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특명 算學, 曆法 연구업적

▲ 정평공 신도비

[이코노미톡뉴스=최종인 필자] 역성혁명의 지나간 자리는 피비릿내 나는 광풍의 흔적으로 얼룩졌고, 왕권의 안정을 위해 태종 이방원은 온갖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정도전 등 정적을 제거하였고, 처족 민씨가문을 척결하면서 세자 폐위라는 냉혹한 결단과 세종의 장인 심온을 죽게 하여 외척세력을 배제하는 초강수까지 불사하였다. 새 왕조의 정치적 안정을 구축하고자 태종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하여 내외의 불안정한 요소를 없앤 것이다. 이렇게 다져진 탄탄한 정치적 환경에서 세종대왕은 국가발전의 황금기를 이룰 수 있었고 그래서 역사는 세종을 성군으로 추앙하고 있다. 국부(國富)가 쌓이고 문화가 융성할 때는 출중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그 시대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세종시대, 특히 과학분야에는 이순지(李純之)를 비롯하여 이천, 장영실, 김담 등이 두각을 드러내 천문과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위대한 과학자의 등장

세종임금이 젊은 신하에게 물었다.
‘지도상으로 이 나라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명석한 문신 이순지는 대답해 아뢰었다.
‘본국은 북극에서 38도 강(强)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얼마 뒤 중국에서 온 사신이 세종임금에게 천문학 책을 바쳤다. 순지의 답에 미심쩍었던 임금이 똑 같이 물었다.
‘이 나라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잘 알겠군?’
천문학자였던 사신이 대답해 아뢰었다.
‘조선은 북극에서 38도 강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당시 과학 선진국인 명나라 천문 과학자의 대답이 똑 같았던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천문과학 장비가 많이 개발된 상태에서나 알 수 있는 지식을 600년 전 고도의 측정장비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정확히 답변할 수 있었을까?
문과 급제 후 승문원에서 외교문서를 다루던 이순지가 세종의 특명을 받아 이미 산학(算學)과 역법(曆法)에 관해 연구를 해 왔기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계산 방법에 따라 서울 위도를 38.25도로 산출했고 이것이 지금의 37.32도에 해당된다. 서양의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200년 전 이야기이니 실로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다.

천문과학의 전성기

▲ 정평공 이순지 묘소

이순지의 역산능력을 높이 평가한 세종은 그를 서운관에서 간의대(簡儀臺)업무를 보도록 했다. 간의대는 천문을 관측하여 별의 운행과 변화를 기록하고 그 원리를 파악하는 곳으로 지금의 천문 관측대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는데 여기서 장영실, 이천 등과 함께 간의, 규표(圭表), 앙부일구, 보루각, 흠경각을 운영관리하고 서책 인쇄를 위한 활자를 제작했다.
1437년에 세종은 천문학 분야의 업무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로 이순지를 정4품 호군으로 삼았다가 1443년 지금의 대통령 수석비서관에 해당하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격 발탁하여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토록 하였다. 이 책은 제1권 천문, 제2권 역법, 제3권 의상, 제4권 귀루(晷漏:해시계와 물시계)를 다루고 있는데, 발문(跋文)에서 그 편찬 동기를 이순지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왕의 정치는 역법과 천문으로 때를 맞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우리나라 일관(日官)들이 그 방법에 소홀하게 된지가 오래다. 1433년 가을에 우리 전하께서 거룩하신 생각으로 모든 의상과 귀루의 기계며, 천문과 역법의 책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두 극히 정묘하고 치밀하셨다. …중략… 역법에 있어서는 대명력, 수시력, 회회력, 통궤, 통경 등 여러 책을 본받아 서로 비교하여 교정하였다. 또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했는데 … …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구해보면 생각보다 얻는 것이 많으며, 더욱이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힘쓰시는 정사가 극치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칠정산 내외편과 당대 최고의 천문역서인 제가역상집에 세종의 천문학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고금의 천문역서에 통달했던 이순지가 꿰뚫어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칠정산과 동양의 천문학
칠정산(七政算)이란 책은 고등학교 역사책에 [세종 때 만든 새 달력]이라는 정도로 간단히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다. 칠정이란 <일곱 개의 천체> 즉 해·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곱 개의 천체운동을 정확히 계산하여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도록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1445년(세종24)에 처음으로 만든 천문 계산법이다. 예부터 동양에서는 하늘의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을 중국의 천자가 내리는 역법서(曆法書)에 의해서만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천하를 통괄하는 황제의 대권을 상징하는 징표가 역법이라고 인식되어 왔던 터라 제후국에서 독자적인 역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수시력이나 대명력 같은 역법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 엄연히 독자적인 역법서이며 조선이 자주적인 국가임을 칠정산이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정향력(貞享曆)이란 역법이 완성된 때가 1683년이다. 조선의 칠정산에 비해 200여년 정도 뒤늦게 등장한 이 역법서가 ‘일본인 천문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천문계산법’이라 하여 일본 내에서 대단한 자랑거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향력을 완성한 삽천춘해(澁川春海)라는 사람이 남긴 글에서 조선학자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통신사의 독축관으로 갔던 박안기(朴安期)에게 칠정산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강야정현정(岡野井玄貞)이 그의 제자 삽천에게 다시 전수하였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삽천춘해를 대단한 천문학자로 숭앙하는데 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TV드라마에 소개된 장영실에 대해서만 신분을 극복한 발명가로 잘 알려져 있을 뿐 세종대왕의 과학 분야 치적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이순지에 관해서는 거의 모르는 실정이다. 장영실은 기술자로서 탁월한 발명능력으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여 매우 흥미 있는 인생역정을 살았던데 비해, 이순지는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정통 관료이며 천문에 대한 철학적 소양을 갖고 과학행정을 총괄한 고위 행정관이자 학자였다.

▲ 칠정산 내외편

이순지의 가문

조선시대의 위대한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인 이순지(李純之)의 자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靖平)이며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양성이씨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고려 문종 때 능란한 외교술로 거란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여 정난공신에 봉해졌으며 식읍으로 받은 양성 땅에 세거하였다. 양성이씨는 이후 후손들이 고려조에서 현달하여 벼슬길이 이어졌고 이수인은 두문동 절신이며 이옥도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정2품(판서) 이상의 고관만 12명이 배출되었고 문과 급제자가 40여 명에 달한 가문이다. 이순지는 142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과 홍문관에서 시작한 관직생활이 세종의 특명에 의해 문신임에도 주로 천문과학 분야에서 종사했으며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 만년에 호조참의, 예조·호조·공조참판, 판한성부사, 판중추원사에 올랐으며 저서로 「칠정산」·「제가역상집」과 별자리의 해설과 일월성신에 관한 이론 및 성점(星占)이론을 추려낸 천문학 교과서「천문류초」와 일식과 월식의 간편한 계산법을 해설한「교식추보법」이 있다.

아버지 이맹상은 공·호조참의를 지내고 원주목사와 강원도관찰사, 중추원사를 지낸 고관이었으며 어머니는 문화류(柳)씨이다. 정평공의 배위는 영월신씨(辛氏)로 아들 여섯(扶·持·拱·把·抱·)과 딸 하나를 두었다. 세조11년(1565) 6월에 세상을 떠났고,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협조 - 정평공 18세손 이장동 서울종회장, 양성이씨대종회 이영직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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