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 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이코노미톡뉴스] 국민 가운데 정치인을 믿는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5% 수준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지난 작년 6~11월 전국 만18세 이상 남녀 1052명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 냉소주의의 정도’ 설문 조사 결과라고 언론들이 지난달 16일 보도했다. ‘정치인들은 나라 걱정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설문이었는데 ‘그렇다’는 응답이 무려 87.3%였다. ‘보통’, 그러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응답은 7.3%,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5.3%에 그쳤다.

“정치인말 믿으면 바보”

‘정치인들이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단지 표를 얻기 위한 것이다’라는 설문에 대해서는 85.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보통’은 9.1%, ‘그렇지 않다’는 5.3% 뿐이었다.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믿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73.4%, ‘보통’은 17.4%, ‘그렇지 않다’는 9.1%였다.
숫자가 많아 아주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하자면 국민 절대다수는 정치인의 의도와 행동과 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들은 온갖 교언영색으로 국민 혹은 유권자의 귀를 솔깃하게 하려 하지만,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 본색을 간파 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론조사 결과는 물론 아주 가변적이다. 그렇지만 이 수치를 못 믿겠다고 할 만한 반박 자료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바닥’이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국민만이 보여주는 독특한 인식은 아니다.
“정치인은 어디서나 다 같다. 그들은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건설해 준다고 약속한다.”
1960년 미국을 방문한 옛 소련 공산당 제1서기 겸 수상 흐루시초프가 뉴욕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양주동 편, 세계명언대사전)
공산당 1당 독재 체제 아래의 정치인들 행태도 그랬다면 ‘거짓말’은 정치인의 DNA라고 하는 게 정확할 듯하다.(정치인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이야 어디 그렇겠는가. 이른바 ‘정상배’들을 두고 하는 말이니 그렇게 이해하시길.) 그래서 말이지만 정치인을 못 믿겠다는 응답이 압도적이라는 사실 보다는 극히 소수일지라도 정치인을 믿는다고 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무너져버린 신상의 모습”

이것이 한국 정치의 비극적 측면이다. 가장 불신 받는 집단, 국민적 조롱의 대상이 되다시피 한 집단이 국가 구성과 운영의 기본 틀을 만들고 모든 면에 적용할 기준을 만든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국민은 가장 위태해 보이는, 가장 이기적인 인간형으로 지목되는 정치인 집단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겨 놓고 있는 것이다. 명백히 이건 모순이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아주 당당하고 태연하게 현직 대통령을 탄핵소추라는 수단을 동원해 추방했다.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불신을 받는 집단에 의해 쫓겨난 대통령의 잘못은 도대체 얼마나 컸던 것일까?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들먹이는데 국민이 이에 식상한지는 이미 오래다. 대개는 정치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언어습관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들이 ‘국민’이라고 말할 때 의식 속에 국민은 없다. 오직 자신만 있을 뿐이다. 혹 필자의 편견이라고 오해하진 마시라. 위에 인용한 설문조사 결과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이 특히 자주 입에 올리는 표현이 ‘제왕적 대통령’이다. 이 용어, 즉 ‘Imperial Presidency’는 아서 슐레진저 2세가 닉슨 정부 말기인 1973년에 출간한 저서의 제목이다. “황제와 같은 대통령직이라는 용어는 대통령의 권력과 책임 간 헌법상의 균형이 권력 쪽으로 기울어 질 경우에 생겨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슐레진저는 그의 다른 저서 ‘미국 역사의 순환’(정상준·황혜성 역)에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국제적인 위기가 조성되고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할 기회가 늘어남으로써 미국 대통령은 제왕과 같은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되었고, 닉슨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 점에서는 조지 W 부시의 경우도 비슷하다. 슐레진저는 부시를 ‘돌아온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 뒤를 잇게 될 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반면에 대통령의 제왕화를 가로막는 요인도 언제나 존재했다. “영국의 소설가 디킨스는 1842년 스타인백보다 1세기 먼저 미국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우상을 굳게 세우고 나서는 바로 그것을 끌어내려 부숴 버린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높은 직책에 오르는 사람들은 그 직책에 오르는 순간부터 자신의 몰락을 예상할 수 있다.’”(위의 책)
대통령의 예정된 몰락에 대해서는 길레르모 오도넬도 상징성 풍부한 표현으로 설명한다.
“오늘은 그들(대통령들)이 신의 섭리로 탄생한 인물처럼 추앙받다가도, 내일은 마치 무너져버린 신상들처럼 저주를 받는다.”(후앙 린쯔 외, 내각제와 대통령제, 신명순·조정관 역)

