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출에서 장소팔, 고춘자까지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대한민국이 우울할 때 마음 놓고 웃을 일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세상을 즐겁게 웃긴 ‘만담(漫談) 100년사’라는 책을 청계천 중고서적집에서 발견했다. ‘신불출(申不出)에서 장소팔(張笑八)과 고춘자(高春子)까지’라는 부제가 우리나라 만담 100년사를 대표한다는 뜻이다. (백중당, 2000.7 반재식 편저)

천재만담 신불출의 태극기 모독

1935년 1월 매일신보 신년 특집호에 각계 1인자 39명을 선정, 보도했다. 무용 최승희, 판소리 이화중선, 여배우 김영실, 바둑 정규춘, 명화해설 김조성, 야구 이영민, 권투 서정권, 만담계 신불출 등.
그러나 솔직히 일제 강점기와 8.15 해방공간을 체험한 세대라 해도 다들 기억할 수는 없고 신불출만은 만담의 천재, 시대의 영웅처럼 기억하게 된다.
신불출은 개성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 유학으로 학자풍의 면모에 화술과 목소리가 뛰어나고 동서양 명시들을 줄줄 외우는 박식다재로 인기를 더했다. 이 책 속에 신불출이 윤백단과 콤비로 오케 레코드에 취입시켜 놓은 ‘익살맞은 대머리’ 대사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암울한 일제가 끝나고 조국이 해방됐을 때 신불출은 가슴에 숨겨 놓은 이념의 편향을 드러내다 군중들의 호통으로 쫓겨나 북한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1946년 6월 11일, 6.10 만세사건 기념 공연에 출연한 신불출이 대한민국 태극기를 모독, 희롱한 사건을 저질렀다. “태극기의 사괘(四卦)는 4대 강국(미·영·중·소) 감시 하에 놓인 한국의 신세를 말해주고 중앙의 태극문양은 상부의 적색, 하부의 감색구조이나 비바람이 불어 태극기가 물에 젖으면 상부의 붉은색이 녹아내려 하부의 감색까지 붉그스레하게 물들이게 된다. 이는 곧 현재의 3.8선도 세월이 가면 남한마저 붉은색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운명처럼 예측된다.”
신불출이 아무리 인기가 높다 해도 해방 조국의 상징인 태극기에다 붉은 이념을 덮어씌우려 했으니 관중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다. 순식간에 야유와 팔매질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곧 구속 재판을 받아 벌금 2만 원을 물고 겨우 석방됐다. 그 뒤 1948년 월북하여 김일성에게 충성하여 문학예술 총동맹 중앙위원, ‘노력훈장’ 수훈, 만담연구소장(1961.9), 중앙방송위원회 소속 만담가 등으로 살았다. 그는 남한에 있을 때 명월관 기생 출신 손홍란과 동거하여 딸, 아들 하나씩을 낳고 월북 후 다시 재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손일평, 김원호의 뚱뚱이와 홀쭉이

▲ 신불출의 전성기는 곧 한국 만담의 전성기. 1930년대 초반,오케 레코드 가사지에 실려 있는 신불출의 모습.

일제시절 뚱뚱이와 홀쭉이 콤비로 인기를 누린 만담가는 손일평(孫一平)과 김원호(金元浩)였다. 최근의 우리네가 기억하는 양훈, 양석천의 뚱뚱이와 홀쭉이는 그들의 2세대라고 볼 수 있다.
손일평, 김원호 콤비는 만소좌(萬笑座)라는 극단을 창립, 전국 순회공연으로 인기를 집중시켰다가 1940년 김원호가 공연준비 중 지병으로 사망하자 2대 홀쭉이로 전방일(全邦一)이 대역을 맡았다. 6.25 때 피난을 못가 인민군들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된 사실은 확인됐지만 그 뒤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라디오 시대와 TV 시대까지 코미디 배우로 인기였던 복혜숙(卜惠淑)은 1904년 충남 보령 출생으로 본명 복마리. 연극, 영화, 방송을 누비다가 1982년 78세로 떠났다. ‘미국의 소리’ 방송 VOA 아나운서 황재경(黃材景)도 만담가 반열에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 목사로 영어가 능통하여 VOA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1936년 2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기변재담’(奇辯才談) 프로그램에 만담은 황재경 담당이었다.
무성영화시대 인기 최고의 변사는 단성사 소속의 김영환(金永煥)으로 진주 태생의 기녀(妓女)의 자식이란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조금 뒤 작곡가로 변신하여 예명 김서정으로 ‘낙화유수’, ‘강남제비’ 등을 작곡했고 만담에도 재능을 보여 김선초와 대담만담을 취입했다.

