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전 대통령.

[이코노미톡뉴스=김광모 칼럼] 필자에게 작년만 해도 매스컴과 인터뷰를 제법 많이 했다. 금년 들어 탄핵 난리 통 이후 지난 3월 중순 이후 처음으로 모 종편방송과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 요청도 급하게 들어왔고 사전 질의서도 없었다. 대담은 프리 토킹으로 진행 되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손수 챙기시고 청와대 경제2 비서실에서 필지가 실무자로 직접 담당했던 중화학공업, 방위산업, 행정수도건설과 원자핵 개발 등을 주로 화제로 삼았다.

가장관심, 박정희의 핵개발 시도

이 중 방송기자의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이 박정희의 핵개발 시도였다. 이것은 요 근래 일본의 NHK와 경제지 경제풍월에 공개한 바 있으므로 자유롭게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P기자는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영도자이긴 하지만 그 당시의 시대상으로 봐서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다른 인물이 나왔어도 할 수 있었다는 가당찮은 얘기가 나왔다. 이런 얘기를 전에도 인터뷰 기자들과 한 적이 있으나 요 근래까지 박정희 대통령을 폄하하는 말을 듣게 되어서 대단히 불쾌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고 그 시대에 맞는 영웅을 탄생시킴은 당연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이 한반도에 나라를 세운이래, 한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을 받는다. 그는 60~70년대에 18년 6개월간 대한민국을 선진조국 건설의 토대를 만든 지도자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제일 잘사는 국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건설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 영웅이 아무나 될 수 있다면 국내적으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제독이 아무나 될 수 있단 말이냐? 국제적으로 처칠이나 루즈벨트는 2차 대전이 낳은 영웅이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 쿠바의 카스트로나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그들의 장기집권 이후 무엇을 남겼는가? 그들은 그들의 장기 독재 집권 기간 중 자기 자신의 치부와 영화를 누리고 국민에게는 기근과 좌절을 남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6개월의 통치기간 중 그의 혜안과 비전 있는 통치로 조국의 근대화를 남겼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한민국을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오로지 국가로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그의 통치 철학적 견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항목별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글은 인터뷰시의 내 대담을 참고하여 보완한 것이다.
필자는 박 대통령의 집권 기간 중 1969. 11월에서 1979. 10월 서거 시 까지 8년간을 박 대통령의 중점사업인 중화학공업, 방위산업, 인력양성, 연구개발과 원자핵개발의 추진 기잔 중 청와대에서 실무자로 박 대통령과 같이 호흡을 하면서 박 대통령의 통치 철학 추진에 일조가 되도록 실무자로 근무했다.
이제 박정희 시대 일꾼들은 다 물러갔다. 그 2세 학자들이 박정희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고 있고 학설을 내놓고 있음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박정희 통치기간 중 실무자의 입장에서 경험을 토대로 박정희의 통치철학을 항목별로 나열해 보기로 하겠다.

▲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기공식에서 기공 버튼을 누르는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왼쪽부터). <사진=포스코>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철학