과도해진 국회의 권력

1987년 헌법에 의해 뽑힌, 그러니까 국민직선으로 선출된 임기 5년의 대통령들도 이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임기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자신의 과실과 정치·사회세력들의 집요하고 무자비하기까지 한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혹독한 임기 말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들보다 더 큰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에 탄핵을 당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더 약했기 때문에 밀려났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수가 있다.
직선제가 부활된 후 처음으로 당선된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 비록 크게 약화되긴 했지만 5공의 잔영과, 3당합당의 힘으로 버틸 수 있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자신들이 수십 년 간 육성하고 이끌었던 정치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상도동계, 동교동계와 그 주변 세력이 정치적 방파제의 역할을 해 줬던 것이다.
대통령직의 취약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는 재야정치세력과 이른바 운동권의 강력한 지지로 당선됐지만 안정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해 가도록 뒷받침해주는 세력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당선을 도왔던 여러 세력들은 일제히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과 위기감이 든다”는 말이 그런 환경 속에서 나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보수·진보의 극심한 진영대결 와중에서 ‘중도실용주의’를 내걸었다. 일종의 곡예정치였다. 아마 효과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정작 그의 정부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박 전 대통령과 그의 세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위상이 확고했기 때문에 당시의 집권당은 결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처지가 어떠했는지는 누구나 기억할 수 있다. 국회선진화법으로 국회 권력은 강대해진 반면 대통령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위축됐다. 거기에다 국회 내의 강력한 지원세력이어야 할 집권당이 지리멸렬해 버렸다. 자업자득의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더라도 이는 일찍이 어느 대통령도 겪지 못한 난국이었다. 집권당의 총선 참패는 박 대통령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됐고, 그것을 놓칠 리 없는 야당은 포화를 쏟아 부었다. 상처 입은 사자는 더 이상 백수의 왕일 수가 없다. 박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역대 대통령들의 참담한 경험을 목격했으면서도 지금 정치권에서는 축록(逐鹿) 경쟁이 한창이다. 주자들은 저마다 자신만은 전임자들의 운명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겠지만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 지레 걱정이 된다. 박 전 대통령은 임기를 일 년도 채 안 남긴 시점에 퇴임을 강요당했다. 차기 대통령은 당연히 임기를 무사히 다 마쳐야 하겠지만 누가 당선되든 약체정부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치적 곡예의 달인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임기 초부터 호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여소야대 국회의 위세과시가 극심해질 게 뻔하다. 이들은 그간 ‘제왕적 대통령’을 입에 달고 살아왔다. 야당 의원들의 경우 광장에서 ‘독재타도’라는 피켓까지 들어가며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면서도 국민 보는 앞에서는 이른바 ‘약자 코스프레’를 하는데 아주 능란했다. 상대를 악마 혹은 마녀로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려 한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이들은 정치를 ‘선과악의 대결’로 몰았다. 이들은 현직 대통령을 ‘악’으로 규정하고, 마침내 축출해 버렸다. ‘정의’의 이름으로! 민주적 정당정치의 본질적 측면 가운데 하나는 ‘선의의 경쟁’이다. 그런데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자신을 선의 편에, 상대를 악의 편에 두는 일에만 골몰한다. 그 때문에 음모의 정치, 음해의 정치가 항다반사가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몫이 될 불행을 축적해 온 것이다.
이미 국회의원들은 권력의 맛을 봤다. 가능하면 내각제나 분권형대통령제로의 개헌을 바라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 위력이 실증된 ‘국회의 권력’으로 대통령을 길들이려 하게 마련이다. 그에 굴복하지 않으면 대결은 불가피하고 현재의 헌정 구도로는 대통령이 지게 되어 있다. 이 악순환을 어떻게 단절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때다.
대통령 되기에만 바빠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선 주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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