▲ 신불출을 일약 만담 스타로 올려 놓은 오케 레코드의 최초 광고. 유명한 ‘ 익살맞은 대머리’ 를 위주로 선전하고 있다. <조선일보> 1933년 2월 2일

부부만담 왕평·나품심, 8방미인 윤백남

부부 만담가로는 왕평(王平)과 나품심(羅品心)으로 부인이 먼저 만담계로 진출하고 남편이 동참한 사례이다. 남편 왕평은 극작가, 연출가, 배우, 작가 등 당대의 수퍼스타로 꼽혔다. ‘황성옛터’의 작사자, 눈물의 여왕으로 불린 전옥과 취입한 ‘항구의 일야’가 전해온다.
윤백남(尹白南) 만담가도 팔방미인 격, 극영화 시나리오 작가에 연극까지 진출했고 레코드 만담 취입, 월간지에 만담 기고, 야담(野談)대회 개최 등 다능다재 활동하다 1934년에는 월간 야담을 창간하여 널리 보급했다.
여류 만감가로는 신불출의 제자인 김윤심(金允心)을 꼽는다. 신불출이 이은관과 함께 공연단을 조직 활약할 때 김윤심은 이은관의 배뱅이굿 타령에 이어 ‘1인 만담’으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녀는 황해도 태생으로 평양 숭혜여학교를 나와 유치원 보모를 시작으로 극단 가수가 여류 만담가로 변신하여 남한 일대를 순회 공연했다. 그녀의 익살과 풍자는 ‘감투타령’과 ‘만화경’으로 잘 설명된다.

▲ 포리돌 레코드에 실려 있는 왕평과 그의 만담.

장소팔, 고춘자, 김영운 시대

▲ 극동 레코드의 장소팔, 고춘자 민요 만담.

신불출 이후 만담계는 장소팔(張笑八)과 고춘자(高春子), 김영운(金英雲)으로 대변된다. 고춘자가 1995년 73세로 떠난 후에는 장소팔의 파트너로 백순례가 활약했다.
한국 만담계는 왕십리와 지연이 쌓여있다. 김영운은 서대문구 냉천동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때 왕십리로 이사 가니 이웃에 장소팔이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중학교 졸업 후 배우 수업으로 나섰다. 이 무렵 배뱅이굿 명인 이은관(李殷官)이 이곳으로 이사 왔다. 장소팔이 경성방송국에 데뷔할 때 이미 이은관은 신불출과 함께 평안도 일대 순회공연을 다니는 선배였다. 6.25 후에는 한양합주단 공연단체를 설립, 미 8군부대와 전국을 순례하는 유랑극단으로 활약했다.
장소팔의 본명은 장세근(張世根)으로 부친이 남대문에서 모피상을 운영하고 인사동에 술도가를 경영하고 있었지만 사업확장에 실패하자 변두리인 왕십리로 이사하여 만담인생이 될 수 있었다.
장소팔의 초기 파트너는 민요가수 고백화(高白花)로 오래 못 가고 두 번째로 10년 연하의 백금녀(白金女)를 맞았다. 충남 서천 출생으로 본명은 김정분(金貞粉)으로 체중이 과다하여 장소팔과 결별하여 TV시대 코미디언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백금녀 다음 콤비를 찾고 있을 때 1954년 KBS 노래자랑에 출연한 태평양 악극단 소속의 고백란이 눈에 들었다.

▲ 지구레코드의 김영운, 고춘자 만담집.

평북 운산 출생의 그녀는 장소팔보다 한 살 아래로 본명 고임득(高任得)에서 고춘자(高春子)로 예명을 바꿔 라디오시대와 TV시대까지 풍미했다.
김영운은 장소팔의 권유로 만담계에 나와 민요백일장 사회로 라디오 스타가 되고 ‘김영운 고춘자 민요만담’으로 인기를 끌었다.
장소팔의 후계자는 신소걸(辛笑傑)로 1960년 예산 공연 때 고교생 복장으로 찾아와 넙죽 절하던 신준현(辛駿鉉) 학생을 제자로 받아들여 후계자가 됐다. 그의 예명이 신소팔(辛笑八)로 코미디언 구봉서 씨는 ‘장소팔’과 ‘신소팔’이라고 즐겨 불렀다.
만담가들은 서영춘, 배삼룡, 구봉서 등 TV시대 코미디언 전성기 이전, 암울했던 일제와 빈곤과 낙망의 해방공간과 6.25 전란 등 우리민족의 애환을 함께 달래던 시절을 증언한다. 이 만담 100년사 속에 대략 90여명의 만담가들이 소개되어 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부터 ‘웃으면 복이 와요’까지 온갖 재담(才談)을 펼친 대사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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