 하지 않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에는 ‘한국과 함께’(with Korea)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미국에게 우리는 세계의 모든 나라와 같은 ‘외국’이면서도 우선순위에서 다소 앞서는 ‘군사동맹국’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드배치와 관련, “우리가 왜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는데, 그 말은 미국인들도 똑 같이 할 수가 있다.

우리에겐 이제 좌고우면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물론 모든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상지상책(上之上策)이다. 그런데 우리 처지에서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우리가 미국, 중국, 그리고 북한까지도 만족시킬 만한 대안을 만들어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적으로는 굳건한 토대부터 마련하고 그 위에서 활발하고 지혜로운 외교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게 상책이다. 그 토대를 한미동맹 강화에 둘 것인지, 중국과의 유대강화에 둘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요구에 굴복하는 데 둘 것인지를 다음 정부는 결정해야 한다.
특히 국가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경구가 있다.
“국가는 자살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쇠망하지 않는다.”(R.W.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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