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龍煥 전 재무부장관, 85세 타계
정계진출, 4선의원, DJP연합 성사

▲ 김용환 제25대 재무부 장관 시절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박정희 경제개발시대 ‘경제두뇌’로 뛰어난 역할을 담당했던 김용환(金龍煥) 전 재무부 장관이 지난 7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은 경제 각료로서 눈부신 족적을 남겼지만 정계에 진출하여 4선(選)의원 경력을 쌓고 김대중, 김종필의 DJP연합 협상을 이끌어 낸 주역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비밀특명… 8.3 사채동결

김 전 장관은 충남 보령 출신으로 서울대 법과대학 재학 중에 고시 행정과에 합격, 경제 관료로 출발하여 새파란 나이(34세)에 국고(國庫)를 움직이는 재무부 이재국장(理財局長)으로 발탁될 만큼 뛰어났다. 그 뒤 농림부 농정차관보를 거쳐 대통령 비서실 외자담당 비서관으로 옮겨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 특명으로 ‘8.3 사채동결’이라는 긴급명령안을 만들어 기업을 옥죄고 있던 고리사채를 전면 동결시켰다.
당시 기록들에 따르면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비밀 작업을 사전에 보고 받고 알고 있던 분은 남덕우(南悳祐) 재무부 장관과 김영선(金永善) 통일부 장관(민주당 정부의 재무부 장관 출신) 등 딱 두 사람뿐이었다.
이토록 긴급하고 중대한 밀명을 받은 김 비서관은 전문요원 6명을 선발하고 뉴남산관광호텔에 사무실을 준비하여 ‘경주종합개발계획’ 사무소란 위장 간판을 내세웠다. 요원들은 모두 엄중한 비밀유지 서약서에 서명하고 가족들에게도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당시 사채동결 문제는 전경련 김용완(金容完)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하여 “고리사채 때문에 기업들이 다 죽게 됐다”고 직소한 현안이었다.

▲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재무부 초도시찰 하는 가운데 김용환 장관(오른쪽에서 3번째)과 이동중이다. <사진=국가기록원>

가족, 친인척 ‘위장사채’에 대통령 대노

사채정리방안에 관해 전문가들의 주장이 두 갈래로 나눠져 있었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경제과학심의회의 천병규(千炳圭), 주원(朱源) 위원 등은 사채를 제도권 금용으로 유인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위원들은 나중에 장관으로 입각한 유명한 이코노미스트들이었다.
반면에 당시 경제이론가로 언론에 자주 등장한 박희범(朴喜範), 이기준(李基俊) 교수, 송방용(宋邦鏞) 의원 등은 사채를 동결시켜 기업들의 숨통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김용환 비서관팀의 작업결과를 보고 받고 사채동결 긴급명령을 발동했다. 당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기가 불황국면에 진입하고 부실기업 정리문제가 매우 심각했지만 금융시장은 제도권 보다 암시장(暗市場)이 좌지우지 하는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은 기업을 살리기 위한 명분으로 ‘반시장적’ 사채동결 조치를 결단한 것이다. 결과는 기업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으로 나타났으니 성공적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사채를 빌려준 채권자 신고는 21만 905건, 금액으로는 3,571억 원, 사채를 쓰고 있는 채무기업 신고는 4만 677건에 금액으로는 3,456억 원이었다. 사채규모는 300만 원 이하 소액이 건수의 90%를 차지했지만 금액으로는 32%에 지나지 않았다. 300만 원 이상 사채는 10% 남짓했다.
문제는 가족이나 친·인척 명의의 ‘위장사채’가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137억이었다. 이중에는 정부의 정책금융 지원을 받은 기업도 포함되어 박 대통령이 대노했다는 소식이다. 대통령은 위장사채를 몽땅 출자전환으로 바꾸도록 지시하고 위장사채 규모가 1억 원이 넘는 10여개 기업에 대해서는 앞으로 모든 정책지원에서 배제시키도록 명령했다.
이 같은 8.3 조치가 고리사채를 제도권으로 양성화 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덕우, 김용환 경제팀의 큰 족적

8.3 조치 비밀작업을 맡은 김 비서관은 곧이어 상공부 차관, 재무부 차관을 거쳐 남덕우 경제부총리, 김용환 재무부 장관 콤비를 이뤄 기업공개, 중산층 재산형성, 부가가치세 도입 등 세제개혁으로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화를 적극 뒷받침했다.
청와대에서 상공부 차관으로 부임했을 때 마치 박정희 경제 사관생도 출신처럼 말끝마다 “대통령께서는…”이라고 추앙하면서도 실제 기사가 될 만한 내용은 한마디도 들려주지 않았다. 당시 상공부 출입기자들이 “너무 짜게 행세한다”고 비판하자 “바닷가(보령)에서 자라 소금끼가 배어있다”는 농으로 응수했던 기억이다.
재무부 장관시절 정치권에서 큰 논란을 빚은 부가가치세 도입을 관철시킨 후 1978년 12월 제 10대 총선에서 공화당이 득표율에서 야당보다 1.1%나 뒤지고 말았다. 이에 대한 인책 개각에서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부총리, 김용환 재무부 장관, 장덕진 농수산부 장관 등이 경질됐다.
김 장관이 야인으로 돌아간 뒤에도 박 대통령이 신임을 보여줬다. 10.26 국변이 나기 몇 달 전, 김 전 장관이 미국 연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 호출하여 “경제도, 정치도 어렵다”는 박 대통령의 고심을 듣고 “미국 다녀와서 연말께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결국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김 전 장관은 그 뒤 1988년 13대 총선 때 보령에서 출마하여 4선을 기록했다. JP가 자민련을 창당할 때 참여하여 제 2인자로서 제 3당의 입지를 구축하는 정치적 수완도 보여줬다. 정치인으로서 김 전 장관은 소신과 신념이 투철하여 종종 JP와 대립하는 모습도 보여줬지만 김대중, 김종필의 DJP연합 협상을 성공시켜 DJ 집권에도 기여했다. 그렇지만 고인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정계에서 4선 의원 경륜보다 박정희 경제개발시대 경제 각료로서 큰 역할이 더욱 돋보이는 기록으로 평가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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