첫째로,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
박정희 장군이 1961년에 5.16 혁명을 일으켰을 때 상공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좌익성 데모 때문에 진저리가 나있던 필자는 이번에는 군대마저 좌익성 혁명을 일으키는 구나 생각하고 모든 걸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공약 1, 2호로 자유 민주주의 정권을 유지한다고 국내외에 선포하고 공약 4호로 국민들을 기근에서 해방시킨다고 했다.
계엄군은 정부 각 기관을 무혈점령하여 부패를 척결하고 행정조직을 미국에서 도입한 군대식으로 바꾸었다. 예를 들어 이때 생긴 것 중의 하나가 브리핑 차트였다. 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작성하여 실시에 들어갔다. 관주도의 계획으로 실천은 민간에 맡겼다. 쇄신된 공무원 조직이 솔선수범하여 추진하니 민간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Can-Do-Sprit 정신으로 무장하여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결과적으로 위대한 지도자를 정점으로 국민총화로 1, 2차 5개년 계획을 성공시켜 국민을 기근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박정희의 일호 약속인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다는 혁명공약을 지켰다.
박정희는 매년 기자회견을 하고 각 부처별 업무보고를 받는다. 기자회견에서는 지난해의 실적을 보고하고 그 해의 계획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계획에 대해 약속을 지켰으며 만약 국내외적 환경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국민의 양해를 구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의 업적인 중화학의 경우는 81년 기준 수출 100억불 1인당 GNP 1천불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결과는 수출 100억불 달성은 77년도에 달성하여 3년이나 조기 성취하였으며 목년도인 81년에는 정부의 최초의 목표금액 53억불보다 3배 이상인 173억불을 달성하여 경제개발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세계 역사상 이러한 경제 개발에 있어서 조기나 초과 달성한 지도자는 박대통령 밖에 없다.
둘째로 박정희대통령의 근면성이다.
경제개발에 대한 대국민 약속을 지키게 된 배경은 그의 부지런함에 있다. 박정희 시절 정부의 거국적인 보고회가 두 개 있었다. 그 하나가 EPB주관의 경제동향보고이고 다른 하나가 상공부 주관의 수출확대회의였다. 그는 이 회의에 반드시 참석하여 주재하였다. 수출확대회의의 경우 15년간 135회가 개최되었는데 박 대통령이 참석 못한 것이 단 2회 이었는데 한번은 육영수 여사 서거와 관련된 것이 이유였다. 경제2에서 주관하는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추진회의가 있었다. 대통령 참석불가 시는 회의자체가 개최되지 않았으며 중화학의 경우는 행정조직법상 총리가 위원장이 되어 주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박 대통령이 주재했다.
경제2에서 건의하는 공장의 기공식이나 준공식에 반드시 참석하셨고 휘호를 써주셨으며 건의사항을 들어 주셨다. 하계휴가 때에는 창원기계공단과 공고 교육시설을 기능 인력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셋째로 박정희는 공부하는 대통령이었다.
그가 국정에 대한 비전과 혜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독서력에 기인한다. 신문사설을 모두 읽으셨고 부속실에서 스크랩해서 올리는 기사 모두 다 읽었다.
기념재단에 전시된 정부예산서에 깨알같이 검토 의견을 써 놓은 것을 보면 얼마나 국정에 힘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오원철 수석이 박 대통령 서재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 책상 위에 경제2비서실 작성의 ‘2000년대의 국토구상’과 ‘임시행정수도건설’이라는 책자가 놓여 있더라는 얘기는 유명하다.
박 대통령 이 직접 집필한 저서도 많다. 혁명의 역사적 사명을 기술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저서는 유명하다. 청와대에 특별 보좌관 실을 만들어 언제나 야당의 목소리를 들었다.
넷째, 박정희의 통치철학은 가장 현실적이었다.
하기 불가능 한 것을 하겠다고 그러지 않았다.
일례로 국가의 안보정책을 살펴보자. 이승만 정권은 힘도 없으면서 신탁정치 반대와 북진 통일을 외치면서 김일성의 남침으로 망했다. 박정희 장군이 혁명 직후 안보를 생각했으나 안보를 할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60년대 박정희는 한미방위조약에 의거 나라의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선 건설 후 국방의 슬로건 아래 경제 건설에만 몰두하였다. 70년대에 들어오자 국내외 정세가 우리 자체의 국방 능력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방위산업의 육성이었다. 우리의 국력도 방위산업을 육성할 수 있을 만큼 발달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산무기를 생산하여 전력화 할 수 있게 되었고 수출 업종으로 각광 받고 있다.
다섯째, 박정희는 자신이 책임지는 정치를 했다.
내각에서 추진을 힘들어 하거나 반대의 목소리가 들릴 경우이거나 비밀을 요하는 경우의 정책이나 프로젝트는 박 대통령이 직접 책임지고 수행하는 소위 친정정책으로 추진하였다. 70년대 경제2 비서실에서 담당 추진한 중화학공업, 방위산업, 인력개발, 연구개발, 원자핵개발 등의 정책 사업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 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 기획단 부단장

여섯째, 박정희는 다방면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박정희 기념관에 그 내용이 상세하게 전시 되어있다. UNESCO에 등재되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새마을 사업을 비롯하여 고속도로건설, 전원개발, 산림녹화, 농어촌개발, 문화 창달 등은 그의 불멸의 업적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청렴결백이 몸에 배인 사람이었다.
그가 만약 치부를 했다면 그는 무바라크나 카다피 같은 비난 받을 독재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박정희 기념재단 유품전시실에 가보면 대통령으로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박정희나 대통령으로서 박정희 어느 면으로 보나 그는 위대한 통치자임에 틀림없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와 같은 불출의 영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제대국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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